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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4권 (11)

카지모도 2022. 12. 18.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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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거리는 제석풀이다. 무당이 머리에 고깔을 쓰고 몸에 백포 장삼을 입고

목에 염주를 걸고 흰 부채를 손에 쥐고 나서서 삼불 제석을 청배하여 단바탕 춤

도 추고 공수도 주고 그 다음에 잠깐 쉬었다가 곧 여섯째거리 전왕놀이로 뒤를

대었다. 무당이 제석풀이 때와 같은 복색으로 춤추고 공수 준 뒤에 바라타령을

시작하여 "바라를 사오. 바라를 사오. 이 바라를 사옵시면 없는 애기 점지하고

있는 애기 수명 장수" 이와 같은 덕담 노래를 장단 맞추어 노래하면서 바라 시

주를 거두러 다니고 굿자리에 돌아와서 바라를 치며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찾

아 염불하고 나서 곧 삼불 제석 송덕하는 제석 노랫가락을 가지고 선 무당과 앉

은 기대가 서로 "얼씨구 좋다, 절씨구 좋다" 하며 하나는 먹이고 하나는 받았다.

전왕놀이는 이로써 끝이 났다. 일곱째는 군웅놀이니 군웅은 조상대감이란다. 무

당이 빗갓 쓰고 철릭 입고 놀고 여덟째는 별상놀이니 별상은 마마란다. 무당이

전립 쓰고 군복 입고 놀고 아흉째는 호구놀이니 호구는 아기씨란다. 무당이 다

홍치마 입고 면사포 들고 놀았다. 무당이 복색을 연해 변하는 중에 열째 창부놀

이에는 초립을 쓰고 색동옷을 입었다. 창부놀이는 말인즉 무당들의 선생 귀신을

청배하는 것이라 대감놀이와 같이 사망도 주거니와 나중에 단골이라고 갖은 덕

담이 다 있었다. 열한째 말명놀이할 때 최장군 이하 여러 신과 최서방의 조상들

이 차례로 돌아간다고 무당이 주워섬기니 굿 끝이 가까워온 것이다. 구경꾼이

풀리기 시작하여 사람이 많이 갔을 때 마지막 거리 열두째 뒷전놀이가 시작되었

다. 뒷전에는 원무당이 나오지 않고 다른 무당이 나와 노는데 서울 혼인에 깍정

이 오듯이 갖은 귀신이 다 걸립을 들어왔고 지신청배, 선왕청배, 영산청배 잠깐

잠깐 지나가고 풍류 없이 춤추고 나서 귀신들이 치사하고 하직하는 말이라고 무

당은 한동안 주워 지껄였다. 큰굿 열두거리가 인제 끝이 났다.

무당들이 전물을 내다가 세 번 고수레한 뒤에 저희의 차지를 제사하여 놓고

구경꾼에게 계면떡을 나눠주었다. 이때 벌써 땅거미가 지났었다.

구경꾼들은 다 돌아가고 각동 동임들은 당집 안을 치우고 무당들은 최서방 내

외와 같이 새 마누라를 침실로 인도하였다. 사내는 침실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법이라 최서방의 안해만 무당의 뒤를 따라서 들어왔다가 솟아나오는 눈물을 억

제하느라고 총총히 돌아서 나가고 원무당은 전물을 나눌 때 유렴하였던 실과와

떡과 다른 음식을 상에 차려서 방구석에 놓으며 새 마누라보고 "밤에 장군님과

같이 자시오. " 하고 옛 격식대로 인사하고 같이 왔던 무당을 다 데리고 나갔다.

