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베틀가
인월댁은 드디어 북을 놓는다. 그리고 허리를 편다. 두두둑, 허리에서 잔뼈 부
서지는 소리가 나며 갑자기 전신에 힘이 빠진다. 그네는, 오른손 주먹으로 왼쪽
어깨를 힘없이 몇 번 두드려 보다가 허리를 받치고 있는 부테의 끈을 말코에서
벗긴다. 뒷목도 뻣뻣하고 다리도 나무토막처럼 굳어져서 이미 감각이 없는데, 마
치 그네가 베틀에서 내려앉기를 재촉이라도 하려는 듯 닭이 홰를 친다. 벌써 세
홰째 우는 소리가 새벽을 흔든다. 용두머리 위에 놓인 바늘귀만한 등잔불이 닭
이 홰치는 소리에 놀라 까무러치더니, 이윽고 다시 빛을 찾는다. 방바닥으로 내려
앉은 인월댁은 그제서야 허릿골이 빠지는 것처럼 저려와 그대로 무너지듯이 드
러누워 버렸다. 불기 없는 바닥이라 등이 서늘하다. 비록 여름이지만, 늘 이렇게
새벽녘이 되면 찬 기운이 돌아 몸이 떨리는 것을 느낀다. (한여름에도 이다지 속
이 치운 걸 보니. 이제 사지 육천 마디마디 시린 바람이 들어차는가 부다.) 그것
은 이 방이 북향 뒷방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한낮에도 볕이 들지 않는 까닭에
일년 열두 달 햇빛을 쐬지 못한 냉기가 벽 귀퉁이에 고여 있는 셈이었다. 거기
다가 집이라고 해야 부엌 한 칸과 창호지만한 안방, 그리고 베틀이 있는 뒷방뿐
이었지만 하루 한나절도 손에서 북을 놓지 않았으니, 문득 생각하면 방안에 고
인 냉기가 몸 속으로 스며들어 살이 식어 내리는 것도 같았다. 그네는 희미한
등잔불 아래 비치는 앉칭널을 바라본다. (내가 반평생을 저기 앉아서 보냈구나.)
그네가 금방 벗어 놓은 부테가 앉칭널 위에 얹혀 있는 것이 마치 무슨 허물 같
다. 인월댁은 무심코 창문을 바라본다. 북향으로 난 창문은 아직도 캄캄하다. 지
금쯤은 한밤의 어둠에서 깨어난 새벽이 푸르스름하게 공기 속으로 풀려들고 있
겠지만, 북향 뒷방 길쌈하는 이 방에는 빛이 새어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다만
제풀에 흔들리다가 잠잠히 빛을 밝히고 그러다가 금방 꺼질 듯이 잦아드는 미영
씨 기름 등잔 하나만이, 방안의 묵은 어둠을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베틀에 앉
은 채 밤을 새웠으나, 이렇게 방바닥으로 내려와 누워도 몸만 물먹은 솜처럼 무
거울 뿐, 새벽잠이나마 들어 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그물이 말러서 밑바닥을 뒤집고 있당 거이요?"
담장 밖에서 옹구네의 목소리가 찰지게 들린다. 그 소리를 신호로 사람들의 발
자국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다. 양철 부딪치는 소리며 물지게 삐그덕거
리는 소리, 부산하게 고샅을 지나가는 바쁜 걸음 소리들은 원뜸으로 넘어가는
것이 분명하였다.
"아이고매, 그렁게 후딱 가서 미꾸라지 건져 먹는 것은 이 흉년에 괴기국 한 그
륵이 어디냐마는, 일은 참말로 일어났네잉."
저것은 공배네의 목소리이다.
"시상 돌아가는 꼬라지를 조께 보시오. 아, 물 밑바닥만 뒤집히겄소? 내가 발바
닥 붙이고 섰는 이 땅뎅이도 언지 홀까닥 뒤집힐랑가 모르는 판인디, 누가 아
요? 인자 거꾸로 서서 대그빡으로 땅을 짚고 손바닥으로 걸어댕기는 날이 올랑
가?"
거멍굴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첫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옹배기나 양
철 대야, 물동이, 물통을 하나씩 옆구리에다 끼고 산 밑에 저수지로 달려가고 있
는 것이다. 청호라고 불리는 저수지의 넘치던 물이 어느 날부터인가 마르기 시
작하더니, 기어이 물 밑바닥이 뒤집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수지의 둘레가 사방
오 리라고 소문이 나 있는 청호는 지난번만 하여도, 조개바위의 등허리가 거뭇
비치다가 잠기다가 할 만큼 줄었었다. 청암부인이 웅덩이만 하던 것을 그렇게
넓고 깊게 파 놓은 뒤에는, 웬만한 가뭄에도 수면이 파랗게 찰랑거리며 물비늘
을 일으키던 청호는 날마다 내리쪼이는 뙤약볕에 드디어 견디어 내지를 못하였
다. 청호가 그럴 정도였으니 동네 우물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걸핏하면 황토물을 토하며 뒤집히던 우물물, 샘물들은 이제는 아예 두레박을 두
손에 받치고 섰다가, 한 바가지가 채 고이기도 전에 곤두박질을 치며 거꾸로 머
리를 박고 퍼내야 했다. 그것도 부지런한 사람이 먼저 차지를 하기 때문에, 한
발만 늦으면 그날 하루 물 구경을 못하고 마는 일이 빈번하였다.
"하이고오. 일월성신이 굽어살피사 비나 한 줄금 쏟아져 줍소사."
