꺽정이패는 산 끝에서 산 아랫길까지 절반 넘어 내려왔을 때, 연천령이 멀리
서 바라보고 뒤에 떨어진 군사들을 기다리지 않고 단기로 쫓아와서 말을 길에
세우고 칼을 머리 위로 비껴들고 나무 사이에 우뚝우뚝 섰는 꺽정이패를 치어다
보며 “이놈들, 어서 내려오너라!” 하고 호통을 질렀다. 연천령은 이봉학이가
군기시의 직장을 다닐 때 부봉사로 있던 사람이라 이봉학이가 옛날 조라동관을
알아보고 그전 동관의 의로 양편이 다 무사하기를 바라서 다른 사람보다 한 걸
음 아래로 내려서며 “연봉사 편안하우?” 하고 인사하니 연천령이 이윽히 치어
다보다가 “이놈, 네가 이봉학이 아니냐? 너는 조정의 벼슬 다니던 놈이 무슨
뜻으로 조정을 배반하구 도둑놈이 됐느냐? 꺽정이 같은 백정놈의 자식보다 네가
더 죽일 놈이다. 너부터 빨리 내려와서 내칼을 받아라!” 하고 호령을 통통히 하
였다. 이봉학이는 부끄럽고 분하여 말을 더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데, 꺽
정이가 이봉학이 앞에 내려와서 연천령을 굽어보며 “그까진 녹슨 칼을 누구더
러 받아라 마라, 되지 못한 눔 같으니! 그 칼 가지구 네 집에서 가서 개껍질이나
벗겨라!” 하고 조소 반, 욕설 반 꾸짖었다. “쥐 새끼 같은 도둑놈들! 한꺼번에
다 내려오너라. 내가 너이놈 일곱을 한칼에 무찌르지 못하면 성이 연가가 아니
다.” “주제넘은 눔 큰소리 마라!” 배돌석이가 뒤에서 “대장 형님, 그깐놈하
구 아귀다툼하지 마시우. 그 따위 주둥이 다시 못 놀리두룩 내가 버릇을 가르치
리다.” 하고 말하는 것을 꺽정이가 돌아보며 “너이들은 가만 있거라.” 하고
제지한 뒤 곧 허리에 질렀던 장광도를 빼들고 아래로 내려오다가 나무 없는데
와서 홀정에 걸음을 멈추었다. 난데없는 화살 한 개가 왼편 전대팔에 와서 꽂
혔던 것이다. 위에 섰던 여섯 사람이 꺽정이 살 맞은 것을 보고 쫓아들 내려오
는데, 이봉학이와 배돌석이가 먼저 쫓아와서 하나는 꽂힌 살을 뽑아주고 하나는
맞은 자리를 눌러주었다. 연천령을 따라온 군사들이 쌈하러 오지 않고 구경하
러 온 것같이 멀찍이 뭉쳐서 연부장이 가까이 오라고 부르지 않는 것만 다행한
양으로 여기고들 있는 중에, 활잡이 하나가 동무 군사들더러 “여기 섰지 말구
저리들 가서 도둑놈을 잡아보세.” 하고 말을 내었다가 “꺽정이더러 자네를 잡
아가라게?” “자네가 전장 귀신이 되구 싶어서 몸이 다나?” “저리 가구 싶거
든 자네 혼자 가게.” 동무 군사들에게 핀잔을 바았다. 그 활잡이는 키가 작아서
봉산 읍내 사정에서 땅딸보란 별명을 듣는 한량인데 호초가 작아도 맵다는 격으
로 사람도 다기지고 활도 당차게 쏘았었다. 핀잔 주던 동무 군사들이 “뒤루
둘째 선 놈이 황갈세.” “그놈이 우리 골 이쁜 색시를 뺏어갔지.” “쇠전거리
백이방이 사위를 너무 유난스럽게 고르다가 뱀 봤느니.” “너무 유난떠는 걸
부엉바위 용왕님이 밉살스럽게 여거서 도둑놈 사위를 지시한 거야.” “호장을
얻어 하려구 애쓰는 모양이지만 사위 연좌로 안될 겔세.” “백이방더러 사위말
을 하면 나는 딸두 없구 사위두 없는 사람이라구 펄쩍 뛴다네.” “지금 연부장
나리하구 맞소리 지르는 놈이 누군지 자네들 아나? 저게 꺽정일세.” “지금 황
해도 이십사관 관하 백성들더러 황해감사가 무서우냐, 꺽정이가 무서우냐 물어
보면 열의 아홉은 꺽정이각 무섭달걸.” “논두럭 정기라두 정기를 타구난 놈이
야.” 하고 씩둑꺽둑 지껄일 때, 땅딸보란 한량은 입술을 잔뜩 악물고 있다가 꺽
정이가 나무 없는 데로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고 얼른 여러 군사들 앞에 나와 서
서 먼장으로 한 대 쏜 것이 꺽정이 팔에 맞았었다. 꺽정이가 화살 온 곳을 바라
보다가 “저기 조눔이 쏘았구나. 또 쏜다. 살 조심들 해라.” 하고 소리치니 이
봉학이가 웃으며 “소경살이 번번이 맞겠소. 한 대 앙갚음은 내가 하리다.” 하
고 말하며 곧 활을 앞으로 내들었다. 땅딸보란 한량이 활을 두번째 쏘고 살이
넘고 처지는 것을 바라보느라고 고개를 젖혀들고 있는 동안에 이봉학이의 화살
이 산 멱통에서 뒷덜미까지 꿰뚫어서 섰던 자리에 고꾸라졌다. 연천령은 적괴
로 짐작이 드는 영특하게 생긴 도적이 칼 가지고 싸우러 내려오는 것을 보고 말
을 뒤로 좀 물려세우고 기다리던 중에 적괴가 살을 맞아서 뒤에 섰던 여러 도적
