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는 다 아시지만 봉학 언니는 활을 잘 쏘구 여기 언니는 칼을 잘 부리는데
나만 아무 재주가 없어서 어머니에게 구박두 많이 맞았더니 꼬챙이 던지기를
익힌 것이 지금은 백 보 이내의 큰 짐생을 맘대루 잡을 추 있소. "
"나무 꼬챙이로 어떻게 짐생을 잡나? “ 애기 어머니 말끝에 "나무 꼬챙이로
무슨 짐생을 잡아 새앙쥐나 잡을까. " 백손 어머니가 말깃을 달고 깔깔
웃기까지 하였다. "처음엔 나무 꼬챙이를 가지구 익히다가 나중엔
쇠끝으루 꼬챙이를 치어서 익혔는데 병을 고쳐주신 어른이 조그만 창끝
같은 병장기를 스무개 한벌 갖다주셔서 그뒤는 줄곧 그걸 가지구익 혔어요. "
"지금 가졌거든 어디 구경 좀 하세. " 애기 어머니 말에 "보따리에
들었으니 이따 구경시켜 드리지요. " 유복이가 대답하는 것을 백손 어머니는 듣
기가 무섭게 얼른 가서 유복이의 보따리를 들고 왔다. 병인이 홀저에 성한 다리
에서 쥐가 난다고 벽에 기대어 앉으면서 애기 어머니더러 주물러 달라고 말하여
애기 어머니가 병인의 다리를 주무르는 동안에 백손 어머니는 유복이 가까이 와
앉아서 "어서 좀 보여주시우. " 하고 졸랐다. 유복이가 보따리 속에서 유지에 싼
것을 꺼내서 풀러놓으니 반들반들 길이 든 조그만 창열 스무 개가 드러났다. 백
손 어머니가 얼른 손을 내밀어서 한 개를 집어들고 "아이구 이뻐라. 아주 창열
천연해. " 하고 말하였다. "이것을 주신 어른은 진서글두 잘하시구 대국
일두 잘 아시는 어른인데 이 창을 대국서 표창이라구 한다구 말하십디다.
내 이종매가 이것을 보구 장뼘 한 뼘밖에 안 된다구 뼘창이라구 이름을
지어서 나두 장난으루 뼘창이라구 부릅니다만 원이름은 표창이랍니다. "
"그래 이걸 가지구 짐생을 어떻게 잡소? ” "골통씨나 산멱에 두어
개 들어가 백히면 아무리 큰 짐생이라두 제가 넘어가지 별수 있습니까. " "빗맞
으면 큰일 아니오? “ "왜 빗맞게 던지나요. " "호랑이도 잡아보셨소? ” “잡아
봤습니다. " "우리 남매가 백두산 속에서 사냥질할 때 긴 창들을 가지고도 호랑
이에게는 여러 번 혼이 났는데 요런 조그만 쇠끝을 가지고 호랑이 같은 큰 짐생
을 어떻게 어를까요. " 백손 어머니의 말이 막 그칠 때에 병인이 애기 어머니더
러 "아 혼이 났다. 인제 좀 나았다. 저리 가 앉아라. " 말하고 유복이를 향하여 "
창인지 칼인지 이야기는 고만두구 병 고친 이야기나 어서 좀 하게. " 하고 말하
니 유복이가 ”녜.“ 대답하고 표창을 유지에 싸놓고 나서 병 고친 이야기를 다
시 시작하였다. "임자년 늦은 봄 일입니다. 제가 들 앞에서 나무 꼬챙이를 던지
는데 어떤 낯모르는 노인 한 분이 들어오더니 대번 제게루 와서 무엇을 던지느
냐구 묻구 나서 무어 잡을 만한 것이 있나 하구 둘레둘레 돌아보다가 나무 끄트
럭에 앉은 잠자리 한 마리를 보구 가리키면서 저것두 잡을 수 있겠느냐구 묻습
디다. 그래서 제가 그것 쯤은 누워서두 잡을 수 있다구 곧 드러누워서 꼬챙이
하나를 던졌습니다. 그것이야 안 맞을 까닭이 있습니까. 바로 들어가 맞았지요.
