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 하고 남자는 말머리를 고치었다. "내가 살인하구 도망해서 숨어
다니는 사람일세. " "사람을 죽였어요? ” 하고 여자는 말소리가 떨리어 나오는데
“그래, 바루 아흐레 전에 내가 사람 하나를 죽였어. " 하고 남자는 말하는
것이 예사로웠다. 여자가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려고 한동안 외면하고
앉았다가 "내가 사람을 죽이게 된 내력을 이야기할 것이니 들어보게. " 하고
남자의 말하는 것을 듣고 비로소 고개를 돌리어서 남자의 입을 바라보았다.
"나는 박유복이 란 사람인데... "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여 자기 아버지가
노가의 모함에 죽은 것을 이야기하고 자기 어머니가 남편 원수를 못 갚아서
한을 품고 죽은 것을 이야기하고, 또 자기가 앉을뱅이로 세월을 허송한
까닭에 부모의 원수를 일찍 갚지 못한 것을 이야기하는 동안에 아이 적에
서울서 지낸 일도 이야기하고, 또 그 외에 병 고친 이야기와 표창질 이야기도
다하여 이야기 갈래가 많아서 초 한 자루가 다 닳았다. 초 심지가 타느라고
부지지 소리가 날 때 여자가 일어나서 벽에 걸린 등잔에 불을 당겨놓고
앉았던 자리에 다시 와서 앉았다. 유복이가 이야기를 다시 계속하여 강령서
원수 갚고 배천 와서 성묘하고 벽란나루를 건너와서 양주로 가다가 못 가고
덕적산으로 들어온 곡절을 일일이 이야기하였다. 여자는 정신 놓고 이야기를
듣다가 이야기가 그치며 곧 "부모의 원수 갚은 것도 죄가 되나요? ”
하고 물으니 유복이는 "글쎄 모르지. 더구나 다른 사람을 상해 놓아서 잡히면
무사할 수 없을걸. " 하고 대답한 뒤 "지금 내 사정이 이러하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 하고 돌이켜 물었다. "무어를 어떻게 해요? " "첫째 우리들이
나이가 너무 틀리구, 둘째 내가 한몸을 주체 못하는 처지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
느냐 말이야. 내가 오늘 낮에 곰곰 생각해 보아야 별수가 없데. 그래서 오늘 밤
에 오두 않구 그대루 가버리려다가 다시 오마구 말두 했거니와 한번 사정을 이
야기하구 사과나 할까 하구 왔네. " "남의 몸을 망쳐놓고. ” "그러기에 사과하
러 왔지. " "사과는 무슨 사과요? “ "그러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말이야. "
"나를 죽이고 가셔요. " "무슨 원수가 있다고 자네를 죽인단 말인가. " "어떻게
할 수 없으면 죽여라도 주셔야지요. " "내가 자네 같은 안해를 얻으면 더 바랄
것이 없지만 신세가 하두 망칙하니까 잘못되었다구 사과할 외에는 다른 말을 할
나위가 없네. " 하고 유복이는 말을 그치고 앉아서 여자가 앞니로 치마끈을 물어
뜯는 것을 바라보다가 "내가 어디 가서 숨어 있다가한 일 년 후에 바람이 자거든
다시 찾아올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리려나? ” 하고 다시 말하였다. "여기 하루도
더 있을 수가 없어요. " "그러면 나 따라서 도망하려나? 무슨 고생을 하든지 원
망이 없겠나? “ "원망은 무슨 원망? 모두가 팔자지요. " ”내 팔자가 남의 칠자
만두 못하니까 자네 팔자까지 망치기가 첩경 쉬워. " 하고 유복이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유복이가 우연히 관계된 여자를 버리기도 아깝고 달고 가기도 어려워서 질정
한 마음이 없던 끝에 여자의 말에 끌리어서 같이 도망하기로 작정하고 곧 갈 곳
을 의논하였다. "가서 의지할 성으루는 양주 임꺽정이가 맹산 이종버덤 도리어
든든하나 파묻혀 있을 자리루는 맹산이 양주버덤 훨씬 나은 편인데 나 혼자 같
으면 형편을 보아가며 이리저리 옮아다니기가 어려을 것이 없지만 우리 둘이 합
께 다니기는 어려우니까 아주 가서 있을 곳을 정해야겠네. " "양주는 좋지 않아
요. " "왜? “ "우리 동네서 왕래가 있어요. 내 동무 하나가 양주로 시집까지 갔
어요. " "맹산 두메 속에 가서 조밥 먹구 살겠나? ” "조밥은 누가 못 먹는다고
해요. " "이따금이 아니구 끼니마다 조다짐이야. " "맹산이 얼마나 먼가요? 이삼
백 리 되나요? “ "이삼백 리면 멀 것이 없게. 칠팔백 리나 되니까 갈 것두 걱정
일세. " "여러 날 가겠어요. " "열흘을 갈는지 한 달을 갈는지 가보아야 알지. "
"걸음을 못 걸어보아서 가다가 발병이 나면 어떻게 하나요? " "내가 업구 가지.
