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데리고 가서 치죄를 할 터이니까 하인들 일어나기까지 대사가 잘 맡아
두게. " "녜, 잘 알았습니다. " 안진사와 대사의 문답이 끝난 뒤에는 양반들끼리
도 별로 말이 없어서 자리가 버성길 때에 대사가 입을 열어 "이 늙은 것의 소경
력이나 한번 이야기하오리까. " 하고 말하니 여러 양반의 눈이 대사의 얼굴로 모
여들었다. "저는 근본이 함흥 백정이올시다. 이 장자 곤자 이찬성이 함흥으로 망
명하였을 때 저의 형의 집에 와서 계셨습니다. '백정의 딸 봉단이 정경부인 바쳤
다'고 아이들 노랫가락에까지 이름이 오른 이찬성 부인이 저의 질녀올시다. 제가
이찬성의 연줄로 서울 와서 동소문 안에서 갖바치 노릇을 할 때 조정암께서 어
떻게 아시고 저를 찾아다니셨습니다. 당시 정암으로 말씀하면 여러분이 다 잘 아시다
시피 조정에 들어서시면 명망이 높은 재상이요, 선비에게 오시면 학문이 깊은
선생이요, 거리에 나서시면 시정바치들이 우리 상전이라고 떠받들던 양반이을시
다. 이런 양반이 천한 갖바치를 친히 찾으셔서 교분이 생긴 뒤로 정의가 점점
두터워져서 나중에는 귀천의 형적을 잊을 만큼 자별하게 지냈습니다. 정암의 천
분과 학문이 저의 미칠 바가 아니건만 정암은 불치하문하시는 보량으로 저에게
문의하시는 일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때 사세가 정암의 신상에 화가 미치기 쉬
운 것은 저의 말씀이 아니라도 정암이 미리 짐작하셨지만, 임금 사랑하시는 맘
이 너무 과하셔서 미치미치하시다가 구경 기묘년에 일을 당하게 되셨습니다. 기
묘년에 정암은 귀양을 가서 후명까지 받으시고 이찬성은 파직을 장하고 솔가하여
낙향하고 저도 서울 있을 맘이 적어서 팔도로 강산 구경을 다니다가 묘향산에 가서
삭발하였습니다. " 대사의 이야기가 끝이 나갈 때에 대사의 상좌와 다른 중 하나
가 큰 다담상을 마주 들고 들어왔다. 다담상이 상은 크나 음식 가짓수는 많지
못하고 음식이 정결은 하나 풍성치는 못하였다. 대사가 손님들을 오고 "절이 빈
한한 까닭에 잡술 것이 변변치 못합니다. " 하고 말하니 우선 서울 손님이 "천만
에. " "다담보다도 대사의 이야기나 더 들읍시다. " 말하고 안진사도 말을 고치
어서 "대사가 범상한 인물이 아닌 줄은 증왕 짐작하였지만 정암 선생과 교분이
두터운 인 줄은 몰랐소그려. " 하고 하오로 말하였다. 대사가 여러 손님에게 다
담을 권하여 음식들을 자시는 중에 먼저 읍내 앙반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대사
에게 말을 물었다. "이찬성이 망명하셨을 때 연세가 얼마시든가요? “ "이찬성이
갑오생 저와 동갑인데 망명한 것이 갑자년이니까 그 때 서른하나든가 보오이다.
" "이찬성 부인은 그때 몇이든가요? ” "열여덟이었지요. 그때 형 내외는 나이
너무 틀린다고 혼인 안하려는 것을 제가 우기다시피 했소이다. " "지금 그 집이
어디서 사우? “ "처음 낙향할 때 여주로 갔었는데 나중에 경상도 창녕으로 갔
습니다. 그 동안 내외 구몰하고 자제들이 거기서 사는갑디다. " "연신이 없소?
” "없습니다. " 안진사가 그 친구들의 뒤를 이어 말을 물었다. "정암 자제와 상
종하시우? " "상종 없습니다. " "만나보신 일도 없소? " "신착립 적데 한번 본
일이 있습니다. " "그후에는 못 만나셨소? “ "용인이 멀지 않건만 한번 찾지 못
했습니다. " "그 사람이 찾아와 보여야 할 일이지. " "소승이 이 절에 있는 줄도
아시지 못할 것입니다. " "그 사람이 우리 친구요. 선친이 정암 문하에 다니신
까닭으로 세의가 있소. " 안진사의 말이 끝이 나자, 서을 손님이 말 물을 차례를
기다리었던 것같이 곧 수저를 놓고 나앉으며 "김사성장과는 친분이 없으셨소?