밑바닥이 마르는 우물가에 물통과 동이를 한 줄로 늘어놓고 관솔불을 밝힌 채
꼬박 밤을 새우며 하늘을 우러러 보건만, 하루살이 모기떼만 극성스럽게 달겨
붙을 뿐, 별빛은 흐려질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은 것이 벌써 근 한 달이 넘어가
고 있었다. 우물과 샘물이 그러한데 논바닥은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논이란 논은
모조리 거북이 등짝처럼 쩌억쩌억 갈라지고, 자라나던 벼포기들은 꺼칠한 모가
지를 허옇게 들고 꼬딱 선채로 말라 비틀어졌다. 사람들이 먹을 물도 이 지경이
된데다가 논의 물꼬가 마른 것은 어느 날짜였는지 짐작조차도 할 수가 없으니.
"웬수엣녀르 시상. 기양 논바닥에 가서 팍 어푸러져 쌧바닥을 박고 죽어 부리제
이 꼴 저 꼴 못 보갔네. 주뎅이에 침도 다 말러 터져서 어디다 뱉어 볼 수도 없
응게. 이러고 앉아서 꼬실라져 죽어야제."하고 옹구네가 두 다리를 퍼벌리고 앉
아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디, 이런 가뭄 속에도 신선맹이로 물 안 먹고 사는 양반은 무슨 재주까잉?
이슬만 따 먹능가아?"
옹구네는 허벅지까지 걷어 올린 삼베 두루치를 두 손으로 말아 쥐고 평순네에게
말을 건넨다. 먹을 물은 없어도 그네의 살에는 물이 올라 탱탱하다.
"또 먼 소리가 허고 자퍼서 그렁고? 주뎅이가 근지럽제, 시방, 독자갈 아닌 담에
야 누가 물을 안 먹고 산다고 그리여?"
"누구는 누구? 인월마님 말이제. 요새 같은 때 언제 한 번 물 질러 나오도 안허
고 얼굴도 안 뵈잉게 허는 말 아니여?"
"원뜸에서 안서방네가 날마둥 한 동우썩 이어다 주능갑대."
"하이고오, 누구는 좋겄다아, 이런 년의 팔자는 내 손발 오그라지먼 그대로 앉은
뱅이맹이가 되야 갖꼬 디져 불고 말 거인디, 어뜬 사람 팔짜 좋아 그런 시상을
사능고오."
옹구네는 인월댁의 초가 쪽을 향하여 눈까지 흘겨 보인다. 도톰한 눈두덩 꽁지
에 빈정거림이 묻어난다. 평순네는 으레 그런 옹구네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응대를 한다면 핀잔을 주게 되었다.
"무신 노무 팔짜가 어디를 봉게로 그렇게도 좋당가? 그 양반 사정을 몰라서 그
런 소리 허능갑네."
"사정을 앙게 더 그러제잉. 나도 인자 요 다음 시상으 날 적으는 기연히 양반으
로 나야겄다. 두 손발 펜안히 내놓고 살어도, 이고 지고 갖다 바치는 것만 받어
먹는 시상 한 번 살어 보고 죽었으면 원이 없겄네."
"인월마님이 머 두 손발 놓고 살간디? 이날 펭상 이십 년을 단 한 가지 아무 낙
도 없이 베틀에서 내리오들 못하고, 여치 베쨍이맹이로 베만 짜다 청춘이 다 가
신 양반인디. 무신 부러울 팔짜가 없어 그 양반 팔짜를 쪼사쌓능고...? 무단히."
"하여튼간에 이 복더우 가문 날에 물걱정만 않는 팔짜라도 나는 부러뵈능 것을
어쩔 거이여? 그나저나 저수지 무도 인자 바닥이 뵌다데잉. 조개바우가 집채뎅
이맹이로 시커멓게 솟아났다든디."
이런저런 소리들을 주고받으며 우물가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며 넋을 놓고 있
던 거멍굴의 아낙네들은, 마침 춘복이가 어둠 속에서, 삼태기에 펄떡펄떡하는 붕
어와 가물치를 무겁게 들고 오는 것을 어젯밤 보았던 것이다.
"춘복아. 너 그거 머이냐?"
공배네가 고개를 꼬아올리며 물었다. 그 바람에 아낙들이 웅긋중긋 일어서며 삼
태기를 넘겨다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함박만큼 벌리고 다물지를 못했다.
"어디서 난 거이여?"
옹구네의 검은 눈빛이 번쩍, 관솔 불빛에 빛났다.
"방죽으서 건졌네."
"방죽? 청호 말이여?"
평순네가 놀란다.
"거그말고 방죽이 또 있간디요?"
"어쩔라고 거그 치를 이렇게 겁도 없이 건져 온다야? 청암마님 아시먼 큰 베락
날라고, 왜 이런 일을 했당가아..."
평순네의 얼굴에 근심과 두려움이 지나간다.
"난리는 먼 놈의 난리가 난다요? 사램이 날이 날마동 밀지울만 먹고 똥구녁이
찢어지는디다가 날까지 가물어농게 오장육부가 다 말러 비틀어지는 판국에, 임
자 없는 괴기 조께 건져다 먹는다는 누가 무신 소리를 헐 거이여?"
춘복이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사람들은 입에 군침이 돈다.
"임자는 왜 임자가 없당가? 청암마님이 임자제잉."
공배네가 얼른 평순네의 말을 거든다. 그러면서, 그것보다 훨씬 더 걱정스러운
일이라는 듯, "춘복아, 청호으 물이 참말로 그렇게 다 말러 부렀냐? 삼태기로 괴
기를 건지게?"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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