이것이 연분이 되어서 그 노인이 저의 병신인 것을 불쌍히 여기구 약을 해주게
되었었습니다. 그 노인은 산속으루 약을 캐러 다니는 어른인데 모르는 것이 없
는 이인이에요. 처음엔 그가 몸에 지녔던 환약 두어 줌을 먹어보라구 주구 가더니
그 뒤에 와서 제 다리가 좀 나은 것을 보구 인제는 되었다, 이것 한 제만 먹
으면 성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구 환약 한 봉지를 주십디다. 그것을 다 먹구는
곧 걸음을 걷게 되었습니다. " 병인이 이야기 끝나기를 기다릴 사이 없이 "나두
어떻게 하면 그런 신통한 약을 얻어먹구 성한 사람이 되어 보나. " 하고 길게 한
숨을 쉬었다. "걸음을 걷게 된 뒤 그 어른의 태산같은 은혜를 만분 일이라두 갚
으려구 그 어른을 따라다니며 몸 수구를 했습니다. 산 속으루 돌아다닐 때 표창
으루 짐생두 많이 잡구 강 건너 되땅에 갔을 때는 표창 가지구 되놈들하구 접전
까지 해봤습니다. 지지난 달에 그 어른이 강계 땅에서 병환이 나셨는데 워낙 노
병환이라 약효가 없어서 한 달포 동안 시름시름 편치 않으시다가 마침내 상사가
나서 제 손으루 감장해 드리구 맹산 이모부집에를 다녀서 나오는 길입니다. " 유
복이가 이야기 끝을 마친 뒤에 병인이 피곤하든지 눕혀 달라고 하여서 애기 어
머니가 병인을 거들어 눕히고 나서 유복이를 보고 "인제 우리는 좀 시원한 데로
나가지. " 하고 말하여 유복이는 애기 어머니와 같이 다시 마루로 나왔다. 해 진
지가 벌써 오래라 초생달 빛이 마당에 가득하였다. 백손 어머니가 아랫방 봉당
에 가서 멍석을 걷어다가 마당 한중간에 깔아 놓고 자기가 먼저 앉으면서 "형님,
손님 아재하구 이리 내려오시오. 침침한 마루보다 여기가 좋소. " 하고 소리쳤다.
애기 어머니와 유복이는 마루 복창 앞에 앉아서 서로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언
니가 언제쯤 온다구 말하구 갔소? ” "말 없었어. " "언제 올지 모르는구려. " "
요즈음 소문에는 난리가 끝이 났다니까 수이 올는지 모르지. " "언니를 한번 만
나보았으면 좋겠는데. "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게나. " "내일 곧 갈 터인데 언
니 올 때까지가 다 무어요. " "참말 내일 떠날 테야? “ "지금 내가 맘이 조조해
서 하루두 묵새길 수가 없소. " "무슨 급한 일이 있나? ” "있어요. 누나, 이따가
좀 조용히 이야기할 틈이 없겠소? “ "왜 그래? 다들 잔 뒤에나 조용할까. " 어
느 틈에 집안 식구가 거지반 다 마당 멍석자리로 모여들었다. 애기와 백손이는
멍석 가에 앉아서 서로 웃고 지껄이고 팔삭동이는 멍석 위에 네 활개를 벌리고
자빠졌고, 벗개들을 찾아다니느라고 종일 현형 아니하던 검등이까지 마루 밑에
서 기어나왔다. 검둥이가 저를 가장 좋아하는 애기와 저를 제일 구박하는 백손
이가 느런히 앉았는 것을 보고 가까이 가다가 말고 꼬리치고 섰는 것을 백손이
가 "이눔의 개가 왜 나왔어 ! " 하고 일어서서 발길질하려고 하니 애기가 "오빠
는 개하구 무슨 원수 졌소. " 하고 나무라며 백손이를 붙잡아 앉히었다. 백손 어
머니가 마루를 치어다보며 "아니들 내려오실라오? ” 하고 또다시 소리치니 "저
리 내려갈라나. " "아무리나 합시다. " 하고 애기 어머니와 유복이도 역시 마당
으로 내려왔다.