” 하고 물으니 대사가 "별호로 사서 말씀이지요? “ 하고 돌이켜 묻고 나서 "
정암의 반연으로 사서 영감과도 상종이 있었습니다. 정암과 사서 두 분이 양근
미원으로 낙향할 경영하실 때도 제가 옆에서 듣고 두 분의 경영이 경영대로만
되면 작히 좋겠느냐고 말씀하니까 사서 영감께서 우리가 미원 가서 살거든 놀러
나 오지 하고 웃으시던 것이 생각하면 어제 일 같소이다. " "김사성장이 이찬성
장의 본을 떠서 망명을 하시려다가 공연히 낙명만 하셨소. " "일이 조금 떳떳치
못하게 되었을 뿐이지요. " "그 자제들이 지금 미원 가서 사는데 더러 상종이 있
소? ” "둘째 자제가 올에 여기를 왔다가셨습니다. " "중일이가 여기를 왔었소?
올봄에 오래간만에 서울 와서 만났는데 그때 양주 누구를 찾아간다고 했었는데.
" "백정의 아들 임꺽정이를 찾아서 양주 왔다가 거기서 소승을 만나 가지고 여
기까지 같이 와서 달포 묵어가셨습니다. " "백정의 아들을 찾아갔세요? 나더러는
양주에 친한 사람이 있어 찾아간다고 말합디다. " "그 양반이 임꺽정이더러 조카
라고 합니다. " "어찌해서? “ ”임꺽정이는 이찬성 부인의 외사촌의 아들인데
그 양반이 이찬성 부인과 남매의를 맺은 까닭에 항렬을 따져서 조카라고 하는
모양입디다. " "그러면 대사더러는 삼촌이라고 하겠소그려. " "먼 조카는 따져도
가까운 삼촌은 따지지 않습디다. " 하고 대사가 웃으니 여러 사람도 다 함께 웃
었다. 다담상이 끝이 나서 기다리고 섰던 나이 지긋한 중과 젊은 상좌가 상을
치우는데 대사가 "얼마 잡숫지들 아니하셨으니 점심 진지를 속히 차려서 이리
들여오게 해라. " 하고 이르니 둘이 일시에 “녜. ”하고 대답하였다, 그 중과 그
상좌가 상을 맞들고 옆걸음을 쳐서 향적전으로 내려가는 길에 "나는 절에 큰 탈
이 날 줄 알구 속으로 겁이 났었소. " “나는 염려도 아니했다. 스님이 기신데
무슨 걱정이 있니? ” "양반들 말공대하는 것 보니까 맘이 놓입디다. " "대체 야
단을 일으킨 사람이 누구라디? “ "스님의 그전 제자랍디다. ” “전에 왔던 양
주 꺽정이의 동무로구나. 내괴, 행내기가 아니더라. " 하고 서로 지껄이었다.
안진사가 서울 손님을 보고 "김사서장 댁하구 자네 집하구 어떻게 과갈간이
지?“ 하고 물으니 ”사서장 자제 중일이가 내 사촌매부일세. " 하고 서을 손님
이 대답하였다. "중일이가 김덕수의 자인가, 김덕순의 자인가? “ "김덕순의 자
야. 김덕수의 자는 경직이지. " 서울 손님의 말을 대사가 옆에서 듣다가 "그러면
성씨가 이씨올시다그려. " 하고 말하니 서을 손님이 "용하게 아시는구려. 내차
이참봉이오. " 하고 대답하고 곧 뒤를 이어 "기묘년 풍파 중에 청춘에 돌아간 우
리 누님의 팔자도 기박하지만 의초 좋던 내외간에 생리사별한 것이 포원이 되어
서 속현 아니하고 일생을 홀애비로 지내는 중일이의 일도 가엾지요. 우리 여러
종형제는 누님이 없는 까닭으로 그 매부를 더욱 소중하게들 여기오. ” 하고 말
한 끝에 한동안 대사와 이참봉이 김덕순의 내외 일을 이야기하다가 나중에 김덕
순의 처 유모의 아들 박연중이게로 이야기가 번져나갔다. "그자가 본래 중일이
따라서 도망했었는데 중일이와 함께 사를 받았건만 지금까지 세상에 나서지 않
는다오. " "평산 운달산에서 행호시령을 하고 지냅니다. " "명화적 노릇을 한답디
다. 화적 괴수를 영의정 부럽지 않게 생각하는지 모르지. " 이때 안진사가 갑자
기 무슨 일이 생각나는 듯이 대사를 보고 새삼스럽게 "갖바치 노릇을 하셨다지?
