남치근이 이것을 보고 한번 허허 웃고 김경석을 돌아보며
“영감, 자 어떻소? 내 말이 거짓말이오?”하고 오금박듯이 말하니 김경석이 “
내가 언제 영감 말씀을 거짓 말씀이라고 합디까?”하고 조금 기를 내어 말하였
다. “영감은 아까 내말을 곧이듣지 않으시는 것 같습디다그려” “나는 영감의
하시는 말씀을 그저 듣고 있었을 뿐이오”하고 남치근과 김경석이 서로 재미없
이 말할 때에 이윤경이 웃으면서 “저 아이의 귀신 같은 활재주를 눈으로 보지
않고 이야기만 듣는다면 누구나 다 곧이듣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남치근과 김
경석의 얼굴을 한번 차례로 돌아보고 “세상에서 이 사람이 명궁이다, 저 사람
이 명궁이다 하지만들 저 아이 같은 명궁이야 희한하지 않습니까? 한량을 많이
겪어 보신 두 분 영감은 혹시 달리 보셨는지 모르지만, 나는 처음 봅니다. 백 보
밖에서 버들잎을 쏘아 뚫는 것이 저 아이 같아서는 지이차이한 일이겠습니다”
하고 입에 침이 없이 봉학이의 활재주를 칭찬하고 “영감께서 잘 북돋우셔서 국
가의 동량 재목을 만드십시오”하고 남치근에게 부탁하였다. “계씨대감 휘하에
있던 아이이지요” “영감께로 잘 왔습니다. 순찰사 진중에 있었던들 두각이 잘
드러나지 못했을 터이지요” “그럴는지 모르지요. 내가 아무쪼록 장발해 줄 생
각이오” “생각 잘하신 일입니다” 하고 이윤경이 남치근과 수작하기를 그치고
잠자코 앉았는 김경석을 돌아보며 “인재가 원래 쉽지 않은 것인데 인재가 있어
도 세상이 알아주어야 인재가 되지 않습니까? 영감이나 내가 아까까지도 금새의
양유기가 한 성안에 있는 줄을 모르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을 붙이었다. 김경
석은 남치근이 무하 사람을 놓고 높아하는 것이 비위에 마땅치 아니하여 강잉히
말하는 태도로 “금세의 양유기일는지는 모르나 하여간 잘 쏘는 활이구만요”하
고 말하다가 “양유기가 옛사람인 까닭에 영감이 돋히어 보시는 말씀이지 실상
은 양유기의 활재주가 이봉학이만 했겠습니까?”하고 이윤경이 호되게 봉학을
편들어 말하는 바람에 “글쎄요”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김경석이 자기 처소
로 돌아왔을 때 기상이 좋지 못한 것을 중군이 보고 괴이쩍게 생각하여 슬그머
니 따라갔던 군관을 불러가지고 “오늘 점심에 무슨일이 있었나?”하고 물어서
그 군관이 이봉학이의 활 쏜 것을 이야기하고 “그 사람의 귀신 접한 활솜씨는
누구든지 칭찬 아니할 수 없습디다. 그렇지만 남방어사가 우리 방어사 영감께다
자기 부하를 자랑할 때 우리가 무색하기라니” 하고 말끝을 내기도 전에 그 중
군이 “잘 알았네. 영감께서 남방어사의 자랑에 비위가 상하셨네그려” 하고 곧
군관을 내보내고 김경석의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남방어사 영감 부하에
훌륭한 사수가 있더랍지요?” “그래 어째?”“우리 투석대에 있는 배돌석이의
팔매 재주도 그 사수의 활재주만 못지 않을 것입니다” “배돌석이?” “네. 그
배가가 소인의 고향 아이라 소인이 잘 압니다”“고향이 어디야?”“김해올시다
”“김해 아이면 돌팔매질을 잘하겠지” “예사로 잘하는 것이 아니올시다. 김
해서눈 전무후무라고 치는 유명한 팔매질꾼입니다. 한번 불러 들이셔서 재주를
봅시지요?” “어디 한번 불러볼까?” 하고 김경석은 곧 돌팔매꾼 배돌석이를