이 모두 쫓아내려와서 옹위하고 섰는데, 그 선 자리가 길에서 대여섯 간밖에 더
안 되었다. 산 밑으로 두어 간 동안이 좀 가파르나 가파른 데만 지나 올라가면
비스듬한 비탈이라 연천령이 도적들을 쫓아올라가려고 양쪽 등자로 다래 위를
치며 고삐를 채쳐서 말을 산위로 치달렸다. 가파른 데를 다 올라오자, 돌 한 개
가 미간에 들어와 맞는데 눈의 불이 번쩍 났다. 고삐 잡은 손등으로 미간을 누
르며 앞으로 엎드릴 때 고삐가 절로 잡아당겨진 것을 말이 서란 뜻
으로 잘못 알았던지 혹 앞으로 더 나가는데 위험한 낌새를 미리 알아챘던지 빨
리 오던 걸음을 급히 그치려다가 뒤로 미끄러지고 안 미끄러지려고 애쓰다가 더
욱 미끄러져서 마침내 말은 궁둥방아 찧고 쓰러지고 사람은 재주 넘고 나가동그
라졌다. 꺽정이가 돌팔매 친 배돌석이를 가만 있으라는데 가만히 못 있다고 나
무라고 다친 팔을 동여매지도 않고 그대로 길로 뛰어내려왔다. 연천령이 나동그
라질 때 내던진 환도를 미처 다시 집기 전이라 항거도 변변히 하지 못할 터인
데, 꺽정이는 바로 해치러 들지 아니하고 “어서 칼 집어 가지구 대들어라! 네가
칼을 얼마나 잘 쓰기에 그렇게 큰소리하나 어디 좀 보자.” 하고 불호령을 내놓
았다. 연천령이 환도를 집으며 곧 머리 위에 치켜들고 대드니 꺽정이는 가까이
대들지 못하게 막는 것같이 칼을 앞으로 내들었다. 꺽정이의 장광도는 비수 쇰
직하게 작고 연천령의 환도는 장광도보다 곱절 넘어 커서 서로 어울리기만 하면
꺽정이가 훨씬 불리할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둘이 서로 노려보고만 있던 끝에
연천령이 별안간 큰소리를 지르고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머리 위의 환도를
정면으로 내리쳤다. 꺽정이는 미리 짐작하고 기다린 것같이 슬쩍 몸을 바른 쪽
으로 틀고 몸을 트는 결로 곧 연천령의 왼쪽 허리를 가로 후펴칠 듯이 하여 연
천령이 환도를 끌어들일 새도 없이 그대로 꺽정이의 칼 든 팔을 치치려는 순간
에 꺽정이의 칼이 가로 허리를 치지 않고 위로 어깨에 떨어졌다. 날카롭기 짝이
없는 장광도가 연천령의 왼쪽 어깨서 바른쪽 젖가슴까지 엇비슥하게 내려먹었
다. 연천령이 몸이 피투성이 된 뒤에도 악 소리를 지르며 환도를 몇번 휘두르다
가 땅바닥에 쓰러지는데 마치 밑동 썩은 나무 넘어지듯 하였다. 말이 타고 온
사람의 임종을 하려는 것같이 우두머니 바라보고 섰는 것을 꺽정이가 와서 고삐
를 잡고 말의 아래위를 한번 훑어본 뒤에 몸을 날려 안장 위에 올라앉았다. 말
은 흉악한 사람을 등에 태우고 싶지 않은 듯 대가를 뒤흔들고 궁둥이를 들까불
고 뺑뺑 돌더니 탄 사람이 저를 다루는 폼이 생무지나 행내기가 아닌 줄을 짐
작하였던지 순하게 가만히 섰다. 꺽정이가 산에서 내려온 여섯 사람을 보고 “이
황부루가 훌륭한 말이다.” 하고 말을 칭찬하는데 여섯 사람 중 황천왕동이가
전에 금교서 본 생각이 나서 “그거 금교찰방 타구 다니던 말이구먼요.” 하고
말하니 “전에는 뉘 말이거나 인제 내 손에 들어왔으니 내 말이다.” 하고 꺽정
이는 마음에 만족한 듯이 우었다. 이춘동이가 앞으로 나서며 “의외로 좋은 말
까지 한 필 얻었으니 인제 고만 저 개울 건너루 건너갑시다.” 하고 가기를 재
촉하여 꺽정이가 선뜻 “가세.” 하고 대답한 뒤 두 눈 딱 부릅뜬 채 죽어자빠
진 연천령을 말 위에서 다시 굽어보고 여섯 사람을 데리고 얼음 언 개울을 건너
서 또 다시 나무 많은 산으로 올라섰다. 산등갱이를 하나 넘어올 때, 뒤 쫓던 관
원들이 겨우 쫓아온 듯 길 저쪽 산위에서 여러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풍편에 들
리었다. 황천왕동이가 김산이의 손목을 잡고 오면서 백두산 이야기를 하느데 앞
서 가는 이춘동이가 뒤를 돌아보며 “백두산엔 어째 갔었나?” 하고 묻는 것을
황천왕동이는 듣고도 못 들은 체하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여 끝을 마친 뒤에
김산이의 손목을 놓고 이춘동이 옆에 쫓아와서 느런히 서서 오며 “내가 백두산
정기를 타구 나신 어른이야.” 하고 웃음의 말로 뒤늦은 대답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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