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사의 일행이 다리 팔 접질린 하인들을 조리시키느라고 그날 밤 절에서 묵
는데 이참봉은 별당에서 대사와 같이 자려고 하였으나, 안진사가 좁은 처소에서
여럿이 자기 불편하다고 말하여 여러 양반들은 판도방에 나가서 자고 유복이만
대사의 별당에서 자게 되었다. 만일에 양반들이 별당에사 자게 되면 유복이는
선생과 이야기할 틈이 없을까 보아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되던 차에 안진사가
고집을 세워서 판도방으로 나가게 되니 유복이는 안진사가 도리서 고마워서 여
러 양반들이 별당에서 나갈 때 특별히 안진사 뒤를 따라나오며 "안녕히 가서 주
무십시오. " 하고 인사까지 하였더니 안진사는 처소가 좁으니보다도 유복이 같은
사람과 한데 굴기가 싫어서 나가는 판이라 흘깃 돌아보고 나가면서 "주제넘은
손님이로군. " 하고 먼산바라기로 꾸짖었다. 유복이가 처음에는 무료하니 섰다가
나중에는 슬그머니 분이 나서 곧 안진사를 쫓아나가 등줄기를 우려주고 싶었으
나 대사가 "자네는 고만 들어가게. " 하고 눈짓하는 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
왔다. 상좌가 마루를 쓸고 자리를 떨어 다시 깔아놓은 뒤에 유복이는 마루에서
대사를 뫼시고 낮에 못다 한 소경력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였는데 산속은 들녘과
달라서 서퇴가 일찍 되고 서퇴된 뒤에는 곧 시원하다느니보다 오히려 선선하였
다. 대사가 "방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세. " 하고 말하여 상좌가 먼저 방에 들어
가 등잔불을 켜놓은 뒤에 유복이는 대사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와서 밤이 이
윽토록 이야기하였다. 유복이는 피곤하지도 않고 피곤하여도 상관이 없지만 대
사같은 노인을 늦게까지 자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맘에 미안해서 이야기하는 동안
에 몇 번 "곤하시지 않습니까? “ 하고 물었으나 그렇게 물을 때마다 대사는 "
아직 졸리지 아니하니 어서 이야기하게. " 하고 유복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유복이는 원수 갚으러 갈 일을 대사에게 말하려고 상좌가 자리 비기를 기다리었
으나 젊은 상좌는 표창질 이야기, 차력 이야기에 재미를 붙여서 유복이 옆에
턱살을 치어들고 잠시도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유복이가 지난 일을 대강
다 이야기하고 나서 애기가 대단 똑똑하더란 말, 애기 어머니가 아직도 젊어 보
이더란 말,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상좌가 오줌이라도 누러 나가기
를 바라고 가끔 상좌를 돌아보나 남의 속을 모르는 상좌는 대사를 보고 "주무실
때가 지났습니다. 고만 자리를 펴오리까? “ 하고 취침하기를 청하였다. 다행히
대사가 유복이의 맘을 살펴서 "오래간만에 만나기도 했고 더구나 내일 곧 떠
난다니 이야기나 좀 더 하다 자지. " 하고 상좌의 청을 듣지 아니하여 유복이는
어떤 말을 묻기도 하고 어떤 일을 말하기도 하다가 내일 사람들이 일어나면 더
욱 대사와 조용히 말할 틈이 없을 것을 생각하고 할 수 없이 들떼놓고 "제가 앞