불러오게 하였다. 배돌석이는 키가 작달막한, 가슴은 바라질 대로 바라지고
얼굴은 가무잡잡한데 이목구비가 오종종하게 박히었었다. 김경석이 자기가
씻은 백채줄기같이 깨끗하게 생기니 만큼, 돌석이 인물이 눈에 들지 아니하여
현신을 받은 뒤에 가찰하는 말이 없었다. 중군이 보다가 민망하여 “지금 곧 팔
매질을 시켜 보오리까?” 하고 의향을 물으니 김경석이 말이 없이 고개를 끄덕
이었다. 중군이 방 밖으로 나와서 팔매질 준비를 지휘할때 돌석이를 보고 “이
애, 혹시 실수할라. 정신차려라”하고 넌지시 당부하니 돌석이가 “염려맙시오”
하고 선선히 대답하였다. 큰 바가지 하나를 얻어다가 한편 담 구석에 엎어 매어
달고 그 바가지 위에 그 바가지 위에 먹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놓았다. 돌석이가
육칠 간 밖에 가서 바가지 달린 곳을 향하고 서서 돌주머니의 끈을 끌렀다. 돌
석이는 글방 아이들이 필낭을 차듯이 돌주머니를 저고리 저고리 고름에 차고 그
속에 동그스름한 모 없는 돌을 십여개씩 넣어가지고 다니던 것이다. 돌석이가
돌을 내어 들고 섰다가 중군이 치라는 분부를 내린뒤에 바가지를 노려보면서 팔
매를 쳤다. 돌석이 손에서 나온 돌이 쏜살 건너와서 바가지 위에 구멍을 뚫었는
데, 그 구멍이 동그라미 안에 들었다. 다른 사람보다도 중군이 먼저 “신통하게
맞혔다”허고 칭찬하였다. 돌석이가 첫번 던진 것까지 도합 돌 여섯 개를 연거
푸 던졌는데, 뒤에 다섯 개가 모두 첫번 뚫린 구멍으로 쏙쏙 빠져나갔다. 김경석
이 이것을 보고 비로소 “용하다”하고 칭찬하였다. 돌석이가 돌을 거두어 주머
니에 넣을 때에 김경석이 앞으로 불러서 “저 지붕위에 앉은 참새를 돌로 잡겠
느냐?”하고 물으니 돌석이가 “네”하고 대답하고 나서서 돌 하나를 남겨 손에
들고 옆에 있던 군사를 돌아보며 “참새 대가리를 박살내어 놓을까?” 하고 말
한 뒤에 힘도 아니 들이고 슬쩍 팔매를 쳐서 참새를 잡았는데, 그 참새는 말과
같이 대가리가 바숴졌었다. 김경석이 그 참새를 가져오라 하여 친히 손에 들고
보기까지 하고 “팔매질이 활같이 번때는 없지만 하여튼지 재주 놀랍다. 군복
한 벌을 상급으로 주어라”하고 좌우를 돌아보는데 중군이 싱글벙글하면서 “돌
석이가 만일 한량의 짐에 태어나서 활을 배웠던들 활재주가 이봉학인가 그자만
못했을 리 없습지요. 돌석이는 아비가 김해 남역의 역졸이었습니다. 그 아비가
역시 팔매를 잘 치던 손인데 소인도 아이 적에 많이 보았습니다. 아비의 팔매가
자식에 대면 어림이 없습지요만, 그래도 석전군으로 일시 유명했습니다." 하고
말을 길게 늘어놓다가 "돌석이 같은 특별한 재주를 어째 진작 내게다 말하지 않
았는가?" 하고 김경석이 책망하여 "황송합니다." 하고 입을 다물게 되었다. 며칠
뒤에 김경석이 남치근과 같이 이윤경에게 모여 앉았을때 돌석이의 팔매 재주를
자랑하니 남치근이 대번에 "팔매가 활만 하오?" 하고 말하였다. "팔매질도 귀신
같으니까 업신여기지 못하겠습니다. 배돌석이의 팔매가 아마 이봉학이의 활만
못지않으리다." "이봉학이 활을 눈으로 보시고도 그런 말씀을 하시오" "눈으로
보았기에 말씀이오." "그래 참말로 봉학이의 활만 하단 말씀이오?" "나면 낫지,
못하지 않으리다." "그러면 한번 재주 겨룸을 시켜놓고 봅시다." "좋지요." "화살
에 인정이 없으니까 영감의 자랑거리가 화살 아래 꺼꾸러지면 낭패가 아니겠
소?" "돌에 인정이 없으니까 영감의 자랑거리가 돌 아래에 꺼꾸러질는지 누가
