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채는 검은 가방 쪽으로는 힐끗 한 번 눈을 주다가 말고 강모에게 다그치
듯 묻는다. 말끝이 툭 떨어지며 잘리는 것이 몹시 못마땅한 기색이다. 그의 기색
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이마의 주름과 좁혀진 미간에 패인 깊은 주름은 날이
서 있었다. 강모는 그런 이기채에게 얼른 할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
강모의 바랜 듯한 낯빛이 더욱 바래는 것 같더니
"저... ."
하고 말을 꺼내려다가 멈추어 버린다. 이기채는 채근하는 대신 강모를 쏘아본
다. 그 눈길에 얼핏 붉은 핏발이 돋는다. 번뜩 화광이 비치는 것 같다. 그는 금
방 터지려는 무엇인가를 지그시 눌러 참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어디 하는 양
을 좀 보자, 하는 심산인지도 모른다.
"아버지한테 좀 뵈드리려고요."
강모는 이기채 앞쪽으로 몸을 돌려 앉으며 가방의 고리를 벗긴다. 젊은 사람
의 손등답지 않게 가방을 여는 강모의 손등은 말라 있었다. 그 마른 손이 떨리
는 품으로 보아, 강모는 이기채의 시선과 침묵에 잔뜩 짓눌려 주눅이 든데다가
지금 긴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또한 그의 크고 둥근 눈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기채가 그렇게 입을 꽉 다물고 있으니, 기표도 따라서 얼
굴빛이 무겁다. 이윽고 가방 고리가 벗겨지면서 뚜껑이 젖혀지자, 그 속에 누워
있는 바이올린이 날렵하고 작은 몸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었다. 부드럽고 윤
택이 나는 다갈색 몸통의 잘록한 허리에는 단단한 단풍나무로 된 줄받침이 야무
지게 버티고 서서, 팽팽한 네 가닥의 줄을 받치고 있다. 그 팽팽함은 손가락으로
퉁기지 않아도 저절로 팅, 소리가 날 것 같다. 그것은 이기채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신경가닥과 힘줄들은 당길 대로 당겨진 활시위처럼 푸르르 떨린다.
"강모가 동경에 있는 음악학교를 가고 싶다고 허는데... ."
이기채는 청암부인이 한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연전에, 며느리가 신행 올
무렵, 대실로 떠난 강모를 두고 청암부인이 이기채에게 그런 의논의 말을 꺼냈
었다.
"동경에 보내 주지 않으면 저도 대실에 안 간다고 정색을 허길래, 내, 애비와
의논헌다고 그랬다. 동경행이 쉽게 결정될 일이 아니나, 내 마음에 인륜의 일이
급하여 그쯤 대답해 두었으니 네가 잘 타이르거라. 제 딴에는 혹시 동경 가 있
는 강호를 생각하고, 거기 같이 있어 볼까 하는지도 모르지. 강호하고 강모는 처
지가 다르니 네가 알아듣게 잘 타일러 보아."
"타이르기는 무얼 타이릅니까? 도대체 그놈은 제 분수도 모르고 앞가림도 할
줄 모르는 놈이올시다. 물렁하기가 묵나물 한가지니,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이
집안을 이끌어가고, 장차는 종손의 도리를 다할 것인지, 지금부터도 앞길이 캄캄
합니다. 솔직한 말씀이 제가 강모란 놈 때문에 요즈음 통 잠을 못 이룹니다."
잠을 못 이룬 것이 어찌 그때뿐이랴. 날이 갈수록 그만큼 더 깊은 불면의 늪
으로 잠겨들어가, 발길은 끝도 없는 허방을 헤매고, 머리 위로는 짓눌려 오는 진
흙덩이의 무게, 그리고 문득 자다 깨면 덮쳐 오던 그 암담한 어둠. 그때마다 이
기채는 재떨이를 끌어당겼다. 어둠이 바닷물처럼 집안을 침몰시키고 있는 한밤
중, 큰사랑에서 울리는 마른 기침 소리와 재떨이 두드리는 새된 놋쇠 소리는, 마
치 어둠을 깨뜨리고 쫓아내려는 경쇠 소리 같았다. 그 소리에 누렁이가 펀 듯
귀를 세우며 짖기 시작하면 위아랫집, 건넛집의 개들이 꼬리를 이어 짖어댄다.