" "남부끄럽게. " "남이 볼 때는 내려놓지. " "설마 기어라도 가겠지요. " "양주를
제쳐놓으면 맹산밖에 갈 데가 없으니까 걸어가든 기어가든 가보세그려. " 갈 곳
을 맹산으로 작정한 뒤 다음에 갈 준비를 의논하게 되었다. ”길양식할 쌀은 있
겠지? “ "양식이 많이 들까요? " "양식 말은 가져야 할걸. " "말쌀이야 있겠지
요. " "길양식만 있으면 되었네. " "무명은 소용 없을까요? " "왜 소용이 없어.
웬 무명이 다 있나? " "어머니가 나아서 나 준 것이 있어요. " "몇 필이나 있나?
잣수 차는 것이겠지. " "잣수가 차다니요? " "서른댓 자 잣수가 차는 것이냐 말
이야. 집에서 나은 것이면 두 자짜리 상목은 아니겠지. " "두자짜리 상목이 아니
에요. 옷 해입으라고 어머니가 나아주신 것인데. " "그래 몇 필이야? " "아마 서
너 필 되지요. " "그럼 그것두 가지구 가세. 길에서 쓰지 않더라두 가서는 못 쓰
겠나. " "의복은 입은 대로 가도 좋을까요? " "글쎄, 머리를 땋아내리구 남복을
했으면 길에서 편할 터이지만. " "그렇게 하지요. " "고의적삼 한 벌은 있어야지.
" "무명 한 필 조기지요. " "새루 짓는단 말이지? 아무리나 하게. 그러구 길에서
는 부자간이라구 할까. " "부자간이라니요? " "자네를 내 아들이라구 하랴 말이
야. " "싫어요. " "그럼 무어라구 할까? " "남남끼리라지요. " "남남끼리는 재미없
어, 형제라구 하지. 나이가 엄청나게 틀리는 형제두 있으니까. " "아무리나 해요.
" "그러면 고의적삼 다 되는 날 밤에 떠나기루 작정하구 한 털 다 짓자면 며칠
걸리겠나? " "박지 말구 중중 호아 짓지요. 입은 모양만 고의적삼이면 되지 않아
요. " "그렇지. " "그럼 오늘 밤에 말라서 짓다가 내일 낮에 무당 몰래 틈틈이 지
으면 내일 밤에 떠날 수 있지요. " "그럼 내일 밤중에 떠나기루 작정하세. " 길
준비와 떠날 날이 함께 다 작정된 뒤 여자는 곧 일어나서 궤 속에서 무명 한 필
을 꺼내 들고 바느질 제구 든 동고리를 가지고 와서 앉았다. 여자가 자질하고
가위질하고 또 바느질하는 동안 유복이는 앉았다 누웠다 하다가 나중에 "밤을
새려나? " 하고 물으니 여자가 바느질하면서 "졸리면 자지요. " 하고 대답하였
다. "고만 자구 새벽 일어나 하게. " "조금 더 하다 잘 터이에요. " "새벽에 못
일어나면 낭패 아닌가. " "걱정 말구 먼저 주무세요. " "인심이 혼자 잘 수 있나.
같이 자세. " 하고 유복이가 우겨서 여자는 바느질 동고리를 한옆에 치우고 자리
를 보게 하였다.