멍석자리의 이야기판이 벌어졌다. 이야기에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나와서 사람
들은 정신이 이야기에 팔린 중에 검등이는 애기 가까이 엎드려서 멋없이 사람들
의 얼굴을 치어다오고 있다가 부엌에서 무슨 새까만 것이 나오는 것을 보고 우
르르 쫓아갔다. 키킥하는 것은 검등이요, 야옹하는 것은 고양이다. 개와 고양이
의 싸움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훼방놓았다. 백손이가 짚신짝을 집어던지니 고양
이는 날쌔게 지붕으로 뛰어올라갔다. 검등이가 치어다보며 키킥하니까 고양이는
내려다보며 야옹야옹하였다. 애기 어머니가 애기와 백손이를 돌아보고 웃으면서
"개와 고양이가 어째서 저렇게 원수가 되었는지 너희들 아니? “ 하고 물으니
백손이는 "몰라. " 하고 대답할 뿐이고 애기는 "어째서 원수가 되었소? ” 하
고 되물었다. "예전에 백정이 어떤 양반하고 이웃해 사는데 그 양반이 똥구녁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백정에게서 키를 갖다 쓰고 키값을 주지 않았더란다. 그 백
정은 양반을 보면 키값을 내라고 조르고 그 양반은 양반보고 키값 달란다고 강
호령질로 배기다가 나중에 백정도 죽고 양반도 죽었는데 백정의 넋은 개가 되고
양반의 넋은 고양이가 되어서 개는 고양이를 보면 키값을 내라고 키킥하고 고양
이는 양반이라고 양양한단다. " 애기 어머니의 이야기가 끝이 나자 애기는 "오
빠, 인제부터는 개를 구박 마오. " 하고 옆에 앉은 백손이를 돌아보고 백손이는
"고눔의 키값 안 준 고앙이를 잡아 죽이까 부다. " 하고 지붕에 있는 고양이를
치어다보았다. 애기 어머니가 실없이 "너희 이 아저씨더러 아까 보이든 창끝으루
잡아보시라구 졸라 봐라. " 하고 부추겨서 백손이가 조르고 애기가 조르고 백손
어머니까지 졸랐다. 유복이가 졸리다 못하여 주머니 속에서 다른 쇠끝을 한개
꺼내서 손에 들고 일어섰다. 유복이의 손이 한번 번뜻하며 지붕의 고양이가 양
하고 껑충 뛰더니 곧 마당으로 굴러떨어졌다. 백손이가 쫓아가서 떨어진 고양이
를 집어들고 와서 여러 사람을 보이는데 고양이 두 눈 사이에 쇠끝이 들어가 박
히었었다. 도둑고양이가 양반의 넋으로 몰리어 죽는데 백정 넋이란 검둥이는 무
슨 까닭에 겁이 났던지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다시 나오지 아니하였다. 유
복이가 고양이 잡은 쇠끝을 씻어서 주머니에 넣은 뒤 표창으로 사냥한 이야기를
하는데, 아슬아슬한 이야기가 많아서 애기와 백손이까지 밤이 이윽토록
자지 아니하였다. 유복이와 천왕동이와 팔삭동이는 아랫방에서 자고
애기 모녀와 백손이 모자는 마루에서 잤다. 밤이 깊은 뒤다. 애기 어
머니가 아랫방 앞에 와서 "동생. " 하고 유복이를 불렀다. 잠꾸러기 팔삭동이는
코를 곤 지가 오래고 늦게 돌아온 천왕동이도 첫잠이 깊이 들었다. 유복이는 천
왕동이 돌아을 때 잠이 깨어서 한동안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다시 잠이
들려 하던 중이라 대번에 목소리를 알아듣고 "네. “ 하고 일어났다. "이리 나오
게. " ”네.“ "멍석 펴놓은 데로 갈까? ” “네. ” 하고 유복이가 애기 어머니
의 뒤를 따라서 마당으로 나왔다. 이때 달은 진 지가 오래고 별빛이 희미할 뿐
이었다. 애기 어머니는 조그만치 화톳불을 놓으려고 광솔 가지러 가는 것을 유
복이가 자는 사람 잠 깨기 쉽다고 말리어서 두 자람이 어두운 속에 앉아서 가만
가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조용히 할 이야기가 무엇이야? “ "내가 갚아야만
할 원수가 있는 것은 누나 알지요? ” "아버지 원수 말이겠지. " "아버지의 원수
를 갚는 것이 어머니의 한풀이까지 되오. 지금 어머니는 지하에서 원수 갚는 날
을 고대할 것이오. " "원수가 누구인지 지금까지 살았는지 살았으면 어디서 사는
지 그것을 다 알아야 할 것 아니야. " "아버지를 모함한 놈이 성이 노가인 것은
어머니에게서 들었구 이모부가 배천으루 이사 나을 때까지 강령서 산 것은
이모부에게서 들었으니까 그만하면 종적을 찾을 수가 있겠지요. 단지
그놈이 그 동안 죽었을까 보아 근심이오. " "지금 살았다면 나이 꽤 많을걸. "
"한 칠십 가량 되었을 것이오. 그놈이 살아 있어야망정이지 만일 죽었으면
그놈의 집은 결딴이지요. " "어째서? “ "그놈이 살아 있으면 그놈 한 놈만
죽여서 원수를 갚을 테지만 그놈이 죽고 없으면 그놈의 집안을 도륙낼 작정이오. "
유복의 말소리는 나직나직하지마는 그 말은 말말이 힘차게 들리었다.