아오?" "어디 봅시다." "그리합시다." 하고 김경석과 남치근이 서로 말다툼하는
것을 보고 이윤경이 허허 웃으면서 "내일 한번 각떼 군사를 한데 모아 훈련하
고 그 끝에 두 아이의 재주 겨룸을 시켜 봅시다." 하고 말하여 "좋소." "좋지
요." 하고 남치근과 김경석이 각각 대답한 뒤에 이윤경이 다시 "두 아이의 재주
겨룸은 두 분 영감이 다 나에게 맡기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방어사가 온다는
말이 들릴 때에 이윤경은 벌써 장졸 호궤할 것을 생각하고 그 준비로 소를 여러
필 구해 두게 하고 술을 여러 독 빚어놓게 하였었다. 그 술이 괴기 시작하여 이
윤경이 호군할 것을 일간 일간 하던 차라 갑자기 서두르는 일과 달라서 모든 준
비가 선선하게 되었다. 있는 소를 잡고 괸 술을 걸러서 음식을 준비하고 성 동
편 넓은 빈 터전에 한 곳에 부계매고 여러 곳에 차일 쳐서 자리를 준비하고 호
군 끝에 놀리려고 재인 광대까지 뽑아서 등대시키었다. 재인 광대는 이윤경이
군중에 쓰려고 전주서 영암으로 올 때에 수백 명 복색을 갖추어 데리고 왔던 것
이다. 이윤경은 이와 같이 호군을 주장삼았으나, 남치근과 김경석은 이윤경의 뜻
을 모르고 다만 이봉학이와 배돌석이 재주 겨룸 시키는 것을 주장일로 생각하였
다. “팔맷돌은 구하기가 쉽고도 어려워서 환도를 대신 주니 그리 알아라”
하고 말을 일렀다. 이윤경이 전령 군사를 지휘하여 좌우방어사의 부하에서
이단 군사 오십 명씩 불러다가 봉학이와 돌석이를 각각 옹위하고 물러가
게 한 뒤에 안침으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앉으며 “오늘 재주 겨룸이 잘되었
지요?” 하고 말하니 김경석은 “글쎄요”하고 고개를 비틀고 남치근은 뾰루퉁
하고 말이 없었다. “둘이 다 유용한 인물인데 서로 해치지 않은 것이 첫째 잘
된 일이고, 승부가 없어서 이편저편 낯이 깎이지 않은 것이 둘째 잘된 일입니
다. 두분 영감이 잘된지 않았다고 하시면 내가 시비를 하겠습니다” 하고 이윤
경이 허허 웃으니 김경석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고 남치근은 한참 생각하다가
“영감의 말씀이 옳소” 하고 대답하였다. “술과 고기를 준비한 것이 있으니
장졸을 호궤합시다” “좋소” “좋지요” “오늘 하루를 즐겁게 보내려고 재인
광대들을 지휘해 두었는데 두 분 영감의 의향이 어떠하실는지요?”남치근은 맘
에 싫을 것이 없어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지만, 광대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김
경석은 반색하다시피 좋아하며 “좋다뿐이오. 지금이라도 곧 소리판을 차리시구
려” 하고 재촉하듯이 말하였다. 이윤경이 수하 군관 두서너 사람을 불러서 한
두 마디 말을 분부하더니 심부름꾼 남녀들이 술동이와 고기 안주 목판을 지게로
짊어 나르고 머리로 이어 날라서 부계 위와 여러 차일 속은 말할 것 없고 풀밭
위에까지 여기저기 술자리가 벌어졌다. 술기운들이 돌 만한 때에 재인 광대들이
떼로 몰리어와서 부계 아래에서 문안을 드리고 군관의 지휘를 따라서 이리 저리
흩어졌다. 얼마 아니 지나서 이곳에 단가 저곳에 잡가 노랫소리가 곳곳이 일어
나고, 여기 줄타기 저기 땅재주 구경판이 군데군데 벌어졌다. 각진 장졸이 서로
