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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完, 48)

카지모도 2023. 12. 25.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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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말을 못하는 것이냐? 이 철딱서니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천하에 쓰잘 데

없는 놈 같으니라고, 네 이놈, 네가 대체 중정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집구

석이 멸문하여 성이 없어지고 문짝에 대못을 치게 생긴 이 마당에, 기껏 네가

하는 일이, 소위 종가의 종손이라는 놈이, 애비는 피가 바트고 뼈가 마르는 마당

에 떠억 버티고 앉아서 허는 말이, 뭐가 어쩌고 어째? 음악을 공부하러 일본으

로 가야겄습니다? 허허, 집구석이 망헐라면 대들보가 먼저 내려앉는다더니, 일본

놈 창씨개명 나무랄 거 하나도 없구나아, 하나도 없어, 아니 내 집구석에서 내

자식놈이 먼저 항허느라고, 제가 자청해서 풍각쟁이가 되겠다니, 성시가 있으면

무얼 허며 가문이 있으면 무얼 헐 것이냐? 아이고, 아주 너한테는 잘되어 버렸

구나, 으응? 잘되어 버렸어. 너 같은 놈한테 물려주자고 할머님이 한평생을 그렇

게 노심초사 허시고, 너 같은 놈을 자식이라고 믿고, 너 같은 놈을 자식이라고...

."

이기채의 말이 뚝 끓어진다. 강모가 순간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숙인 고

개를 들었다. 이기채의 모가 선 눈빛이 벌겋다. 그는 외침을 두 손으로 움켜진

채 강모를 노려보았다.

"아버지."

"네 이노옴. 네 놈이 감히 누구보고 지금 애비라고 허는 게야? 네가 내 자식이

라면 어찌 이런 짓을 헐 수가 있단 말이냐. 감히 네가 누구 앞에다가 이 따위

것을."

채 말을 맺지 못하는 이기채가 차 오르는 숨을 내뱉기라도 할 듯이 몸을 일으

키다 말고, 움켜쥐고 있던 커다란 의침을 바이올린 면상에다 여지없이 동댕이쳐

집어 던진다. 의침은 팽팽한 바이올린 줄에 부딪쳐 공중으로 튀어 오른다. 바이

올린 줄이 비명을 지르며 울린다. 기표가 이기채의 손을 잡으려 하는데 이기채

는 벌떡 일어서 버린다. 그의 노기가 쩌엉, 소리를 내는 같았는데, 이미 바이올

린은 그의 손에 잡혀 허공에서 한 바퀴 맴을 돌아, 방바닥에 후려쳐지고 있었다.

바이올린의 몸통이 한순간에 부러지면서 팽팽하던 네 가닥 줄이 힘없이 늘어져

버린다. 강모의 얼굴은 흙빛으로 질려 부르르 떨린다. 그 바람에 귀밑의 궤털이

허옇게 일어선다.

"천하에 몹쓸 놈, 썩 나가라. 이 방에서 썩 나가, 너 같은 놈은 자식도 아니다.

꼴도 보기 싫다."

이기채가 버선발로 방바닥을 구른다. 강모는 얼어붙은 듯 움쩍도 못한다. 무릎

위에 놓인 강모의 두 주먹이 오그라진다.

"왜 그러고 앉어 있어? 꼴도 보기 싫다는데, 아주 집구석이 제대로 망허는구

나, 가지가지로, 제대로 망해. 며느리라 허는 것은 손만 컸지 침선 하나 제대로

헐 줄을 아나, 남편의 마음을 잡을 줄 아나, 자식이라 허는 것은 나이 열아홉을

먹도록 사람 구실을 헐 줄을 아나... . 내가 천년을 살겄느냐, 만년을 살겄느냐,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어린아이 티를 못 벗고 매사에 천방지축이냐. 나 죽고

나면 누가 어른 노릇을 챙겨서 헐 것인가. 그냥 앉아서 그대로 망헐 것이다. 그

냥 앉어서. 기왕에 가운이 기울어져 망허는 집안이라면 기다릴 거 무에 있어. 서

둘러서 망해 버려야지. 그럼 일찌감치 속이나 편허지. 대체 언제부터 집안이 이

꼴로 각동 삼동으로 찢어져서 가닥을 추릴 수가 없게 됐단 말이냐. 대관절 언제

부터 이러는 게야."