장군당은 워낙 인가와 동떨어진 곳이라 인가라고 가장 가까운 것이 산 밑에

있는 무당의 집이고 그 집에 있는 무당은 장군 마누라에게 시중드는 소임이 있

지마는, 그 무당도 해가 뜨면 올라오고 해가 지면 내려가는 법이었다. 밤에는 신

도가 타인을 기한다고 무당까지도 맘대로 침실에서 자지 못하였다. 장군 마누라

가 병이 나든지 혹 특별한 일이 있든지 하여 밤에 자는 것이 좋을 때는 그 무당

이 미리 장군신상 앞에 나가서 분향하고 점을 쳤다. 그 점은 식기 안에 대추나

잣을 넣고 뚜에를 다 덮지 않고 흔들어서 튀어 나온 수가 짝이 맞고 안 맞는 것

을 보는 법이니, 짝이 맞으면 장군의 허락이 내린 것이라 밤에 자게 되지마는

만일 짝이 틀리면 아무리 잘 일이 있더라도 그대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사

내는 밤에 당 근처에만 올라와도 장군의 벌역이 내려서 당장 급살을 맞는다고

당초에 올라오지 못하고, 여편네는 밤에라도 침실 밖에까지 왔다 갈 수가 있지

마는 무슨 연고 없으면 올라오지 아니하고, 장군 마누라는 밤이고 낮이고 장군

당 테 밖을 나가지 못하는 까닭에 장군 마누라가 밤에는 으레 흔자 있었다. 인

가가 초원한 산속에 여편네 흔자 있건만 호환도 당한 일이 없고 적변도 당한 일

이 없는 것은 장군의 귀신이 영검한 까닭이라고 하였다. 장군의 마누라가 새로

들어을 때는 무엇이 다르냐 하면 사흘 동안 음식이 특별히 좋을 뿐이지 밤에 혼

자 있는 것은 다름이 없었다. 이 까닭에 어느 장군 마누라가 죽을 때 처음 사흘

밤만 같이 잘 사람이 있었다면 자기가 더 살았을는지 모른다고 말한 일까지 있

었다. 큰굿이 끝나면 무당들이 벌써 "신방이 너무 늦어서 장군님 노염 나시겠다.

어서들 내려가야지. " 하고 재촉하는 것도 한 전례라, 이날 무당들이 전례 좇아

서 내려 가기를 재촉하여 각동 동임들이 앞서 내려가고 뒤에 무당들이 내려가는

데 최서방의 안해는 딸을 산속에 두고 차마 발길이 돌아서지 아니하여 뒤에 처

져서 머뭇거리다가 원무당에게 책망을 듣고 무당들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종일

시끄럽던 끝에 갑자기 조용하여지니 장군당 당집까지 어디로 떠나고 빈 터만 남

은 것 같았다. 새마누라인 처녀가 사람의 말소리가 들릴 때까지는 오히려 사람

의 얼굴빛이 남아 있더니 인제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고 옹송그리고 앉아서 발

발 떨었다. 나이 열여덟에 거구나 숙성하여 다 큰 처녀지마는 처녀야 어디 가랴.

낯선 사내와 같이 자게 되더라도 송구한 마음이 없지 못하려든 말만 들어도 섬

뜩한 귀신과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된다 하니 겁이라도 여간 겁이 날 것이랴. 울

지 않는 것만도 오히려 나이값으로 볼 것이다. 얼마 뒤에 처녀가 간신히 떠는

것을 진정하고 몸을 도사리고 앉았는데 작은 바람소리만 나도 몸을 오므라뜨리

고 괴상한 새소리만 들려도 몸을 소슬뜨리었다. 방안에 바람이 돌면서 촛불이

흔들리어서 처녀는 일어나서 촛대를 집어다가 옆에 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밤은 지리하고 초는 속히 달아서 초 심지가 쓰러졌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대

신 부칠 초도 없고 등잔거리는 있지마는 기름접시도 없어서 처녀는 흘러내린 촛

농을 모아서 심지 위에 얹어가며 꺼져 가는 불을 애를 써서 살리었다. 처녀가

불을 살리기에 골독하여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던 끝에 방문이 부스스

열리니 처녀는 겁결에 촛농을 내던지고 벽에 와 붙어섰다. 불이 꺼지며 갑자기

캄캄하던 방이 다행히 남창에 비치는 달빛이 있어서 차차로 희미하게 밝아졌다.