왕래하기 시작하여 차일 앞과 풀밭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왔다갔다 하
였다. “한 사발 받으시오” “안주 집으시오” 하고 술고기를 권하는 사람 “
재주를 잘 넘는데, 참말로 눈깜짝하면 못 보겠군” “토끼 화상을 잘 그리는 구
려” 하고 재인 광대를 평하는 사람들, 서로서로 웃고 지껄이는 중에 “수성장
은 당대 인물이오” “같은 형제간이라도 수성장은 속이 차돌 같은 분이지만 도
순찰사는 겉위풍뿐이신갑디다” “수성장은 지모가 비상한 양반이오” “수성장
은 부하 사랑이 거룩하신갑디다. 어떤 군사라도 부상한 것을 보면 손목을
잡고 눈물까지 흘리신답디다” 하고 수성장 이윤경을 칭찬하는 소리가 가장 많
았다. 이때 부계위에서는 소리판이 벌어져서 광대가 어려운 목을 쓸 때마다 김
경석이 고수보다도 먼저 “좋지 잘한다” 하고 얼러 주는 중이었는데, 어떠한
군관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와서 말에서 뛰어내리며 한달음에 부계위로 올라
왔다. 그 군관이 이윤경의 앞에 와서 가쁜 숨을 참아 가며 “지금 남문 밖에 왜
적이 새까맣게 몰려들어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윤경이 별로 놀라는 빛이 없
어 그 군관을 보고 구개를 끄덕이고 곧 고개를 돌리어 남치근과 김경석을 바라
보며 “자리를 마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니 남치근은 “자리가 다
무어요, 얼른 취군시키십시다” 하고 벌떡 일어서고 김경석은 “영감이 취군령
을 놓으시오” 하고 이윤경을 바라본 뒤에 “파흥이다” 하고 한옆에 물러섰는
광대들을 돌아보았다. 이윤경이 남문에서 온 군관을 먼저 보내고 부산히 취군을
시키는 중에 동문에서 군관이 와서 왜가 성 밖에 나타났다고 고하고, 또 서문과
북문에서 군관들이 와서 역시 왜의 나타난 것을 고하였다. 이윤경이 남치근과
김경석을 보고 성문 갈라 지킬 것을 상의 하니 김경석이 먼저 “영감이 갈라 보
시오” 하고 이윤경에게 일임하는 뜻을 말하여 이윤경이 “내가 갈라 보오리까
?” 하고 남치근의 얼굴을 바라본즉 남치근이 “남문은 내가 맡은 터이니까 남
문만 빼놓고 갈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남문도 좋지요만 제일 어려운 곳
을 영감이 맡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일 어려운 곳이 어다요?” “북문입
니다” “북문이 어째서 제일 어렵소?” “북문은 문이 약하고 성이 튼튼치 못
할 뿐 아니라 지형이 밖에서 공격하기 편하니만큼 안에서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왜가 이것을 잘 아는 까닭에 다른 문을 버리고 북문만을 친 때가 한두번이 아닙
니다. 우선 영감이 오시던 때도 북문 밖에서 접전 한바탕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남문은 고만두고 북문을 내가 맡으리다” 하고 남치근이 북문을 맡은
뒤에 김경석은 서문 하나를 맡고 이윤경은 동남 두문을 얼러 맡게 되었다. 남치
근이 제일 어려운 곳을 맡은 것을 좋아하여 즉시 부하 장졸들을 거느리고 북문
으로 달려와서 군사들을 자리잡아 벌려세우고 군관 몇 사람과 같이 문루에 올라
서 성밖을 내려다보니, 성 밖에 있는 왜가 불과 백여 명인데 그나마 두패에 갈리