“ 하고 물어서 대사가 ”녜. “ 하고 고개를 끄덕이니 안진사가 "내가 전에 들
은 말이 있소. " 하고 허두를 놓고 "인종대왕께서 동궁에 기실 때 당대 인물로
도목을 꾸미어서 병풍 뒤에 붙이신 것이 있었는데 그 도목에 좌의정은 정북창,
우의정은 김하서, 육조판서는 누구누구 당대 인물들의 이름을 죽 쓰시고 영의정
만은 이름이 없이 혜장이라고 쓰셨더란 말이 있더니 지금 알고 보니 그 혜장이
곧 대사시구려. ” 하고 말하니 "나도 그런 이야기 들은 법하군. " 하고 이참봉
이 말하고 "정암 선생이 복시 서연에서 말씀을 여쭈었던 게지. " 하고 읍내 양반
하나가 말하는데 대사는 웃으면서 "정암이 나더러 환로에 나서 보라고 권하신
일은 있지만 내 말씀을 동궁에 여쭈셨을 리도 없고 인종대왕께서 동궁으로 그런
실없은 도목을 꾸미셨을 리도 없습니다. 대중없는 여항간 풍설이겠지요. " 하고
말하였다. 여러 양안들이 갸륵하다고 칭찬을 하는 것을 대사
는 손사로 대답하고 나서 "여러분께 말씀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 하고 운을
떼니 안진사가 얼른 미리 알아채고 "행패한 손 용서하란 말이오? “ 하고 물었
다. "용서하시고 안 하시는 것은 처분을 기다릴 뿐이고 우선 이야기 하나를 들어
보십시오. " 하고 대사가 웃으며 말한 뒤에 유복이 아버지가 나라에서 조재상 같
은 이를 죽인 까닭에 연사까지 흉년이라고 말 한 마디 한 탓으로 무고를 당하여
서울 잡혀와서 죽은 일과, 유복이 어머니가 일정 혈육인 유복자를 기르느라고
서울서 행랑살이로 고생한 일과 또 자기가 그 유복자를 한동안 맡아 가르친
일을 대강대강 이야기하고 나중에 "하인들에게 손찌검한 사람이 곧 그
유복자올시다. 동소문 안에 있을 때 상종하던 양반들이 대접해 주시는 것만
본 까닭에 아까 하인이 이 늙은 것을 흘대한다고 그렇게 야료한 것입니다.
실상 죄는 소승에게 있습니다. " 하는 말로 그 이야기를 끝막았다.
이참봉이 먼저 말을 내어 "하인은 고사하고 우리라도 대사 같은 이를 홀대
했으면 봉변해 싸지 않은가. " 하고 안진사를 돌아보니 안진사가 대사를 보고
자기 하인이 대사를 흘대한 것은 모르고 한 일이나 평일의 자기 단속이
부족한 탓이라고 사과하는 뜻을 말하고, 또 여러 하인들에게 행패까지 한 것
은 그 사람의 잘못이나 대사의 안면을 보아 용서하겠다는 뜻을 말하였다. 대사
가 옆 방에 있는 유복이를 마루로 불러내서 여러 양반들에게 사과를 시킨 뒤
에 한구석에 자리를 주어 앉히면서 "소승이 백정으로 갖바치로 중으로 이 나이
가 되기까지 양반님네와 대좌하는 것이 버릇이 된 까닭으로 소승에게서는 반상
과 노소를 물론하고 다같이 앉습니다. " 말하고 여러 양반들을 돌아보니 이참봉
은 싹싹하게 "절에 와서는 중 하라는 대로 한다먼요. " 하고 실없은 말하며 웃
고 읍내 양반들은 "암, 입향순속이 제일이지. " "워낙 같이 앉는 것이 좋지. " 하
고 다 각각 석연들 하게 말하는데 안진사만은 종시 오기가 있어서 유복이를 괘
씸히 여기는 맘이 다 풀리지 않은데다가 상사람과 한 마루에 앉는 것을 불쾌히
생각하여 입을 봉하고 앉았었다. 얼마 동안 뒤에 점심상이 들어왔다. 겸상 출은
양반들의 상이고 외상 하나는 유복이의 상이고 대사는 점심을 먹지 아니하였다.