유복이는 최서방의 딸을 안해로 치고 최서방의 딸은 유복이를 남편으로 믿고
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이튿날 새벽에 내외 두 사람이 일찍 함께 일어났다,
유복이가 전날과 같이 소세도 아니하고 곧 산속으로 가려고 "이따 해 진 뒤에나
또 만나세. " 하고 일어서는데 그 젊은 안해가 "잠깐만 기세요. 어젯밤에 밥을
나우 지어서 떠둔 것이 한 그룻 있으니 가지고 가세요. " 하고 붙들었다. 유복이
는 그 어머니를 여읜 지가 이십 년에 알뜰 살뜰히 위하여 주는 사람을 보지 못
하다가 이 말 한마디를 들을 때 곧 머릿속에 '어머니 살았을 때 이런 말을 들어
보았거니. ' 하고 생각하며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안해가 무명 꺼내던 궤짝
에서 바가지 한 짝과 베보자기 하나를 꺼내가지고 부엌에 내려 가서 찬밥 한 바
가지를 보자기에 싸다가 줄 때까지 유복이는 우두머니 서 있다가 안해가 한 손
으로 주는 것을 두 손으로 덥석 받았다. 유복이가 나오다가 부엌 안을 들여다보
니 뒤에 따라나온 안해는 자기 맘을 미루어서 밥 지은 자취를 살피는 줄로 짐작
하고 "무당이 해놓고 간 대로 다시 다 해놓았으니 염려 마세요. " 하고 말하는데
유복이는 "아니야, 짚이 혹시 있나 하구 살펴보았어. " 하고 말하였다. "짚은 무
어 하실라오? “ "신을 삼을라구. " "그러면 부엌 이편 구석에 짚 묶음이 있습디
다. " 하고 안해가 들어가서 집어 가지고 나오는 짚 묶음을 유복이가 보고 "마침
짚이 있으니 그만하면 신 서너 켤레 넉넉히 삼겠네. " 하고 말하면서 한 손으로
받았다. "발 좀 보세. " "대중해서 삼으시구려. " "길 가는 데는 첫째 신이 잘 맞
아야 하네. " "발 크지요? " 하고 안해가 앞으로 내어미는 발을 유복이가 굽어보
다가 허리를 구부리고 발을 들고 뼘어보려고 하니 안해는 실없은 장난으로 알고
발을 다시 끌어들였다. "왜 그래. 뼘어보는 것이 눈대중버덤 확실하지 않아. " 하
고 유복이가 허리를 구부린 채 안해의 얼굴을 치어다보니 "뼘어까지 볼 것이 무
어 있세요, 장난이지. " 하고 안해는 방그레 웃었다. "어린 안해를 다리고 실없이
장난할 리가 있나. " "점 잖은... ” 하고 안해가 말을 하다가 중동무이하고 혼자
웃으니 "버릇없이 굴지 마라. " 하고 유복이는 나무라면서도 역시 빙그레 웃었
다. "지금 신은 신이 발에 잘 맞으니 뼘어볼라거든 신이나 뼘어보시지요. " 하고
안해가 신 한 짝을 벗어 내놓았다. 유복이가 신을 뼘어보고 밖으로 나간 뒤에
그 안해는 다시 방에 들어와서 바느질을 하다가 한동안 지나서 무당의 발소리가
들릴 때 바느질 동고리를 보이지 않게 치워버렸다. 그날 낮에 무당이 부엌일할
때 유복이의 젊은 안해는 방문을 닫고 앉아서 바느질 동고리를 내놓고 일하다가
"벌써 무슨 일을 하시오? " 하고 들여다보는 무당에게 들키었다. "아니. " 하고
한마디 외에 다른 말을 못하고 얼굴이 붉어지니 무당이 수상하게 여기어서 "무
슨 일인가요? " 하고 캐어물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아니야. " "아니라니요. 어디
바느질 좀 봅시다. " "볼 것 없어. " "어디 좀 보아요. " 하고 무당이 동고리에
담긴 일하던 것을 들고 보더니 깜짝 놀라며 "이것이 남정네 고의 아닌가요? "
하고 물었다. 촌색시일망정 슬금한 여자라 거짓말을 꾸밀 생각이 나서 잠깐 동
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알고 싶소? 궁금하오? " 하고 고개를 다시 치어들었
다. "대체 사내 고의는 무엇에 쓰실라오? " "밤에 입고 잘 터이오. " “밤에 왜
