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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45)

카지모도 2023. 12. 22.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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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노무 외양깐, 팍 뿌수거 부러라. 체다뵈기도 싫다. 하이고오, 웬수엣 노무

시사앙. 두 눈꾸녁을 이렇게 버언히 뜨고 자빠져서 황소가 끄집혀 가는 것을 체

다만 보고 있었이니... ."

그 남정네의 안사람이 짚북더미 같은 머리에서 꾀죄죄한 수건을 벗겨 내리며

따라서 한숨 쉰다.

"글 안허면 어쩔 거이요? 생우 공출이 머 어지 오널 일이간디? 넘 다 당헐 때

는 넘 일인가 싶드니마는 참말로 발 등에 베락 떨어졌소. 인자 이 동네에는 소

새끼라고는 씨알머리도 없응게, 농사 질라면 재 너머로 황소 빌리로 가야겄구만

요."

"재 너머에는 무신 소가 남어 있다간디? 거그도 다 진작에 씨가 말러부린 지

오래여... . 이러다가는 조선 팔도에 송아치새끼 씨종자가 멜종을 허고 말 거이

네."

"아, 재 너머에 왜 황소가 없당가? 이런 난리 속으서도 황소 암소 짝맞춰서 키

우는 집이 있는디."

그것은 청암부인댁을 이름이었다. 그 말소리 속에는 미처 다 토하지 못한 억

하심정이 꼿꼿하게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그렁게 어쩔 거이여? 임자가 쫓아가서 한 마리 끄집고 올랑가?"

남정네가 담뱃대를 토방에 탁, 탁, 치며 비꼰다.

"폭폭헝게 안 그러요오, 폭폭헝게. 누구는 머 배가 아퍼서 매급시 해꼬지 허는

말인 중 아능게비. 아, 농사꾼이 소가 없어농게 곰배팔이 도치질 허능 거이나 똑

같제잉."

농부의 발등은 단순히 햇빛에 그을러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못 먹고 속만 끓

인 탓인지, 묵은 소나무 뿌리가 억세게 솟구쳐 오른 것 같은 힘줄이 거멓게 돋

아 있었다.

"그 소는 그렇게 다 잡어다가 대관절 머엇에다 쓴당가요?"

"내가 알어? 왜놈 군대 멕일라고 괴기국 낄이고, 까죽은 벳게서 그놈덜 구둔가

장환가 맨들어 신는다고 허대."

"천벌을 받을 놈들. 차라리 산 사람 살가죽을 벳게다가 신짝을 삼어신고, 이

말러붙은 살뎅이를 비어서 처묵제. 그러먼 이 한 많은 노무 시상, 이 꼴 저 꼴

안 보고 저승길이나 어서 가제."

두 내외는 넋을 흘린 듯 앉아서, 밥때가 되었는지 지났는지를 모르고 하염없

는 탄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자식같이 애중한 황소가 뒷발굽으

로 마당을 차며 안 가려고 안 가려고 버티면서 움메에에, 끌려가던 그 모습이

숨넘어가게 떠올랐다. 아아, 그 황소 한 마리의 목숨이 어떤 것이었던가. 지지리

못나서 핏속에다 한숨만 절여 넣던 아부지가 한평생 소원하던 황소, 그 아부지

죽고 나서 송아지 한 마리 강아지만 헌 것 마련하고는 죽어도 좋을 만큼 뿌듯하

여 돌아앉어 코를 풀었었지.

... 그 황소가 집채만큼이나 커 주었는데, 바로 그 황소가... .

돌이켜 보면 1920년 봄부터 반출되기 시작한 생우는 1940년 올 봄에 이르러

물경 사십여 만 마리에 달하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농사

철이 닥친 어떤 농가에서는, 소 대신에 사람이 가래질을 하였다.

"형님, 일본이 조선에서 공출해 가는 일을 위하여 상비해 둔 기관원이 몇인 줄

아십니까? 삼십만여 명이올시다. 거기다가 애국반이 삼십 오만여나 됩니다. 그러

고 십삼 개의 병사구 사령부 및 그 소속원이 있어요. 그뿐인 줄 아십니까? 헌병,

밀정, 순사가 개미같이 깔려 있지요. 거미줄 같은 총독부 행정력이 있습니다. 이

런 것을 대상으로 싸워 본다는 건 계란으로 바우치기올시다. 제 몸만 깨져서 박

살이 나지 바우가 움쩍이나 헐 것 같으세요? 어림없는 일이지요. 이럴 때 타협

을 해야 허는 거예요, 타협을."

