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동이가 음식 싸넣은 자루를 어깨에 엇매고 나설 때, 이봉학이가 그 자루
는 원력 있는 길막봉이를 주라고 하여 길막봉이는 한손에 철편 들고 한 어깨에
자루 메고 그외의 여섯 사람은 각각 무기만 손에 들고 이춘동이를 앞세우고 산
속으로들 들어왔다.
꺽정이패 일곱 사람이 얼마 동안 북쪽에 솟은 상봉을 바라보고 들어오다가 큰
산으로 건너가려고 서쪽을 향하고 나오는데 본래 길이 없는데 눈까지 덮여서 지
형을 잘 아는 이춘동이도 나갈 방향을 잡느라고 두리번거릴 때가 많았다. 잔등
을 높은 것 낮은 것 여렷 넘어오는 중에 김산이가 빙판진 비탈에서 미끄러져서
한편 발목을 접질리고 그 발목을 아끼느라고 절뚝절뚝하며 잘 따라오지 못하여,
황천왕동이가 올라오는 데는 뒤에서 밀어주고 내려오는 데는 앞에서 끌어 주었
다. 황천왕동이는 산에서 나서 산에서 자란 사람이라 산타기를 여느 사람 평지
걷듯 하는 까닭에 김산이를 거들어 주면서도 남의 뒤에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김산이가 황천왕동이에게 딸려 오면서 “여보게 춘동이, 길까지 나가자면 얼마
나 남았나?” 하고 물으니 이춘동이가 좌우 산세를 한번 둘러보고 “반 좀 더
왔네.”하고 대답하였다. “어디 앉아서 좀 쉬어 갔으면.” 김산이가 발목이 아
파서 쉬어 가잔 말은 내고도 다른 사람의 의향을 몰라서 말끝을 흐리었다. 일곱
사람 중의 귀인인 이봉학이도 다리를 잠깐 쉬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던 차라 김
산이더러 “자네는 이번이 처음 경난이지? 어렵겠네.” 하고 말한 뒤 꺽정이를
보고 “여기 어디 좀 앉아서 쉬어갑시다.” 하고 말하니 꺽정이는 못마땅한 것
같이 혀를 찬 뒤 고개를 끄덕거리었다. 앉아 쉴 만한 자리들을 찾는 중에 이춘
동이가 앞에 장등을 가리키며 “이 등갱이를 넘어가면 아늑한 골짜기가 나설 듯
한데 이왕 쉴바엔 잔풍한 데 가서 쉽시다.” 하고 말하여 여러 사람이 그 말을
쫓아서 장등 하나를 더 넘어온즉 과연 조그만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 안침 산 기
슭에 두덩진 곳이 있는데, 두덩 위에는 바윗돌이 듬성듬성 박히고 두덩가에는
다복솔이 빽빽하여 날 따뜻할 때 길짐승들 붙기 좋을 자리였다. 일곱 사람이 두
덩 위에 와서 돌 위의 눈을 쓸고 앉아 헐각들 하는 동안에 길막봉이는 동쪽의
관군 막은 것을 묻고 또 배돌석이는 서쪽의 관군 막은 것을 물어서 여럿이 너도
한마디 나도 한만디 서로 받고채기로 이야기들 하는데, 김산이만은 발목 주무르
기에 골몰하여 이야기 참례도 못하였다. 이춘동이가 김산이를 이야기 한 축에
끌어넣으려고 “산이는 관군 올라오기 전에 덜덜 떨던 사람이 관군 올라온 뒤루
땀을 뻘뻘 흘렸으니까 관군이 산이를 어한시켜 준 셈이야.” 하고 웃으니 “관
군 덕에 어한한 사람이 나뿐일라구?” 하고 김산이는 말대꾸하며 여전히 발목을
주물렀다. “관군이 지금쯤 쫓아오면 자네 발목두 절루 나을 걸세.” “참말 관
군이 지금 우리 뒤를 쫓아오지 않을까?” “발목이 낫는다니까 곧 쫓아오기를
바라나? 그렇지만 우리가 어디루 간 줄 알구 그렇게 쉽사리 쫓아오겠나.” 이춘
동이가 김산이에게 우스개하는 말을 황천왕동이가 듣고 “눈 위에 우리 발자국
이 난 것은 어떠허구?” 하고 말하니 이춘동이는 깜짝 놀라며 “참말 그래. 우
리가 이렇게 늑장 부릴 일이 아니로군.” 하고 여러 사람을 돌아보았다. 길막봉
이가 온천서 들은 이야기가 문뜩 생각이 나서 “우리가 지금부터는 모두 미투리
들을 꺼꾸루 신구 갑시다. 그러면 우리 발자국을 뒤밟아오는 관군이 간 건 온
걸루 알고 온 건 간걸루 알지 않겠소?” 하고 말하니 황천왕동이는 온천 이야기
를 듣지 못한 사람이라 신통한 꾀라고 손뼉까지 쳤다. 꺽정이가 웃으며 신통한
꾀를 써보자고 말하여 여럿이 다같이 미투리를 거꾸로 신고 발에서 벗겨지지 않
도록 들메를 단단히 매고 두덩에서 일어설 때 동쪽 장등에 관군의 활잡이들이
나타났다. 서쪽 장등으로 올라가면 과녁박이 노릇을 하게 되는 까닭에 나무가
많이 들어선 북쪽 산으로들 기어올랐는데, 산이 서쪽은 험하여 일곱 중에 가지
못할 사람이 태반이라 하릴없이 상봉 밑을 지나서 동쪽으로 나왔다. 꺽정이가
걸음 걷기 거북하다고 미투리들을 바로 신자고 말하여 관군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데 와서 신발등을 다시 고쳐 신고 상봉 뒤로 돌아서 서난간으로 내려갔다.