으루 할 일이 한 가지 있는데 저에게는 이 세상에 다시 없는 큰일입니다. " 하고
말하고서 "그 일이 소원대로 잘 될까 점 하나 쳐주십시오. " 하고 청하니 대사는 빙그
레 웃으며 "그 일이 점괘가 시원치 못하면 아니해도 좋을 일인가. " 하고 말한
뒤 "지금 할까말까 하는 일이면 점도 치는 것이 좋지마는 좋든 그르든 해야 할
일이면 점이 소용 있나. 그저 하는 것이지. 하면 또 되느니. " 하고 사리를 타이
르듯 말하였다. 유복이가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가 다시 고개를 치어들면
서 "선생님을 이번 보입구는 다시 보입지 못할까 보오이다. " 하고 대사의 얼굴
을 바라보니 "죽지 않으년 또 만나겠지. " 하고 대사가 대답하는데 그 입가에
는 여전히 빙그레 웃는 빛이 떠돌았다. 그 뒤에도 한동안 앉아들 있다가 밤이
참말 깊은 뒤에 대사가 유복이더러 "인제 고만 자세. " 하고 말한 뒤 상좌 시켜
자리를 보이었다. 이튿날 식전에 유복이가 일어나 보니 대사는 꼭두새벽에 기침
하였는지 벌써 소세하고 마루에 나앉았었다. 소반 뒤에 대사가 상좌를 데리고
양반들을 보러 나오는데 유복이가 뒤따라나오다가 판도방 가까이 와서 대사를
보고 "저는 이 길루 곧 떠나겠습니다. 지체하다가 또 양반들하구 동행이 되면 길
에서 비윗장 사나운 꼴을 보기 쉬우니까 먼저 떠나겠습니다. " 하고 대사에게 하
직하고 상좌까지 작별하고 절문 밖에 나왔을 때 상좌가 뒤에서 쫓아나오며 "스
님께서 부르십니다. " 하고 소리를 쳐서 유복이는 다시 돌쳐서 들어왔다. 유복이
가 들어오며 보니 대사도 역시 이리 향하고 나오는 중이라 빨리 걸어 앞에 가서
서 "무슨 일러주실 말씀이 있습니까? “ 하고 물으니 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
내가 정신이 사나워져서. " 하고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자네를 줄 것이 있
는데 잊었네. 지금 가지러 보냈으니 잠깐만 기다리게. " 하고 말하였다. 얼마 뒤
에 중 하나가 피딱지에 싼 물건을 새끼로 동여 들고 나와서 바로 유복이를 주는
데 부피도 있고 무게도 있었다. 유복이가 물건을 추썩추썩하여 보며 "이것이 무
엇입니까? ”하고 대사에게 물으니 가지고 온 중이 먼저 "무명이오. " 대답하고
대사는 그 뒤에 "면례하는 데 쓰라는 부조 셈일세. " 하고 유복이가 무슨 말 하
기도 전에 다시 "서울이란 데가 시골과 달라서 역군도 사야 할 것이구 괭이 하
나라두 세를 내야 할 것이니 가지고 가서 쓰게. " 하고 말하였다.
유복이가 그 무명을 받아서 피딱지에 싼 채로 보따리와 길양식 자루 위에 얹
어서 걸머지고 다시 떠나나왔다. 칠장사서 서울이 이백십 리란 말을 듣고 유복
이는 생각하기를 하루에는 댈 수 없고 이틀 가야 할 터인데 이틀 길로는 홀가분
하다고 하였더니 그날 점심 전, 점심 뒤 두 차례 소낙비에 길을 많이 빼앗기어
간신히 팔십리 와서 잔 까닭에 나머지 일백삼십 리가 하룻길로 잔뜩 벅차게 되
었다. 이튿날 유복이가 서울을 일찌거니 대어보려고 새벽길 이십 리를 걸어서
창지 와서 아침 먹고 다시 칠십 리 길을 걸어서 너더리 와서 점심 먹고 다르내
재를 넘어을 때 해는 아직 높이 있었다. 유복이가 잿마루에서 새원을 빤히 내려
다보며 굽이굽이 돌아 내려오는 중에 한 굽이를 잡아드니 사람 둘이 앞길에 쑥
나섰다. 그자들은 머리를 수건으로 동이고 손에 긴 몽둥이를 짚은 것 이 사냥질