애기 어머니가 잠간 동안 잠자코 있다가 유복이 손을 덥석 잡으며
"원수 갚고서 붙잡히면 어찌하나! ” 하고 물으니 유복이는 수월스럽게
"죽지요. 죽는 것이 겁이 나서야 원수를 갚을 수 있소. " 하고 대답하였다.
"백손이 어른과 봉학이가 오거든 서로 의논해서 하는 것이 좋지않을까? “ "왜
요? " "글쎄 말이야. " "나두 죽기 전에 한번들 만나보구 싶은 생각은 간절하지
만 원수 갚는 데 도움받을 생각은 꼬물두없소. " "자네 재주 가지고 원수 갚기는
염려 없겠지만. " "누나, 염려 마시오. " "지금 걸음은 잘 걷나? ” "잘 걷는 셈
이오. 요새 해에 하루 일백이삼십 리는 무난하오. " "십년 앉을뱅이가 약 한 제
에 그렇게 되었어? “ "약은 여러 제 먹었소. 내가 그 이인 노인을 따라다니는
중에 나의 신세와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했더니 그 노인이 아버지 원수를 갚도록
사람을 만들어 준다고 장담을 합디다. 그래서 다른 약을 얻어먹었소. 그게 차력
약입디다. 지금 내 힘이 실 장정 십여 명은 무섭지 않을 만하오. " "그래 죽산
다녀서는 바로 원수를 찾아갈 터인가? ” "아니오. 내가 죽기 전에 할 일이 또
한 가지 있소. " "무어야? “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루따루 둘 수 있소? 아버지
를 파다가 어머니와 같이 묻을 작정이오. 그래 죽산 다녀서는 서울루 갈 터이오.
" "서울서는 배천으루 갈 터이지? ” "암, 그렇지요. " "그러면 배천 갈때 좀돌더
라도우리 집에 다녀가게. 그동안이라도 백손이 어른이 돌아올는지 모르니. " "글
쎄요. " "다시 온다면 내일 가게.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일은 못 갈 테니 그리
알아. " "보아서 오지요. " "보아서가 아니야. 꼭 온대야 놔보낼 테야. " 그 뒤에
도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느라고 애기 어머니와 유복이는 먼동이 틀 때까
지 마당에 앉아 있었다.
2
유복이가 양주서 떠날 때 생각에는 죽산이 이백여 리라니 조금만 욱걸으면 하
루 한나절에 댈 수 있으려니 하였더니 모르는 길을 물어가며 오느라고 이틀 만
에도 거의 해동갑하여 간신히 죽산읍내를 대어 왔다. 유복이가 어떤 바람을 붙
들고 칠장사를 물었다. "칠장사가 어디 있소? “ "어디 있다니 칠현산에 있지요.
" "칠현산이 여기서 가깝소? " "삼십 리요. " "아이구, 삼십 리면 지금 가기 어렵
겠네. " "보아하니 초행인데 산길 삼십 리를 지금 어떻게 가겠소. 갈 생각 마우.