처녀가 장신을 가다듬고 앞을 바라보니 장군이 방문 안에 들어섰는데 모양이 만

들어 앉힌 신상과는 딴판 달랐다. 장군이 방안을 둘러보는 모양이더니 방구석에

놓인 상 앞으로 걸어가서 무당이 처녀더러 같이 먹으라던 떡이며 실과며 다른

음식을 혼자서 다 먹어버리는 모양이었다. 처녀가 정신은 말짱하나 오금이 붙어

서 앉지도 못하고 선 채로 서 있는데, 장군이 상 앞을 떠나서 바짝 가까이 와서

얼굴을 들여다보니 처녀는 눈을 감고 뜨지 못하였다. 처음에 "네가 귀신이냐 사

람이냐? “ 하고 당치 않은 말을 묻더니 손목을 쥐었다. 다음에 "허허 허허. "

하고 너털웃음을 웃더니 몸을 끌어안았다. 처녀는 죽이거나 살리거나 마음대로

하라고 눈을 판뜩 감고 가만히 있었다. 펴놓은 이부자리 위에 안아다가 뉘어 주

고 옷까지 차례로 벗기어 주었다. 처녀는 장군 품안에 누워서 장군이 산 사람과

다름이 없는 귀신이라고 생각하였다.

여자가 눈을 감은 채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중에 잠이 소르르 들었다. 꿈에 눈

을 뜨고 살펴보니 자기 옆에 누워 있는 것이 귀신도 아니요, 사람도 아니요, 산

더미 같은 큰 호랑이였다. 맘에 놀라우나 그래도 피할 생각은 나지 않아서 같이

누워 있는데, 호랑이가 앞다리로 목을 끼어안아서 숨이 막힐 것같이 갑갑하였다,

잠이 깨서 보니 무거운 팔 하나가 자기 목에 얹히어 있어서 그 팔을 고이 들어

내려놓았다. 팔 임자는 잠이 든 모양이라 여자가 마음을 놓고 참말 눈을 뜨고

살펴보니 상투 있는 사내가 옆에서 누워 자는데 수염난 것만 보더라도 나이는

들어 보이나 얼굴은 밉지 않은 것 같았다. 이것이 장군의 귀신인가, 귀신이 숨이

덥고 살이 덥단 말을 듣지 못하였고 꿈에 호랑이로 보이었으니 산신령인가. 덕

적산 산신령은 장군의 하인이라는데 하인이 상전의 신방을 가로챌 것 같지 않고

그러하니 예사 사람인가 하면 예사 사람, 게다가 사내가 장군당 침실에 들어올

리 만무한 일이라 여자는 생각을 질정하지 못하였다. 여자가 살그머니 일어나는

데 자연 그 몸을 건드리게 되어서 사내가 잠이 깬 모양이었다. 한번 기지개를

켜고 "한숨 잘 잤다. " 하고 혼자 말하더니 "어째 일어나 앉았나? 이리 와 누워

서 이야기나 좀 하세. " 하고 손을 잡아당기어서 여자는 다시 그 옆에 누웠다. "

대체 이 산중에 혼자 와 있는 것이 무슨 까닭인가? “ 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이 한동안 있다가 "이 옆에 있는 것이 당집 같으니 당집 지키는 무당인가? ”

하고 또다시 한동안 잠자코 얼굴만 들여다보더니 "왜 대답이 없어, 벙어린가? “

하고 손가락으로 턱을 걷었다. 모든 것이 점점 예사 사람 같아서 여자는 대담스

럽게 마음을 먹고 말문을 열어서 "장군님 아니신... " 하고 말끝이 모호하게 말을

물으니 "무어 장군님? 내가 장군이냐 말이야? 이 다음에는 장군이 될는지 모르

나 아직은 장군이 아닌걸. " 하고 웃고 "그래 귀신이 아니시오? ” 하고 이번에

는 말끝까지 분명하게 다지어 물으니 "무어 귀신? 죽어야 귀신이 되지, 아직은

산 사람이야. " 하고 더욱 웃었다. 여자가 옆에 누운 것이 사람인 줄 안 뒤에는

일변 든든한 마음이 있으면서도 일변 공연히 몸이 떨리어서 한동안 떨다가 “왜

이렇게 떨어? ” 하고 묻는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이를 악물고 간신히 진정하였