어서 한 패는 성에서 멀찍이 있는 나무숲 아래에 퍼더리고 앉아서 한 패는 성에
서 가까운 둔전 위에 뭉치어 서 있었다. 둔정 위의 왜들이 문루위에 기치가 날
리고 군관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바라보더니 일제히 팔을 뽐내며 문루위를 가리
키고 성 아래를 가리키고 하는 것이 문루 위의 사람더러 성 밖으로 나오라는 뜻
이었다. 남치근이 문루 근처에 있는 사수들에게 활을 쏘라고 명하여 화살이 빗
발같이 날아나가니 왜들이 일시 둔전 아래로 뛰어내려갔다가 화살이 뜸하여진
뒤에 다시 둔전 위로 올라와서 문루를 향하여 욕지하는데, 젊은 왜들은 볼기짝
을 문루 편으로 치어들고 두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남치근이 욕질하는 것을 보
고 분이 나서 곧 부하 장졸에게 출전할 준비를 명하였다. 고각이 소리나고 기치
가 움직이며 성문이 열리니 둔전 위의 왜들이 숲아래의 왜들과 합세하여 접전할
준비를 차리는데, 남치근이 왜의 수 적은 것을 업신여기어 단번에 도륙내려고 군
사를 풍우같이 몰고 내달았다. 처음 형세로는 왜들이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하여
도 불과 얼마 동안에 하나 남지 않고 다 도륙을 당하고 말 것 같더니 다른 문의
왜들이 차차로 모여와서 나중에는 북문 밖은 왜의 천지가 되며 형세가 처음과
달라졌다. 남치근이 급히 부하를 거두어 진을 치다가 선봉장 소달이 간 곳이 없
는 것을 보고 군사를 놓아 찾던 차에 왜장이 소달의 머리를 칼끝에 꿰어들고 진
전에서 횡행하니 다른 장졸은 고사하고 남치근부터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달은 자기의 용맹을 믿고 깊이 적진에 들어가서 필마단검으로 좌충우
돌하고 다니다가 말이 앞다리에 칼을 맞아 고꾸라지며 사람도 역시 칼머리에 주
검 됨을 면치 못한 것이다. 진중 장졸이 소달의 머리를 보고 모두 기운이 죽어
서 군심이 황황할 때에 이봉학이 남치근 앞에 와서 “소인이 나가서 소위장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하고 품하여 남치근이 고개를 끄덕이니 봉학이 곧 활을 들
고 진으로 나아갔다. 이봉학이가 진전에 나설 때에 왜장은 소달의 머리를 들고
왜진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봉학이가 급히 앞으로 쫓아나가며 한번 활을 잡아
당기니 날아나가는 살이 왜장의 뒤통수를 꿰뚫어서 그자리에 고꾸라지게 하였
다. 봉학이가 소달의 머리를 빼앗아 오려고 고꾸라진 왜장에게로 쫓아갈 때에
여러 왜들이 일시에 쏟아져 나오니 남치근이 이것을 보고 급히 진을 풀어 가지
고 쫓아나가서 접전이 나게 되었다. 화살이 날고 창,칼이 번쩍거리고 북소리,아
우성 소리가 대단하였다. 남치근이 뒷걸음치는 군사 두서넛의 목을 베고 자기의
말을 몰아서 군사들보다 앞서 나가며 “나를 따라라!” 하고 큰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싸움이 달게 어울리기 전에 왜들이 일제히 아우성치고 앞으로 달려들며
군사들이 와하고 도망질 하는데, 형세가 막은 물 터지는 것 같아서 장령으로 겉
잡을 수 없었다. 남치근의 신변에는 이봉학 외에 오륙십 명 장졸이 남아 있을
뿐인데, 왜가 남치근이 대장인 줄 알고 겹겹히 둘러쌌다. 장졸 오륙십 명에 사수