" 유복이가 그 사람의 말을 들은 뒤에 읍내서 묵을 작정하고 과객질할 만한 집을
찾느라고 한동안 이 집 저 립 다니며 기웃거리다가 나중에 어느 큰 기와집 하나
를 보고 찾아왔다. 대문 앞에서 들여다보니 마당은 넓고 마루는 높은데 마당에
는 하인들이 왔다갔다하고 마루에는 양반 두 분이 앉아 있었다. 유복이가 으리
으리한데 눌려서 들어갈까 말까 잠간 동안 주저하다가 이왕 과객질하는 바에 큼
직한 집에서 잘 얻어먹고 가리라 생각하고 대문 안에 들어 서니 하인 하나가 쫓
아오며 웬 사람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유복이가 하룻밤 묵어가자는 뜻을 말한즉
그 하인이 주인 양반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오늘 우리 댁에는 손님이 오셔서
잘 수 없소. 다른 데나 가보우. " 하고 방색하였다. "손님 온 집에는 다른 사람
재우지 못하우? ” "잔소리 말구 어서 다른 데루 가우. " 하고 그 하인이 곧 몰
아낼 기세를 보이는 데 유복이가 슬며시 골이 나서 "나는 다른 데 못 가겠소. "
하고 언성을 높이었다. 주인 양반 같아 보이는 사람이 마루에서 내려다보며 "웬
사람이 함부루 소리를 지르느냐? “ 하고 말하는 것이 하인에게 묻는 말도 같고
유복이를 꾸짖는 말도 같았다. 유복이가 한두 걸음 앞으로 나서며 "지나가는 과
객이 하룻밤 자구 가자구 왔습니다. " 하고 소리를 질러 말하니 그 양반은 호령
기 있는 언성으로 "자자면 조용히 자자고 할 것이지 무슨 야료야! " 말하고 곧
하인더러 "마방에서 재워 보내려무나. " 하고 분부하여 유복이는 하인이 지시하
여 주는 마방에 들어앉게 되었다. 그 방에 있던 손님의 하인들과 서로 인사하고
수작하는 중에 유복이는 그 집 택호가 안승지댁인 것을 알고 또 온 손님이 서울
손님인 것을 알았다. 얼마 뒤에 저녁 밥상이 나왔다. 밥이 서홉밥일 뿐 아니라
찬도 망측하고 하인들은 나중에 사랑 대궁상을 물려다가 먹는데 그 상은 칠첩
반상이 분명하였다. 저녁밥이 끝난 뒤에 주인의 하인과 손님의 하인이 이야기들
하는 것을 유복이는 한옆에 앉아서 들었다. "칠장사 경치가 좋소? ” "좋다뿐이
오. 내일 가보면 아실 테지만 선경 같지요. " "큰절버덤두 명적암이란 암자가 경
치가 썩 좋지요. " "철쭉 철이나 단풍 때 오셨드면 좋았을걸 지금은 산수뿐이지
무슨 구경거리가 있어야지. " "내일 일찍 가신답디까? “ "한낮은 더우니까 일찍
가실걸요. " 유복이가 주인의 하인 한 사람을 보고 "칠장사에 생불 스님이 있다
지요? ” 하고 물으니 그 하인이 "있지요. 전에는 생불 스님이라구 해서 근처 양
반님네까지 대접해 주셨지만 지금은 백정중이라고 대접을 잘 아니합니다. " 하고
대답하였다. 옆에 있던 다른 하인이 "여보게 이 사람아, 백정중이라두 생불은 생
불이라네. " 하고 동무 하인을 나무라고 "칠장사 생불을 만나보러 오신 길이오?
“ 하고 유복이더러 물었다. 유복이가 ”녜. “ 하고 그 하인의 말을 대답한 뒤
에 먼저 말하던 하인을 보고 "백정중이라두 지금 세상에 단벌 가는 인물이라우.
" 하고 말하니 그 하인이 "저의 근본이 백정이면 다 알아보았지 인물이면 무엇
하우. " 하고 불쾌스럽게 말하여 유복이는 다시 더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유복이가 안승지 집 마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밥 한술을 남나중
얻어먹은 까닭에 햇살이 훨씬 퍼진 뒤 그 집에 칠장사 가는 일행과 함께 떠나게
되었다. 안승지 집의 당대 주인 안진사가 서울서 온 친구를 칠장사 구경시켜 주
기 겸 시회로 하루 소견하려고 동네 친구 두 분을 더 청하여 같이 가는 터이라
그 일행은 양반이 넷이고 말 하나, 나귀 셋, 짐승이 넷이고 견마잡이가 넷이고
그 외에 또 손님 하인이 하나, 주인 하인이 하나, 사람 수효만이 도합 열이었다.