그러다가 온 마을의 개들이 짖는다.
"율촌양반 오늘 밤에도 또 못 주무시는가 부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돌아누우며 그렇게 잠결에 중얼거리곤 하였다. 그러나
개 짖는 것도 잠깐이다. 누렁이가 싱겁게 크엉, 하면서 소리를 멈추면, 이윽고
멀리서 따라 짖던 것들까지도 잠잠해지고, 마을과 집 안은 더 깊은 정적과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가 버린다. 무너질 듯 시커먼 산자락들이 검은 파도처럼 집안을
한 입에 삼켜 버릴 것 같은 그런 밤, 이기채는 홀로 우두커니 앉아 가슴이 패어
나가는 허전함을 담배로 매우려 한다. 그때마다 다친 곳처럼 욱신거리면서 떠오
르는 얼굴은 외아들 강모였다. 그러면 이기채는 가슴이 마쳐 숨을 들이쉬어도
시리고 내리쉬어도 답답하였다. 가슴 밑바닥에 무엇이 박히는 것처럼 아프고, 한
숨을 쉬면 공이처럼 걸려 이기채는 때때로 담이 걸린 듯도 했다. 그런 강모가
눈앞에 앉아 검은 통을 불쑥 내밀어 열어 보이면서,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하고
있다. 강모도 심약한 눈빛이 불안하기는 하였지만, 단단히 벼르어 온 말을 하려
는 모양이었다. 이기채는 일부러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강모를 쏘아보고만 있
다. 바이올린의 네 가닥 줄과 이기채의 날카로운 침묵이 서로 칼날같이 맞부딧
치면서 방안을 터질 듯이 숨막히게 한다. 이기채와 강모, 그리고 기태는 서로 이
침묵의 줄다리기에서 삼각형으로 팽팽하게 맞서며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가서 음악 공부를 좀 하고 싶습니다."
드디어 강모가 쫓기는 사람처럼 단숨에 뱉어내듯 말해 버린다. 순간 이기채의
눈이 번쩍한다. 그리고는 이기채와 감모의 사이에 부웅 소리가 날 만큼 공간이
팽창한다.
"그래서?"
역시 말끝을 내리누르며 잘라 버린 질문이다. 강모가 말을 잇지 못한다. 이미
이기채의 노여움이 목까지 차 올랐다는 것을 감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어?"
"... ."
"네가 이 앵금을 쳐들고 댕기면서 풍각쟁이 노릇을 허겠다, 이 말이냐?"
"... 아버지."
"아니면 남사당이 되겠다아, 이 말이냐?"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그럼, 그러면 무엇이 되겠다는 것이냐?"
목 안에 짓눌려 삼킨 목소리가 조금씩 터져 나오면서 점점 언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이기채의 성품으로 미루어 아직은 지그시 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풍각쟁이와 음악가는 다릅니다. 저는 음악을 공부하려는 것입니다. 학교를 졸
업하고 나면 동경에 있는 음악학교에 들어가서... ."
"왜? 허구 많은 공부 중에 하필이면 네가 음악인가 허는 풍각을 공부하려는,
무슨 뜻이 있을 게 아니냐? 왜 그러는 거냐?"
강모는 역시 대답을 못한다.
... 이곳을 떠나고 싶어서입니다. 제발 그럴 수만 있다면 굳이 음악이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측량 기사가 되어도 좋습니다. 구실이야 무엇이 되었든 저는 이곳을
떠나고 싶습니다. 도주하고 싶어요. 저는 이 집안이 무겁고 무섭습니다. 아무도
저를 때리려는 사람 없고, 아무도 저를 해치려는 사람 없건만 저는 마치 가위눌린
것처럼 답답하고,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집채덩이 같은
불안을 속에다 삼키고 있으니 무엇에도 마음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벗
어나게 해 주십시오.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고, 속하지 않고, 훨훨 좀 돌아다니고
싶습니다. 할머니로부터도, 아버지로부터도, 아아, 그리고... .
"네, 이노옴, 왜 말을 못하느냐?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느냐? 말을 해
라."
드디어 이기채가 상체를 곧추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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