다. 무서운 마음이 가라앉으며 홀저에 부끄러운 생각이 나서 돌아누우려고 몸을

트니 그 사람이 "이대로 누워서 이야기 좀 하세그려. " 하고 돌아눕지 못하게 하

였다. 그 사람이 자기는 평안도 사는 박가인데 무슨 일이 있어서 이곳을 지나다

가 길을 잃고 밤중에 산속에서 헤매던 중에 불빛을 보고 찾아왔다고 말하고 다

시 여편네 혼자 산속에 있는 까닭을 물어서, 여자가 장군 내력과 자기의 신세

를 대강 이야기한 뒤 장군의 벌역이 내려서 지금 두 사람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하니 "산 장군이 온대두 겁날 것이 없는데 그까지 죽은 장군이 오면

우리를 어찌할 텐가. 조금두 근심 말게. " 하고 그 사람은 씩씩하게 말하였다. "

사내가 밤에 장군당에 오기만 해도 급살맞는 법이라는데 지금 그저 온 것과도

다르고 벌을 안 받을 수 있을라구요. " "그것 보지. 장군당에 오기만 해도 급살

맞는다는데 나는 와서 잠만 한숨 잘 잤으니 장군두 사람 보아가며 벌을 내리는

게지. " 그 사람의 말이 유리하여 여자의 마음에도 그런 것 같으나 그렇다고 마

음이 아주 놓이지 아니하였다. 두 사람이 누워서 이야기를 하는데 여자는 부끄

러워서 묻는 말을 겨우 한 마디 두 마디 대답하였다. 지새는 달빛이 없어지며

곧 동이 텄다. 여자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무당이 올라와서 사내 있는 것을

보면 어찌하나 걱정이 되어서 "해만 뜨면 무당이 올라올 터인데 어떻게 하나요?

“ 하고 남자에게 의논하니 남자는 "무당이 와서 보면 소문이 날 테지. 그건 안

되었는데. " 하고 한참 생각하다가 "내가 낮에는 산속에 가서 돌아다니다가 밤에

다시 오지. " 하고 일어서서 벗어놓았던 갓을 집어 쓰고 갓과 같이 머리맡에 놓

아두었던 환도를 다시 몸에 지니는데 여자는 은근히 남자가 다시 오기를 바라는

맘이 있어서 "무당이 해만 지면 저의 집으로 내려간대요. " 하고 말하였다. 그

남자가 일어서면서 "시장할 것이 탈인데 무어 먹을 것이 없을까? " 하고 방구석

에 가서 음식상을 들여다보았다. 입에 마닐마닐한 것은 밤에 다 먹고 남은 것으

로 요기될 만한 것이 피밤 여남은 개와 흰무리 부스러기뿐이었다. "이나마 가

지고 갈까. " 하고 그 남자는 수건을 꺼내서 싸가지고 "해진 뒤에는 와두 좋겠

지? ” 하고 한번 다시 여자를 돌아보고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있다가 여자는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개어얹고 방안을 치우고 빈 상을 들고 부엌으로 내려가서

상을 닦아 엎어놓고 그릇들을 부시어 모아 놓고 부엌에서 마당비를 찾아들고 나

가서 넓은 마당을 정하게 쓸었다. 이때는 해뜬 지가 벌써 오래라 무당이 올라오

다가 쓰레질하는 것을 보고 가까이 와서 "벌써 일어나셔서 일하시네, 사흘이나

지나거든 일을 하시지. 새 마누라님이 부지런하셔서 장군님 좋아하시겠군. " 조

롱도 아니요, 칭찬로 아닌 말을 하고 갑자기 소리를 낮추어 간릉스럽게 "밤에 장

군님 오셨습디까? “ 하고 물었다. 여자가 대답을 아니하니 "오셨지요? " 하고

알고 묻듯이 말하고 여자가 빙그레 웃으니 "그렇지, 오셨겠지. 새 마누라님을 첫

날밤에 혼자 주무시게 하시겠소? ” 하고 능글능글하게 웃고 "식전 일을 많이

하셔서 시장하시겠군. 얼른 아침을 지어야치. " 하고 무당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데 여자도 따라들어갔다. "방에 있던 상도 치우셨네. 음식은 다 어찌하셨소? 떡