유복이는 양반 행차를 배행할 묘리가 없어서 청처짐하게 뒤에 떨어져 갔다. 그
일행이 길을 차지하고 가는테 마주 오다 만나는 행인들은 말할 것 없고 길 옆에
섰던 농군들도 황망히 길을 비키었다. 읍내서 십여 리 나왔을 때 어떤 나무꾼
하나가 앞서 가는데 사람이 어리보기든지 "비켜서라, 에라 비켜서라! " 하는 길
잡는 소리를 번연히 들으면서도 얼른 비키지 아니하여 앞에 가는 견마잡이가 사
정 없이 왈칵떠다밀어서 지게 진 채 길 옆도낭에 처박히었다. 일행은 그대로 지
나가고 뒤에 오는 유복이가 붙들어 일으키니 그 나무꾼이 유복이를 양반의 일행
으로 여기고 "죽을 때라 잘못했으니 살려줍시오. " 하고 빌었다. 유복이는 도랑
에 처박힌 자의 비는 꼴이 도랑에 처박은 자의 행패보다도 더 불쾌해서 "예끼
순. “ 하고 다시 돌아다보지도 아니하고 일행 뒤를 멀찍이 따라갔다. 하인 하나
가 중간에서 앞서 가서 절에 연통하여 일행이 절에 당도하기 전에 여러 중이 장
삼을 떨뜨리고 절문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승 문안드립니다. " "진사
님 행차합시오. " "생원님 오십니까? ” 하고 여러 중들이 제각기 합장하고 일행
을 맞아들이는 중에 유복이는 뒤에 와서 어떤 젊은 중 하나를 보고 생불 스님
만나기를 청 하였다. 젊은 중이 "그 노장의 상좌가 여기 있으니 물어보시오. "
말하고 옆에 있는 젊은 상좌중을 가르쳐 주어서 유복이는 그 상좌중을 향하여
온 사연을 말하고 곧 그 상좌중의 뒤를 따라들어갔다.
안진사와 그의 친구들은 한동안 판도방 마루에 걸터앉아 땀을 들인 뒤에 고적
구경을 나서는데 지도하는 중 하나가 앞을 서고 여러 하인이 뒤를 따랐다. 글자
가 완하여져서 군데군데 읽을 수 없이 된 비석 앞에 와서 지도하는 중은 서울
손님을 보고 "이것은 고려 혜조국사의 비올시다. 혜조 스님께서 도둑놈 일곱을
감화시키셔서 정도로 끌어들이셨는데 그 도둑놈 일곱이 모두 신장이 되어서 이
절을 수호합니다. 세상에서는 혜조 스님이 이 절을 개창하신 줄로 말하옵지만
삼한고찰을 중창하신 것이외다. " 하고 설명하고 많은 세윌에 늙을 대로 늙은 반
송 앞에 와서 "이것이 나옹 스님이 심으신 반송이올시다. 이 반송의 나이가 지금
육백 살이 넘었을 것이외다. " 하고 또 설명하고 대웅전을 구경시킨 뒤에 그 지
도하는 중은 여러 양반들을 보고 "이 절이 본래는 대찰로 유명하던 절이온데 고
려 말년 큰 난리에 충화를 당하온 후 이때껏 일신하게 중창하지 못하온 까닭으
로 이같이 보잘것이 없소이다. 백여 년간 거의 빈 절이 되다시피 하와 이십 년
전까지도 중 한둘이 동냥으로 간신히 향화를 받드옵다가 도덕이 갸륵한 노장 한
분이 이 절에 오신 뒤로 근처에서 불공두 많이 드옵고 또 각처에서 공부하는 중
도 모여드옵는 까닭에 지금은 겨우 절 모양을 차리고 지내옵니다. "
하고 절 사적을 대강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지금도 절의 전답이 한 마지기 없
사온 까닭으로 소승들이 지내기가 군간하올뿐더러 손님께 지공하옵는 것이 마련
이 없사외다. " 하고 절의 형편을 잠깐 하소연하였다. 여러 양반들이 고개들을
끄덕이며 듣고 나서 서로 돌아보고 "자네 시주 노릇 좀 아니하려나. " "자네가
아마 공덕을 쌓을 생각이 나는 모양이지. " 하고 실없은 소리로들 지껄이었다.