가 반이 넘어서 사수들이 남치근을 중간에 두고 전후좌우로 둘러선 까닭에 왜가
화살이 두려워 바로는 덮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살은 점점 줄어들고 왜는 차차
욱여들어왔다. 남치근이 도저히 벗어날 가망이 없는 줄을 알고 말께서 뛰어내려
땅위에 주저앉아서 장졸들을 돌아보며 “내가 죽거든 너희 중에 누구든지 내 목
을 베어 가지고 도망해라. 죽은 뒤 목이나마 도적의 손에 넣지 마라” 하고 환
도로 목을 찌르려고 하였다. 그옆에 가까이 섰던 군관 하나가 남치근의 환도 든
손을 붙잡고 “조금 참아 보십시오. 설마 성 안에서 구원이 나오겠습지요” 하
고 우는 소리로 말하였다. 이때 이윤경이 북문 소식을 듣고 왔다가 남치근의 패
진하는 것을 보고 놀라 급히 김경석과 같이 군마를 거느리고 나오기는 나왔으
나, 왜에게 앞이 막히어 더 나가지 못하고 북문 밖에서 둔전을 끼고 진을 쳤다.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거의 낙심이 되었을 때, 왜들의 에워싼 것이 한구석이
갑자기 헐리기 시작하였다. 오륙십 명 사람이 일시에 헐리는 구석을 바라보니
그곳에 이수성장 김방어사의 군마는 나타나지 아니하고 몸에 갑주를 갖추지 아
니한 말탐 군관 한사람이 왜진을 짓쳐들어오는데, 그 군관 수중에 있는 칼이 번
개같이 놀아서 왜들이 그 앞에 수가 없이 거꾸러졌다. 그 군관이 마침내 에워싸
인 사람들에게 가까이 왔을 때, 괴상히 여기는 오륙십 명 주에 오직 한 사람이
반갑게 내달으며, “형님이오?”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 소리 지르는 사람은
곧 유명한 사수 이봉학이었다. 그 군관이 말 위에서 내리지도 않고 “오냐, 내다
” 하고 대답하고 “어서들 내 뒤를 따라나오게 해라” 하고 말하며 곧 말머리
를 돌이켰다. 남치근 이하 오륙십 명이 그 군관의 뒤를 따라서 왜진을 뚫고
나오는데 그 군관의 칼 앞을 막는 사람이 없었다. 그 군관이 길래 앞장서서 북
문 밖 둔전 근처까지 왔었는데, 이윤경과 김경석이 마주 나와서 남치근이 부득
이 수어 수작하고 다시 살펴보니 그 군관이 벌써 눈에 보이지 아니하였다. “봉
학아, 너의 형이란 사람이 어디로 갔느냐?”하고 남치근이 묻는데 “소인도 어
디 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봉학이가 대답한즉 남치근이 응 하고
혀를 차며 찌푸린 미간을 더욱이 찌푸렸다. 이윤경이 “누가 어디 갔단 말씀이
오” 하고 물으니 남치근이 패진한 분과 부끄러움이 속에 가득 차서 입이 무거
위진 까닭에 “네, 누구 말씀이오?” 하고 이윤경이 다시 물은 뒤에야 겨우 입
을 열어 “우리 앞서 오던 군관 말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것이 소위장이
아니든가요?” 남치근은 말이 없이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우리는 소위장인
줄만 알고 유심히 보지 않았구려” 하고 김경석이 말한 뒤에 “그러면 소위장은
어디 갔나요?”하고 이윤경이 물으니 “전망했소”하고 남치근은 더 말하기 싫
어하는 기색을 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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