의 몰이꾼 비슷하였다. 그자들이 사람은 조금 수상해 보이지만 유복이는 그대로
지나 내려가려고 그자들 섰는 곳으로 가까이 나가니 둘 중에 자칫 앞으로 나선
자가 유복이를 향하여 "이놈, 게 섰거라! " 하고 호령하였다. 유복이는 어이가 없
어서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섰다. "너 짊어진 것이 무엇이냐? “ "얼른 대답 못하
느냐? ”"무명하구 양식이다. 그건 물어 무어할라느냐? “ "물어 무어할라느냐,
이놈 봐. " 하고 앞선 자가 게먹으며 앞선 자 뒤선 자가 일시에 몽등이를 둘러메
었다. "그까지 작대기 가지구는 너의 집에 가서 개새끼나 혼돌림시켜라, 이 자식
들아. " 유복이의 씨까스르는 말을 듣더니 앞선 자가 "이놈! " 하고 뛰어들며 유
복이의 머리를 정면으로 내리쳤다. 유복이가 얻어맞았다면 해골이 바숴졌을 것
이지만 유복이는 바른손을 번개같이 쳐들어서 몽등이를 붙잡았다. 붙잡은 몽등
이를 얼른 끄숙여다가 왼손에 옮겨잡고 바른손이 비자마자 뒤선 자의 몽등이가
마치 맞게 들어와서 유복이 바른손에 그 몽등이가 마저 붙잡히었다. 그자들이
몽등이를 잡아채면 유복이는 손아귀에 힘을 들여 누르고 그자들이 몽둥이를 잡
아당기면 유복이는 팔에 힘을 올려 끌어들였다. 그자들이 그제야 자는 범의 코
를 쑤신 줄 깨닫고 눈이 등그래지기 시작하였다. "너희들하구 오래 실랑이하다가
는 내 길이 늦겠으니 우리 얼른 내기를 하나 하자. " 하고 유복이가 그자들의 얼
굴을 보니 둘이 다 핏대를 올리고 하나는 이까지 악물었다. 이를 악물지 아니한
자가 "무슨 내기냐? ” 하고 묻는데 말이 아직도 뻣뻣하였다. “이 몽등이가 무
슨 나무냐? ” "참나무다. " "이 몽둥이를 끝을 쥐고 분지르면 분질러지겠느냐?
“ "생나무라두 굵기가 이만하면 분지르지 못할 텐데 이것은 손때가 먹었어. " "
너희들은 둘이 다 이것을 분지르지 못하지? " 이를 악물었던 자가 저의 동무 대
답하기 전에 "분지르지 못해. 그래 어째! " 하고 짜개발려 말하였다. "그러면 된
수가 있다. 내가 이것을 분질러 보마. 그래 내기는 못 분지르면 내 무명을 너희
들 주구 분지르면 어떻게 할까? ” 하고 유복이가 그자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
다. 유복이가 도적놈들파 내기를 정하는데 그자들이 내기 말낸 사람이 맘대로
정하라고 유복이에게 밀어 맡겨서 유복이는 "너희들은 가진 것이 이 잘난 몽둥
이뿐이지. " 말하고 생각하다가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이 몽둥이를 분지르거
든 너희들이 날 따라서 서울 가서 내일 하루만 내 심부름을 해다우. " 하고 내기
조건을 정하여 말하니 한 자는 "아무리나 그래 보자. " 하고 두말 않고 응낙하고
다른 자는 "글쎄. " 하고 고개를 비틀다가 저의 동무의 눈짓하는 것을 보고 "그
래 볼까. " 하고 두동싸게 말하였다. 내기가 이렬게 작정된 뒤에 유복이는 "몽등
이들을 이리 내라. " 고 말하여 몽등이 두 개를 한데 가로 들고 서서 "너희들이
하나를 골라 다우. " 하고 몽등이 든 손을 앞으로 내미니 그자들이 서로 돌아보
며 "자네 것이 단단하지. " "아니 내 것버덤 자네 것이 더 단단하리. " 하고 두어
마디 수군거리다가 한 자가 "이것을 분질러 보아. " 하고 몽등이 하나를 가리켰
다. 유복이가 짐을 벗어 돌 위에 놓고 몽등이 한 개는 짐 옆에 놓고 그 가리키
던 몽둥이만 두 손에 가로 쥐었다 한번 지끈 눌러보고서 "망신이나 하지 않을까.