이나 과실은 집어두셔도 좋지만 다른 음식은 두면 상할 터인데. " "식전에 시장

해서 먹었소. " “녜. 잡수셨으면 좋지요. " 하고 무당은 입으로 말하면서도 속으

로는 여자가 걸구같이 먹었다고 비웃었다. 무당이 불을 피우고 나서 여자를 돌

아보며 "소세하셨지요? ” 하고 물어서 여자가 “녜. ”하고 대답하니 "그러면

손만 다시 씻으시오. 분향하러 가십시다. " 하고 말하였다. 장군당에 조석 분향하

는 절차가 있는데 그것은 장군 마누라의 소임이었다. "분향은 어떻게 하나요? “

"내가 같이 가서 가르쳐 드리지요. " "혼자 가서 하시구려. " "그것이 마누라님

일평생 하실 소임이오. 아침 저녁으로 하루 두 번씩. " "이 다음에 내가 할께 오

늘은 혼자 가서 하시오. " "천만 도섭스러운 말씀 다하시오. 마누라님이 성하신

때는 대신 못하는 법이오. " 무당은 불을 부등가리에 떠서 들고 앞을 서고 여자

는 그 뒤를 따라서 당집으로 향하는데, 당집 지붕에서 참새들이 짹짹거리어서

지붕을 치어다보니 큰 구렁이가 꿈틀거리고 기어갔다. "애구, 저 구렁이 좀 보오.

" "당집 지킴이오. 일 년에 몇 번씩 나오지요. " 하고 무당은 예사롭게 말하나

여자는 보기 징그럽고 마음이 송구하였다. 무당이 당집 문을 열고 들어가서 향

로에 불을 담아놓고 분향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서 여자가 향상 앞에 꿇어앉아서

향을 피우는데 속이 떨리어서 장군의 신상은 쳐다보지도 못하였바. 분향하는 동

안이 불과 얼마 안 되건만 여자에게는 대단 오랜 것같이 생각되어서 향을 불에

꽃고 일어서며 곧 무당을 돌아보고 "인제 고만 나갑시다. " 하고 말하니 무당이

”당집 안을 쓸어놓고 나가야지요. " 하고 구석에 걸리어 있는 장목비를 떼어내

렸다. "나는 머리가 아파서 밖에를 좀 나서겠으니 쓰레질만은 대신 좀 해주시오.

" 하오 여자가 빌듯이 말하니 무당은 "아무리나 그리하시오. " 하고 큰 인심 쓰

듯이 허락하였다.

여자가 당집 문밖에 나와서 무당을 기다려 같이 오려다가 지붕에 있던 구렁이

생각이 문득 나며 곧 그것이 근처에 서리고 있는 것 같아서 뒤도 안 돌아보고

침실로 달려왔다. 무당이 와서 아침 밥을 지을 때 여자가 같이 나서 하려고 하

니 무당이 "고만두시오. 더구나 머리가 아프시다며 방에 들어가 누워 기시오. "

하고 일을 못하게 말리어서 못이기는 체하고 방으로 들어와서 무당이 아침상을

들여을 때까지 편하게 누워 있었다. 무당이 상머리에 앉아서 이것저것을 먹어보

라고 권하였지만, 여자는 입맛이 없어서 한두 술 물에 말아 시답지 않게 건지다

가 숟가락을 놓았다. 여자가 점심은 아침보다 좀 낫게 먹었지만 역시 얼마 먹지

아니한 까닭에 저녁때는 시장기가 들었으나 분향하러 가기가 싫어서 꾀 피우느라고

저녁 짓기 전에 미리 무당더러 “나는 골머리가 아파서 저녁을 먹지 않을 테요. "

하고 말하였다. 저녁 분향은 마침내 무당에게 떠맡기게 되었으나 그 대신에 저

녁밥은 숟가락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무당이 저녁밥을 지어놓고 와서 체면치레