사내 고의를 입으신단 말씀이오. " "내가 잠이 들면 오시고 내가 잠이 깨면 가시
니까 한번 사내 고의를 입고 아래위를 꼭꼭 동여매고 자볼 테요. " "장군님이 노
염 많으신 양반이니 아예 조심하시오. 노염 내시면 큰일이오. " "내가 알아 할
테니 염려 마오. " 그럴싸한 말에 무당이 속아서 다시 더 말을 묻지 아니하여 여
자는 몰래 하던 일을 도리어 펼쳐놓고 하게 되었다. 하루 해가 다 가서 저녁 분
향할 때가 되었다. 여자가 분향하러 가기가 죽기보다도 더 싫지만, 싫든 좋든 이
번 한번이 마지막이거니 생각하며 부등가리에 마들가리불을 떠서 들고 당집 안
에 가서 분향을 건등반등하고 왔다. 무당이 저녁 밥상을 갖다 줄 때 "나는 고의
를 다 지어놓구 먹을 테니 먼저 먹구 내려가오. " 말하고 저녁을 먹지 아니하였
다가 무당은 내려가고 남편이 온 뒤 밥을 더 지어서 내외 겸상하여 먹었다. 밥
을 같이 먹는 동안에 "밥 먹구 나서 상은 당신이 치우세요. " "왜? " "글쎄. " "
같이 하지. " "싫어요.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세요. " "바느질을 다 못한 것일세그
려. " "무슨 일이든지 있다 보면 아시지요. " 하고 내외가 수작하였다. 밥이 끝나
서 유복이가 부엌으로 설겆이 하러 내려갈 때 그 안해는 "그러고 내가 들어오시
라고 말하기 전에는 방으로 들어오지 마세요. " 하고 당부하여 유복이가 별일이
다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리 함세. " 하고 대답하였다. 유복이가 밥그룻들을
씻어서 등상에 엎어놓고 들어오라기를 기다리다가 나중에는 갑갑하여 "고만
들어갈까? ” 하고 소리를 지르니 안해는 "잠간만 더 참으세요. " 하고 대답한
뒤 다시 얼마 동안 있다가 "인제 들어오세요. " 하고 불렀다. 유복이가
방문을 여니 방안에 섰는 것이 여편네가 아니요, 의젓한 머슴아이다.
그 동안에 얹은머리를 땋아내리고 사내 고의적삼을 갈아 입은 것이었다.
그날 밤중이 지나서 달이 뜬 뒤데 유복이는 길양식과 안해의 옷가지와 무명
온필을 한 짐에 묶고 자투리 무명으로 걸빵을 만들어 짊어지고 남복한 안해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산에서 내려와서 무당의 집 앞을 살그머니 지난 뒤에 송도
부중 들어가는 길을 따라서 오다가 부중이 멀지 않거니 생각 들 때부터 샛길로
들어서서 방향만 대고 휘돌아서 부중을 비키고 지나왔다. 곧장 오면 이십 리 남
짓한 길을 샛길로 돌아온 까닭에 삼십 리를 좋이 걸었다.
이때 벌써 유복이의 안해는 발을 질질 끌기 시작하여 유복이가 이것을 보고 "
발이 아픈가? " 하고 물으니 안해는 “녜. ” 하고 풀기 없이 대답하였다. "칠팔
백 리 길을 갈 사람이 겨우 이삼십 리쯤 와서 벌써 발병이 나면 앞길을 장차 어
떻게 간단 말인가? " "글세요, 며칠 걸어나면 좀 나을까요. " "발이 정히 아프면
좀 업구 가볼까? “ "내가 업히겠다고 해도 걱정이겠소. 짐은 어떻게 하실라오?
" "짐은 자네가 지고 자네는 내가 업으면 되지 않겠나. " "나는 업히기도 싫고
짐 지기도 싫어요. " "어디 가서 지게 하나만 얻으면 되겠네. " "어떻게? " "지게
위에 짐을 놓구 짐 위에 자네를 앉히구 그 지게를 내가 짊어지면 묄 것 아닌가.
" "그 꼴이 보기 좋겠네. " "꼴이야 좋든 말든 편하게 가기만 하면 고만이지. " "
나중에는 어찌하든지 지금 좀 붙들어나 주시구려. " "그리하게. 이리 오게. " 유
복이가 안해의 손을 붙들고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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