서을 손님이 지도하는 중에게 "인제 더 구경할 것은 없는 모양이냐? “ 하고 묻
고 곧 안진사더러 "인제 어디 가 좀 들어앉세. " 하고 말하여 일행이 대웅전 뒤
로 돌아 내려오는 길에 정결한 별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지도하는 중은 앞서
가고 양반들은 뒤에서 어슬렁어슬렁 오다가 서을 손님이 "여기가 깨끗하고 좋아
보이는군. " 하고 지쳐놓은 별당 중문을 열어 보니 별당 마루에 풍신 좋은 늙은
중 하나가 책상다리하고 앉았는데, 상좌 하나는 뒤에 서서 부채질하고 속인 하
나는 모를 꺾어 꿇어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 었다. "저 중이 장히 점
잖아 보이는군. " 하고 서을 손님이 안진사를 돌아보는데 안진사의 하인이 뒤에
와서 빠끔히 중문 안을 들여다보며 "저 중이 백정중이올시다. 저 속인은 아까 같
이 온 과객이로구먼요. " 하고 손님께 말하고 곧 뒤를 이어 "소인이 들어가서 백
정중을 불러내 오리까? ” 하고 의향을 물었다. 손님이 갈없이 잠깐 비켜서니
그 하인은 쭈르르 중문 안으로 들어가서 별당 뜰 아래에서 마루를 치어다보며 "
양반님네가 문밖에 와 서셨으니 얼른 나와 영접해. " 하고 소리를 질렀다. 노인
대사는 빙그레 웃고 말이 없는데 꿇어 앉았던 속인이 일어서서 마루 끝으로 나
오며 "누구더러 누구 영접하란 말이오? “ 하고 말씨 곱지 않게 물었다. "누가
당신더러 나오라우. " 하고 대번에 목자를 부라리는 것은 어젯밤에 근본이 백정
이면 더 볼 것이 없다고 말하던 하인이요 "그러면 누구 말이야? ” 하고 차차
말을 쇠는 것은 어젯밤에 그 하인의 말을 불쾌히 여기던 유복이다. "저 중더러
말하는데 왜 중뿔나게 나서서 말썽이야. " "저 중이라니 말을 배운 것이 그뿐인
가! " 말이 좋지 않게 왔다갔다 하는 중에 대사가 상좌의 손을 잡고 일어서서
몇 걸음 마루 앞으로 나서며 "이 사람 당치 않은 시비 말게. " 하고 유복이를 제
지하니 유복이가 몸을 돌쳐 대사를 향하여 "대체 양반의 집 종새끼는 사람 새끼
가 아니라 개새끼예요. 되지 못한 자세나 할 줄 알구. " 하고 말을 그치자마자 "
너는 백정놈의 첫벌 새끼냐 두벌 새끼냐. " 하고 그 하인이 주먹을 불끈 쥐고 뜰
위로 올라왔다. 유복이가 다시 돌쳐서서 올라오는 하인의 동가슴을 향하여 한번
발길을 날리니 그 하인은 쿵 하고 마당에 나가 떨어졌다. "그게 무슨 상없은 짓
인가. " 하고 대사가 유복이를 책망하는 중에 양반들의 호령 소리가 들리며 하인
다섯이 앞을 다투어 몰려들어왔다. 유복이가 이것을 보고 뜰 위로 뛰서내려가서
두 팔을 쭉 벌리고 서서 "잠깐 내 말 들어라. " 하고 소리를 지르니 앞선 하인이
발을 머뭇거리며 다른 여러 하인들도 따라서 멈칫멈칫하였다. "당신네들이 몇십
명이라두 무서을 것이 없지만 우리 선생님이 상없은 짓 말라셔서 고만둘 테니까
저 자빠진 놈이나 끌어가지구 나가우. " “이 자식이 누구를 싯까스르나. " "그
자식이 하늘이 높은 줄을 모르는구나. " 이 하인이 이 말, 저 하인이 저 말 하는
중에 먼저 발길에 채인 하인이 어느 틈에 일어나서 앞으로 대들면서 "선생 제자
할 것 없이 두놈다 나가자. " 하고 눈방울을 굴리었다. 유복이가 저의 선생을 호
놈하는 데 열이 나서 "예 이놈들, 순리루 못 나가겠거든 견뎌봐라. " 하고 대사
가 말릴 사이도 없이 하인들에게로 뛰어내려가서 악 하고 이놈을 치고 응 하고
저놈을 쳤다. 유복이가 날래게 날뛰는 바람에 먼저 하인까지 하인 여섯이 손발
도 많이 놀려보지 못하고 엎어지고 자빠졌다. 열에 뜨인 유복이는 하인을 한 사
람씩 잡아 일으켜다가 중문 밖에 내치려고 먼저 불공스럽게 굴던 하인부터 꼭
뒤를 잡아 일으켜다가 중문턱에 세우고 꽁무니를 제기려고 할 제, 손님을 지도
하던 중이 마주 들어오며 팔을 벌리어 막았다. 이 동안에 대사가 상좌의 부축을
받고 마당에 내려와서 유복이를 붙잡고 잠깐 동안 얼굴만 들여다보다가 "이 사
람 뒷생각 없이 이게 무슨 짓인가! " 하고 꾸짖으니 유복이는 그제야 하인의 꼭
뒤 잡았던 손을 놓고 대사 앞에 꿇어앉아서 "선생님께 누가 미칠 것을 생각 못
하구 잘못했습니다. 지금 양반들에게 나가서 자청해서 볼기라두 맞겠습니다. "
하고 말하였다. "어서 일어나서 저 방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게. " 하고 대사
는 유복이를 자기 침실로 들여보내고 곧 손님 지도하던 중더러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여러 하인을 부축하여 데려다가 큰 방에 눕히라고 이르고 자기는
상좌를 데리고 대웅전 뒤에 몰려가 섰는 양반들에게로 올라갔다.