이기채는 방 가운데 선 채로 노기와 탄식을 가누지 못한다. 기표가 강모에게

손짓으로 바깥쪽을 가리킨다. 나가라는 시늉이다. 강모는 망연하게 앉아 부러진

바이올린 패어나간 장판 자리, 그리고 아까 바이올린을 내던지는 순간, 그 몸통

에 맞아 흩어진 담배통과 타구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반은 넋이 나간 사람 같

다.

"그다지도 지각이 없어서야 어디 그걸 사람이라고 허겠느냐. 내가 네 나이 대

는 집안 살림이 문제가 아니라 종중 살림까지도 혼자서 떠맡다시피 했었다. 그

래 네 나이가 그게 적은 나이 같아서, 나이 티를 내고 있는 게야? 어엉?"

강모는 망연히 앉아만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나절의 햇빛 속에 효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이 떠오르자 별안간 강모는 가슴을 깨물린 듯한 통증

을 느꼈다. 마치 이빨 하나가 가슴에 박힌 것 같은 얼얼하고도 깊은 아픔이었다.

"어서 나가거라. 큰방 할머님도 뵈어야지. 사랑이 소란하면 공연히 근심하신다.

어서 일어나."

기표는 애써 목소리를 평온하게 하며 강모를 일깨워 부추긴다. 강모가 마지못

한 듯 자리에서 일어서자

"안서방."

기표가 바깥에 대고 안서방을 부른다.

"좀 들어오게."

아마 방을 치우라는 말일 것이다. 강모는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오는 안서방과

엇갈려 마당으로 내려서서, 안채로는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멍하니 마당 귀

퉁이의 꽃밭을 바라본다. 꽃밭에도 여름은 무성하였다. 자라나는 것들이 더욱 뻗

어가는 자라나고 있는 여름 꽃밭에는 햇빛이 눅진하게 녹아 내리고 있다. 저마

다 빛깔을 내뿜으며 피어 있는 꽃송이가 잎사귀들이 녹아 내리는 햇빛을 양껏

빨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 햇빛은 조청처럼 무겁다. 그래서 꽃잎과 잎사귀에는

먼지가 부옇게 앉은 것도 같다. 어찌 보면 식물들이 햇빛을 빨아들이는 것이 아

니라, 햇빛이 끈적이처럼 꽃잎과 잎사귀에 엉겨서 소리 없이 그 진을 빨아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꽃잎의 입술과 대궁이 허옇게 말라들어 미농지로 만든 조화같

이 변한다. ... 나는 한낱 그림자로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걸어가는 그림자에 불

과다고 절감한다. ... 내가 무슨 넋이 있으며, 몸이 있으랴. 또 그런 것들이 있은

들 무엇에 쓰겠는가, 무엇에... . 강모는 가슴 밑바닥이 갈라지는 것 같아 숨을

참는다. 갈라터진 사이에 빠짓이 피가 배어나며 쓰라리다. ... 강실아, 기어이 그

생각을 하고 만다. 아까, 동구에서부터 참아 온 생각이다. 아니, 그것이 어찌 동

구에서부터만 참아 온 것이었을까. 아까 오류골 작은집의 사립문을 지나면서도,

일부러 살구나무 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그때 무너지게 검

푸른 살구나무의 녹음이 강모의 얼굴에 푸른 그늘을 드리워 주었으나, 강모는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었다. ... 네가 없는데, 이제 나를 무엇에다 쓰겠느냐... .

접시꽃 촉규화, 붉은 작약, 흰 작약, 황적색 꽃잎에 자흑점이 뿌려진 원추리들.

그 현란한 꽃밭 그늘에 꽈리가 몇 그루 모여서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것들은

등롱 같은 열매를 조롱조롱 푸르게 달고 있다. 지금은 그 꽈리 초롱에 물이 돌

아 초록으로 열려 있지만, 저것은 가을이 되면 익으면서 주홍으로 투명해진다.

그것이 영락없이 등롱의 모양이어서 이름도 등롱초라고 불리던가.

...강실아.

강모는 그만 가슴이 사무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말없이 등불을 잡아 주던

강실이의 모습이 꽈리밭에 그대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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