동쪽, 서쪽 관군들이 활잡이들 섰는 곳까지 몰려내려갔을 때, 동쪽에서는 선전
관 정수익이 군사를 다시 정돈시켜서 데리고 올라 오는데 활잡이들을 창잡이,
칼잡이보다 앞세우고, 서쪽에서는 봉산 군수 이흠례가 군사를 친히 통솔하고 올
라오는데 창잡이, 칼잡이 새새에 활잡이들을 섞어 세웠었다. 그러나 양쪽에서 다
같이 화살 한 개 쓰지 않고 산 위에를 올라왔다.
정수익과 이흠례가 군사를 다시 합하여 가지고 도망한 도적들을 뒤쫓았다. 새
눈 위에 박힌 발자국을 밟아서 조그만 골짜기 두덩진 곳에 와서 본즉 여러 놈이
앉았다 간 형적은 완연하나 어디로들 나갔는지 나간 발자국이 없었다. 북쪽 산
에서 내려왔지 올라간 것이 아니었다. 정수익과 이흠례가 다같이 까닭을 몰라서
묻는 눈치로 서로 바라보다가 정수익이 먼저 “그놈들이 이곳에 와서 승천입지
를 했기 전에야 어디루든지 나갔을 텐데 두 군데 발자국이 다 들어온 게니 이거
괴상하지 않소.” 하고 말을 내었다. “들어오는데 두 군데루 들어왔을 리야 있
소. 한 군데루는 나갔겠지.” “옳지, 이놈들이 신발을 거꾸루 신은 게요. 발자국
으루 우리를 속이려구.” “그러면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두 발자국에 속아 왔
는지 모르겠소.” “아까 올라가는 걸 봤다는 아이들두 있으니까 여기서 신발을
거꾸루 신구 저 산으루 올라간 게 분명하우.” “십의 팔구 그런 듯하나 혹 우
리가 오는 중간에 다른 데루 빠져 나간 발자국이 있는 걸 살펴보지 못하구 왔는
지두 모르니 군사를 다시 나눠서 두 패루 종적을 찾아보는 게 어떻소?” “내
생각엔 그럴 것 없을 것 같소. 우리 함께 발자국을 밟아서 저 산으루 올라가 봅
시다.” “아무리나 합시다.” 이수익과 이흠례가 군사들을 데리고 상봉 밑을 지
나서 동쪽으로 나오는데 말을 타도 고생이지만 그나마 못 탈 데가 많아서 걷느
라고 죽을 고생들을 하였다.
안계가 제법 넓어지는 한 장등에를 올라왔을 때, 평산 군사가 북쪽에서 마산
리로 나가는 것이 바라보이어서 정수익이 이흠례와 의논하고 마산리 동네와 서
쪽 산골길을 막아 달라고 전갈하여 군관 두엇을 쫓아보냈더니 연천령이 필마단
기로 달려 와서 정수익과 이흠례를 보고 마상에서 한번 허리를 굽힌 뒤 “도둑
놈을 몇 놈이나 놓쳤소?” 하고 물어서 “아직은 한 놈두 못 잡았네.” 하고 정
수익이 대답하였다. “어떻게 하다가 일곱 놈을 다 놓쳤단 말이오?” “이야기
하자면 장황하니 나중 듣게.” “이부장은 어디 있소?” “이마를 몹시 깨서 지
지라구 동네루 내려보냈네.” “어째 이마를 깼소, 낙마했소?” “도둑놈의 돌팔
매를 맞았다네.” “저런 변이 있나.” “여기서 보기에 평산군이 얼마 안돼 보
이니 웬일인가?” “나하구 강찰방하구 둘이 백 명을 얻어가지구 오는 길이오.
” “본쉬는 어디 다른 길루 오나?” “산에서 내려오는 길목을 지킨다구 뒤에
남아 있소.” “그럼 자네하구 강찰방하구 둘이 동네 앞과 서쪽 산골길을 노놔
서 지키두룩 하게.” “강찰방더러 동네앞을 지키라구 하구 나는 서쪽 산골길을
가서 지키겠소.” “그건 자네 생각대루 하게.” “그럼 군사 여남은 명만 나를
주시우.” “자네가 여남은만 데리구 갈 작정인가?” “여남은이면 넉넉하우.”
정수익이 이흠례에게 말하고 사수, 살수 섞어 이십명을 뽑아서 연천령을 주었다.
연천령이 강려에게 와서 마산리 동네와 서쪽 산골길을 나눠 지키는데 자기가
서쪽 산골길을 맡겠다고 말한 뒤 “도둑놈들이 지금 서쪽으루 도망한 모양이니
까 내가 빨리 가야 할 텐데 내 말이 굽이 상해서 걸음을 잘 못하우. 강찰방 말
을 좀 바꿔 탑시다.” 하고 청하였다. 강려의 말은 공골말인데 금교역말 역마 중
의 제일 좋은 말이었다. 강려가 말을 잠시라도 내놓기가 싫든지 허락을 선선히
하지는 아니하나, 마침내 바꿔 주어서 연천령은 강려의 공골말을 타고 봉산 군
사 이십 명을 몰고 마산리 뒷산에서 자모산성 있는 큰산으로 건너가는 산골길을
지키려고 풍우같이 달려왔다.
연천령이 마산리 동네로 내려와서 오 리 넘는 길을 돌아오는 동안에 꺽정이패
는 상봉에서 서남간으로 과즉 이 마장 가량밖에 안되는 서쪽 산 끝에를 겨우 나
왔었다. 평지길을 오는 것이 길없는 산속으로 나오는 것과 다를뿐더러 연천령이
닫는 말을 채질하여 군사들이 줄달음을 쳐도 뒤를 잘 따르지 못하도록 빨리 달
려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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