로 "종일 아무것도 잡순 것이 없어 어떻게 하나, 아침처럼 물에 놓아서 한술 잡

수어 보시지요. " 하고 말하다가 여자가 싫다고 고개를 흔드니 다시 두말 않고

저 혼자 가서 밥을 먹어치웠다. 해가 지자, 무당이 방문 앞에 와서 "나는 내려갑

니다. 내가 있어 보아 드리느니보다 장군님이 오셔서 한번 만져 드리면 머리 아

픈 것쯤 거뜬 나실 게요. " 하고 수다를 부리고 내려갔다. 여자가 자기도 시장하

려니와 종일 굶은 사내가 오면 먹이려고 생각하고 부엌에 내려가서 둘러보니 찬

밥 한술도 남겨둔 것이 없어서 새로 밥을 짓는 중에 그 남자가 부엌에 들어섰

다. "인제 저녁을 짓는 중인가? ” 하고 남자가 말을 묻는데 여자는 속으로 기다

리던 사람이 와서 은근히 반갑고 든든하나 말이 없이 남자를 흘끗 돌아보고 곧

고개를 숙이고 아궁이에 불을 넣어서 밥을 잦히었다. "무당이 시중을 든다더니

조석두 지어주지 않아? “ "왜 안 지어요. " "그럼 저녁은 벌써 먹구 나 줄라구

따루 짓나? " 하고 남자는 벙글벙글 웃었다. 여자가 갑자기 부끄러워서 한참 동

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특별히 남자만 주려고 새로 짓는 것이 아니란 뜻을 보이

려고 ”무당만 먹고 갔세요. " 하고 말하니 남자가 일부러 자기 앞으로 당기어

듣는지 "나하구 같이 먹을라구 무당만 먼저 먹여보냈어? “ 하고 말하여 여자는

더욱 부끄러워서 다시 입을 떼지 않고 새촘하고 있다가 나중에 남자가 우두머니

섰는 것이 보기 딱하여 "먼저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 하고 남자를 보지 않고 말

하였다. 남자가 방으로 들어간 뒤 여자는 부지런히 밥을 퍼서 사발 위에 사발을

덧놓은 것만큼 수북히 담은 밥을 외상으로 차려다가 방문 안에 들여놓았다. "왜

외상이야? 밥이 이뿐인가? ” "또 있어요. " "그럼 가지구 와서 같이 먹지. 어서

가지구 와. " "먼저 잡수세요. " "같이 먹구 얼른 치워버리지. 거서 이리 가지구

와서 같이 먹어. 안 가지구 오면 나두 안 먹구 앉았을 테야. " 여자가 남자의 억

지를 못이겨서 부끄럼을 참고 누룽지 섞어 떠붙인 밥사발을 숟가락 한 매와 함

께 들고 들어왔다. 상 옆에까지 와서도 방바닥에 따로 놓고 먹으려고 하는 것을

남자가 또 억지를 써서 겸상하여 같이 먹는데 남자가 "부끄러을 것이 무어 있

어? 맘놓구 먹게. " 하고 이르고 "숟갈 좀 자주 놀리게. " 하고 재촉까지 하였건

만 남자가 그 많은 밥을 다 먹도록 여자는 몇 술 뜨지 아니하여 나중에 남자는

빈 사발 위에 숟가락을 가로 얹어놓았다. "숟가락 치우시지요. " 여자가 말하여

남자가 숟가락을 지운 뒤에 여자는 상을 돌려놓고 잠깐 동안에 다 먹었다. 여자

가 상 가지고 부엌에 나가서 설겆이하여 무당이 해놓고 간 대로 그릇들을 엎어

놓고 솥까지 말끔 부시어 놓고 불씨를 가지고 들어와서 촛불을 당겨놓고 등잔접

시에 기름까지 따라놓았다. 여자가 일을 다한 뒤 앉지 않고 주저주저하고 섰는

것을 남자가 손을 잡아 끌어다가 촛불 아래 앉히고 마주 앉아서 한동안 말이 없

이 얼굴을 바라보니 여자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치마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

다.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이 올에 몇인가? “ 하고 나이를 묻다가 여자

가 대답을 아니하니 "스물이 아직 못 되었지? 내가 일찍 장가만 들었었더면 자

네만한 딸두 두었을걸. ” 하고 웃고 "내 나이는 올에 서른넷이야. 장가두 한번

못 들어보구 좋은 때를 다 지냈네.“ 하고 손가락으로 머리 위를 가리키며 "이

상투는 노총각 노릇 하기가 싫어서 외자루 끌어올린 것일세. ” 하고 말하는데

여자는 말이 없이 들을 만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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