" 하고 혼자 말한 뒤에 "자 보아라. " 하고 그 몽등이를 무릎에 대고 전신의 힘
을 두 팔에 모아들이며 응 소리를 질렀다. 응 소리 한번에 우직하고 두 번에 우
지직하고 몽둥이가 분질러졌다. 유복이가 동강난 몽둥이를 그자들 앞에 내던지
며 "인제 어떻게 할 테냐? “ 하고 그자들을 바라보니 선뜻 응낙하던 자는 "이
런 제기, 내기대루 시행하지 어떻게 해. " 하고 머리를 긁적거리고 두동싸게 말
하던 자는 "나는 시행 못하겠어. 내일이 우리 처삼촌 아저씨 소상날인데 내일 내
가 집에 없었다가는 나중 애어머니 잔소리에 머리가 빠지라구. " 하고
딴소리하며 유복이의 눈치를 살폈다. "내기 시행 안 할라거든 저 몽둥이루
앞정갱이나 한번 얻어맞고 가거라. " "정갱이 부러지라구. " "그럼 어떻게
할 테냐? ” "내가 한강 나룻가까지 저 짐을 져다 드리리다. " 하고 그자
가 공대하는 말로 짐꾼 노룻하기를 자청하였다. 유복이가 "아무리나 그래라. "
하고 허락한 뒤 그자는 짐을 지워서 앞세우고 서울까지 간다는 자는 뒤딸리고
유복이 자기는 몽둥이를 들고 중간에 서서 잿길을 내려왔다. 앞에 가는 자가 길
에서 참참이 뒤를 돌아보는데 유복이가 의심이 나서 유심하고 여겨보니 앞에 가
는 자의 눈짓과 입짓이 뒤에 오는 자에게 무슨 군호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자
가 눈짓 입짓 할 때마다 뒤에 오는 자가 머리 흔드는 것을 곁눈질하여 보고 유
복이는 앞에 가는 자의 군호를 뒤에 오는 자가 받지 않는 줄까지 짐작하였다.
재를 거의 다 내려와서 한참 오다가 앞에 가던 자가 발을 멈추고 돌아서서 "발
감개 속에 모래가 들어서 걸음 걷기가 거북하니 신발 좀 고쳐 신구 가십시다. "
하고 말하는데 유복이가 "그러면 우리는 슬슬 갈 게니 신발 고쳐 신구 곧 쫓아
오려나. " 하고 시험조로 말하였더니 그자는 "네, 곧 쫓아가지요. 잠깐 고쳐 신구
쫓아가지요. " 하고 현연히 눈웃음을 치고 뒤에 오던 자는 "같이 가는 것이 좋지
요. " 하고 눈살을 찌푸리었다. "슬슬 뫼시구 가지 왜 이래. " "어서 신발이나
고쳐 신게. " "걱정 말어. 고쳐 신을 테야. 걱정 되우 하네. " "시 사람이 미쳤
나. 물계 모르구 아무데나 덤비게. " 저희들끼리 다투는 말을 듣고 유복이는 웃
으면서 "무얼 그래? 해 지기 전에 한강을 건너야 할 테니까 한 발자국이라두 어
서 가야지. " 하고 뒤에 오던 자를 데리고 슬슬 걸어오며 슬금슬금 뒤를 돌아 보
았다. 그자가 처음에는 주저앉아서 신발을 고치는 체하더니 살금살금 풀섶길로
내려갔다. 유복이가 돌쳐서서 "어디루 가느냐. 어서 이리 오너라. " 하고 소리를
지르니 그제는 그자가 장달음을 놓기 시작하였다. 유복이가 몽둥이를 둘러메고
달아나는 도적놈을 쫓아갔다. 슬슬 걸어갔던 길이 여닐곱 칸 동안밖에 아니 되
는 까닭에 유복이는 불과 얼마 아니 쫓아가서 붙잡으려니 생각하였더니 누가 알
았으리. 그자가 발이 여간 빠르지 아니하여 짐을 지고도 유복이보다 더 빨리 달
아났다. 쫓는 사람과 쫓기는 사람의 사이가 일곱 칸이 여덟 칸 되고 여덟 칸이
아홉 칸 되어 차차로 멀어졌다. 유복이가 분이 나서 둘러메었던 몽등이를 풀섶
에 내던지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음질쳤다. 늘어가던 칸수가 뒤쪽으로 줄어
들기 시작하여 댓 간쯤 되게 줄었을 때, 그자가 등에 졌던 짐을 벗어버리고 내