안진사 일행 양반 네 사람은 하인들이 허무하게 봉패하는 것을 보고 창피가
몸에까지 미칠까 겁이 나서 멀리 대웅전 뒤에 와 모여 서서 "이런 소조가 어디
있나! " "참말 큰 봉변일세! " "망신살이 뻗쳤어. " "망신이라면 헐후하지. " 처음
에 이렇게 괴탄들 하고 "분을 어떻게 풀면 좋단 말인가. " "원에게 기별해서 관
차를 보내랄까. " "누구를 시키나? ” "중 시키지. " "한속이 아닐까 ? “ "우리
중의 누구든지 하나 가세. " "자네 자견할 줄 알지? ” "나는 견마 없이 다녀본
적이 없네. " "지금 점심때가 다 되었으니 읍내 가서 지체할 건 고만두고 내왕
육십 리만 하재도 밤이 될 것일세. " "아직 하회를 좀더 보세. " "그놈이 도타하
면 어찌하나. " "중놈들 잡아다가 채근하지. " "하여튼 좀더 있어 보세. " 나중에
는 이렇게 작정이 없는 작정을 하고 별당 동정을 살피는 중에 늙은 중이 상좌를
데리고 구부렁거리며 올라왔다. 그 늙은 중이 양반들 앞에 와서는 면면이 합장
배례를 공손히 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같이 태연하게 "여러분 행차를 빨리 영접
하지 못하고 오래 서서 기시게 해서 죄송하기 이를 게 없습니다. 저의 처소가
과히 누추하지 아니하니 잠깐 들어가 앉으셔서 담화들 하시기를 바랍니다. " 하
고 말하였다. 양반들이 의려가 있어서 서로 돌아보며 말이 없으니 그 늙은 중은
다시 "의논하실 일이 있더라도 가 앉으셔서 의논하시고 처치하실 일이 있더라도
가 앉으셔서 처치하시지요. 자 내려들 가십시다. " 하고 말하는데 말씨가 부드럽
기는 한이 없이 부드러우나 어디에 힘이 있는지 그 말을 듣는 사람이 거역하지
못할 힘이 있어서 양반들이 대사를 따라 별당에 와서 마루에 좌정하였다. 하인
들과 과객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상좌는 대사가 별당에 돌아오는 길로 무슨
말을 일러서 밖으로 내보내고 대사와 손님 아울러 다섯 사람 뿐이다. 저편에는
손님이 네 분 느런히 앉고 이편에는 대사가 흘로 앉았다. 안진사와 읍내 양반
두 사람은 서울서 처음 온 손님과 달라서 대사와 다소 안면이 있는 터이라 전에
본 일 있는 사람의 인사 수작들을 간단히 마친 뒤에 안진사가 말을 묻고 대사가
대답하였다. "하인들을 어디로 데려갔나? “ "큰 방에 갖다 눕히라고 일렀습니
다. " "병신 된 것이 많을 터이지. " "과히 상한 사람은 없는 모양이외다. 설혹
상한 사람이 있더라도 절에 의약이 있으니까 염려 마십시오. " "그 행패한 손은
어디로 보냈나? ”"무슨 처분이 내리시기까지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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