안진사가 상 나르는 중을 "나 좀 보자. " 하고 불러가지고 "하인들이 점심이나
먹겠다더냐? “ 하고 물으니 그 중이 두 손을 맞잡고 서서 "배가 고프다고 점심
재촉이 야단입니다. " 하고 대답하였다. 점심이 끝난 뒤에 읍내 양반 한 사람이
안진사를 돌아보며 "인제 운자나 하나 내보지. " 하고 풍윌 지을 의논을 꺼내었
다가 그날 모임의 주인 안진사가 "일장 풍파에 글 지을 흥치가 없어졌네. " 하고
왼고개를 치는 바람에 그 의논이 그만 들어가고 또 안진사가 이참봉을 보고 "명
적암 경치나 한번 가보려나. " 하고 구경 나서자고 이끌다가 정작 구경할 손님
이참봉이 "폭양에 나서 다니느니 여기서 대사의 좋은 말씀이나 듣세. " 하고 자
리를 뜨지 않는 까닭에 암자 구경도 자연 파의되었다. 여러 양반들이 대사와 같
이 담화하는 중에 산리 말이 나서 이 양반은 선산이 대지인 것을 자랑하고 저
양반은 친산면례할 것을 걱정하는데 대사는 덤덤히 앉아 있는 유복이를 돌아보
며 "자네 아버니 산소 자리가 좋으니 옮기지 말고 쓰대로 두는 것이 좋지 않을
까. " 하고 유복이의 말을 자아내었다. "아무리 산소라두 아버지에게는 어머니
옆버덤 더 좋은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 하고 유복이의 대답하는 말이 양반들
귀에 우습게 들리어서 이참봉이 한동안 웃음을 머금고 앉았다가 나중에 유복이
의 말본을 떠서 ”어머니에게두 아버지 옆버덤 더 좋은 자리가 없을 게니 어머
니를 갖다가 아버지와 같이 좋은 자리에 묻으면 더 좋을 것이 아닌가. " 하고 조
롱으로 말하였다. "어머니 산소 근처에는 아는 사람이 있어서 풀이라두 깎아달라
구 할 수 있지만 아버지 산소에는 그런 부탁할 데가 없습니다. " "산소 밑에 가
서 살면 되지. " "그렇게 살 수가 있으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 "그러면 할
수 없겠군. " 하고 이참봉은 가볍게 수작을 끝마치고 대사가 그 뒤를 받아서 "이
번에 자네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겠지, 봉분이나 있든가? “ 하고 유복이더러 물
었다. "다녀는 왔는데 다른 사람 산소에를 다녀왔는지두 모르겠습니다. " "산소
형지를 모르겠더란 말인가? " "여남은 살까지 다니던 데니까 잘 알려니 했더니
첫째 전에 없던 무덤이 총총 들어백여서 이 자린지 저 자린지 잘 모르겠습디다.
" "산소도 모르면 면례를 어떻게 하려나? ” "선생님은 아시겠지요. " "내가 그
동안 죽었던들 자네는 낭패를 볼 뻔했네그려, 자네 아버지 산소를 쓸 때 뒷날
염려로 내가 자네 어머니와 의논하고 산소 전후좌우에 사기 사발을 하나씩 묻어
두었으니 가서 파보면 알 것일세. " 하고 대사가 말하는데 유복이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하였다. 대사는 말을 그치고 여러 양반들을 향하여 앉고 유복이는 여러
양반들이 다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고개를 돌이키고 주먹 쥔 손으로
눈물을 눌러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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