뺐다. 유복이는 분김에 짐도 돌보지 않고 그대로 그자를 뒤쫓았다. 칸 수가 한참
동안 늘도 줄도 못하고 핑핑하게 나가다가 그자가 무슨 풀덩굴에 발이 걸려서
발 빼느라고 지체하여 그 동안에 칸수가 바싹 줄었다. "이놈아 인제두, 이놈아! "
유복이가 소리 지를 때 그자는 별안간 몸을 돌며 꿇어앉아서 숨이 가빠 말은 못
하고 두 손을 내밀어 싹싹 빌었다. 유복이가 "이놈! " 하고 뛰어들어와서 상투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유복이는 분한 품이 곧 그자를 한주먹에 박살을 내고 싶었
으나 참고 참은 끝에 그 자의 얼굴을 뒤로 젖히고 뺨을 한번 내갈기었다. 아이
쿠 소리하는 그자의 입귀에서 피가 흐르더니 칵 하고 피를 배앝는데 붉은 핏덩
이 속에 누런 이빨들이 섞여 나왔다. 유복이가 이것을 보고 분이 조금 풀려서 "
너 같은 놈은 죽여두 싸지만 인생이 불쌍해서 목숨을 붙여준 다. “ 말하고
곧 그자를 잡아 돌려앉히고 "인제는 네 기집 잔소리나 들으러 가거라. "
말하면서 발길로 엉덩이를 차 내던졌다. 유복이는 앞으로 고꾸라진 그자
를 내버리고 짐이 떨어셔 있는 데 와서 짐을 찾아 걸머지고 전의 길에 나와 보
니 서울까지 따라간다는 자는 길가에 퍼져버리고 앉아 있었다. "죽이지나 않으셨
소? ” "뺨 한 번밖에 안 때렸다. " "그 자식 죽는 줄 알았더니 수 좋았네. 아까
재에서 내려올 때 그 자식이 나더러 당신을 해내라구 몇번 눈짓하는 것을 내가
모른 체했소. " "해내보지 왜 고만두었어? “ "당신 같은 낭사를 섣불리 해내려
다가 나는 죽구요. 나는 죽거나말거나 그 틈에 무명 가지구 도망질할라구 맘먹
는 것을 아는데 내가 왜 그 자식에게 속을 까닭이 있소. 그 자식이 몸이 날쌔구
걸음이 재기루 유명한데 장사 앞에는 하는 수 없던 게요. 도망질을 못 치구 붙
잡혔으니. " "그러나저러나 너는 왜 어디루 가지 않구 여기 있느냐? ” "내기 시
행 아니할라구 못생기게 도망한단 말이오? 나두 사내 자식인데 일구이언하겠소.
" "아따, 그러면 같이 가자. 어둡기 전에 서울을 갈 수 있을까. " 하고 유복이가
서편 하늘을 바라보니 붉은 불덩이 같은 해가 너울 너울 산 너머로 넘어가는 중
이었다. 그자도 유복이와 같이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나서 "지금 서울 가기 틀
렸소. 나룻배 끊어지지 전에 강가에두 못 대 가겠소. 또 강을 건너면 무어하오?
인경을 쳐서 사대문이 꽝꽝 닫힌 뒤에 문안에를 들어가는 장사가 있소. 내일 일
찍 서울 갈 작정하구 오늘 밤은 새원 가서 잡시다. " 하고 말하는 것을 유복이는
길 늦은 데 찜부럭이 나서 "너희놈들 때문에 길이 늦었다. 잡말 말구 어서 가자.
" 하고 길을 재촉하여 새원까지 와서 보니 퍼의 땅거미가 다 되었다. 그자의 말
이 옳은 것을 생각하고 유복이는 그날 밤 새원서 묵기로 작정하고 원집을 찾아
가려고 하니 그자가 "우리 집이 여기서 가까우니 우리 집으루 가십시다. 집꼴은
망칙하지마는 밥 지어 먹는 수고는 없을 게니 우리 집으루 가십시다. “하고 권
하는데 유복이는 그자의 속도 알 수가 없고 또 도적놈의 집에 가 자기가 싫어서
"폐 끼칠 것 없어. " 하고 좋은 낯으로 거절하였다. 그자가 유복이 속을 짐작하
고 "나를 의심하셔서 그리하시우? 내가 조금이라두 딴생각을 두면 지금 이 자리
에서 급살을 맞겠소. " 하고 말하는 것이 진심인 것을 안 뒤에 유복이는 그자의
집으로 가기를 허락하고 그자를 따라갔다.