과연 그때 기표는 전주로 나가 술자리를 여러 차례 가진 후, 그 '타협'을 통하

여 교묘하게 일을 성사시키고 호기롭게 돌아왔었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왕골, 마초, 갈대, 가마니, 멍석, 새끼, 지푸라기까지 긁어 가고 걷어 가고, 헌 쇠,

깡통, 파지, 누더기, 빈 병마저도 깡그리 쓸어 가는데

"걸레, 잡초도 공출한다."

는 영이 떨어지는 판국이었으니, 기표가 아니었더라면, 종가에서도 어떤 난리

를 겪을 것인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형님, 다른 문중은 우리만 못해서 창씨개명들을 했겠습니까? 다 문벌 있고 가

문 좋은 집안들입니다. 자진해서 했든지 마지못해 했든지 결국은 허고 말었습니

다. 제가 형님이라면 진즉에 했겠지만, 이만큼 허셨으면 형님도 도리는 다허신

겁니다. 아, 지금 전국 인구의 팔할이 창씨를 했는데, 자그만치 천육백만여 명이

라고요. 그렇게 대다수가 이 일을 행헐 적에는 다 그만헌 명분이 있기 때문 아

니겠습니까아."

나머지 이할도 있지 않으냐? 아직까지도 창씨를 안헌 사람도 사백여 만 명이

그대로 남어 있지 않어?"

"모르면 몰라도, 그 사람들은 기어이 시키고 말 것입니다. 일본 제국이 마음

먹어서 못헐 일이 있습니까? 시간 문제지요."

"요즘 같으면 정말로 괴로워서... . 내가 차라리 지게질을 할망정 종손으로 되

지 않었더라면 싶은 마음조차 간절해."

"형님답지 않으신 생각이지오. 기왕에 국운이 비색하여 나라가 망했고, 시운

이 뜻과 같지 않은 것을 형님 탓으로 돌릴 사람 아무도 없을 겝니다."

이기채는 놋쇠 재떨이를 끌어당긴다.

"이제 곧 창씨개명이 문제가 아닌 날이 닥칠 겁니다. 그때는 사느냐 죽느냐,

이 문제가 턱에 걸려서 아무것도 뵈지 않을 껄요. 아 왜 거년 칠월에 국가 총동

원법 제4조라고 허면서, 국민징용령이 안 떨어졌습니까? 일본 본토는 그렇다 치

고, 조선, 대만, 사할린, 남양 군도에까지 그 징용령이 시행되고 있는 판에, 징병

령인들 떨어지지 않겄습니까? 지금 지원병 제도는 장차 징병 문제를 경정하려는

시험으로 해 보는 것이라고 허드구만요."

이기채는 가슴이 까닭없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리고 순간 전신에 찬 기운이

끼쳐 자기도 모르게 소름을 털어냈다. 이기채의 가슴 복판을 훑고 지나가는 서

늘함은 쉽게 진정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무겁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것

은 재작년에 육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었다. 육군성, 척무

성 및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입안, 검토된 그 안은 1938년 2월 2일, 칙령 제95호

로 공포되고, 동년 4월 3일자로 시행되었었다. 전문 5조 및 부칙으로써 구성된

지원병령 제1조에는

"연령 십칠 세 이상의 제국 신민인 남자로서 육군 병역에 복할 자는 육군 대

신의 정한 바에 의하여 전형한 다음, 이를 현역 또는 제일 보충역에 편입할 수

있다."

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는 조선민사령의 적용을 받는 한국인 청장년들을, 현역

또는 제일 보충역에 편입시킬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 제도에 대하여 남차랑 총

독은

"반도 동포의 충성이 강하게 인천을 움직인 결과이며, 조선 통치상 명확한 일

선을 긋는 획기적인 일이다."

고 말했으며, 조선군 사령관 소기국소는

"일시동인의 성려에 바탕을 둔 것이요, 내선일체적 성업을 향하여 가장 강력한

일보를 내어디디는 것."

이라고 기꺼워하였다. 거기다가 윤덕영 같은 적극 친일 추종자는 이 육군특별

지원병령에 쌍수를 들어 환영 지지하면서

"이로써 반도 민중들도 전적으로 일본 국민이 되는 것이니, 한층 더 각오를 새

롭게 해야 한다."

고 기염을 토하였다. 그러나 이기채는 그때 아까처럼 가슴이 내려앉고, 소름이

찬 손으로 온몸을 훑으며 지나갔었다. 강모가 만 십륙 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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