새원서 멀지 아니한 곳에 두서너 집치 뜸뜸이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그자가 마을에 들어서며 뒤에 오는 유복이를 돌아보고 "저것이 우리 집이오. “
하고 길목에 있는 첫집을 가리키는데 울타리가 여기저기 쓰러지고 삽작문조차
없는 허술한 집이었다. 그자가 집으로 가까이 오며 집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
고 먼저 "어머니. " 하고 부르니 저편에서 "인제 오니? ” 하고 꼬부랑거리며 마
주 나온 것이 파파 늙은 할멈이었다. "손님 한 분 뫼시구 왔소. " "어떤 손님이
야? “ "차차 이 야기하지요. " "배고팠지? ” "아니오. " 그자는 돌아서서 유복
이를 보고 "주무실 데두 변변치 못하우. 하룻밤 드새어 가실 작정 하시우. 자, 들
어가십시다. " 하고 인사 차려 말한 뒤 늙은 어머니를 붙들고 앞을 서고 유복이
는 뒤따라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한편에 단간방이 있고 중간에 토마루 한 간이
끼여 있고 한편 머리에 부엌이 붙어 있는 네 간 집인데 부엌 붙은 안방에만 등
잔불이 켜 있었다. 불 없는 건넌방 앞에 와 서서 아들이 "광솔이 어데 있소? “
하고 그 어머니에게 물었다. "불 켤라고 그러지? 내가 켜놓으마. " "광솔 있는
데만 가르쳐 주시우, 내가 켜놓을 테니. " "광솔은 여기도 있지. " 하고 그 어머
니가 토마루 앞구석에 있는 광솔을 집어다가 아들을 주니 그 아들은 안방에 들
어가서 광솔에 불을 달려다가 건넌방에 등잔불을 켜놓고 방문 앞에 섰는 유복이
를 내다보며 "이것이 내 방이오. 이리 들어오시우. " 하고 말하였다. 유복이는 주
인이 지도하는 대로 짐을 주인 주어 방구석에 놓게 하고 방에 들어와서 앞문을
등지고 앉아서 열어놓은 옆문으로 건너편 안방을 바라보니 그 방에 사내아이 하
나가 누워 있었다. "저기 누워 있는 것이 아들인가? ” "그것 때문에 우리 어머
니가 더 고생이오. " "그 애 어머니는? “ "죽었소. " "아들이 지금 몇 살인가?
” “아홉 살이오. 어미 없는 자식을 세 살부터 저만큼 키우시자니 우리 어머니
고생이 어떠했겠소. 게다가 그 자식이 잔병치레하느라구 일년 삼백육십일에 성
한 날이 별루 없소. 지금두 아프다구 누운 지가 벌써 사흘째요. " "왜 앉지 않구
서서 이야기야. " "미안하지만 혼자 앉아 기시오. 늙은 어머니가 저녁 차리는 것
을 좀 가서 거들어야겠소. " 주인이 어머니 위하는 것을 보고 유복이는 주인의
늙은 어머니 있는 것이 속으로 부러웠다. 한동안 뒤에 주인이 저녁상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키 얕은 솔소반에 놓인 것이 밥 한 사발, 장찌개 한 그릇뿐이었다. "
주인은 아니 먹나? ” "나는 먼저 먹었소. " "이것이 주인 먹을 밥이나 아닌가.
" 옆문에 와서 들여다보던 주인의 어머니가 "그것은 지금 새로 지은 밥이오. 저
애는 저녁에 쑨 죽을 먹었소. “ 말하는 것을 듣고 유복이가 "이 밥 좀 같이 먹
세. " 하고 주인보고 말하니 주인이 그게 다 무슨 말이냐고 펄쩍 뛰었다. 주인의
어머니가 "그거 보아라. 손님하고 겸상해 먹으라니까. " 하고 아들보고 말하고 "
밥이 또 한 그룻이 있소. 그런데 저애가 나더러 떠먹으라고 안 먹는다오. " 하고
유복이보고 말하였다. "그것은 노인 잡숫게 두구 이 밥을 같이 먹세. " "참말 배
가 불러 못 먹겠소. " "이애 그러다가는 손님 밥 못 자시겠다. 저 밥 갖다주랴?
” "그 밥은 어머니 잡수시우. " "내가 다 먹느냐. 먹다가 남겨라. " "그러면 반
만 덜어다 주시우. " 손님이 주인과 한 사발 밥을 같이 먹자고 하다가 주인의 어
머니가 그 아들과 한 그룻 밥을 반씩 나눠 먹게 되어서 밥 가지고 실랑이하던
것이 끝이 났다. 유복이가 주인의 모자간 사랑을 진수성찬보다 더 맘에 좋게
여기어 밥 한 사발을 달게 먹었다. 그날 밤 유복이가 신불출이와 한방에서 같이
잤다. 신불출이는 그 집 주인의 성명이다. 유복이와 불출이가 하룻밤 동안에 십
년 사귄 이나 다름이 없이 정숙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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