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무심한 어미, 이제야 두어 자 적는다
여아봉견 거 이십일일은 날도 청명하엿다. 매안역을 출발하야 순천서 일숙하
고 이십이일 오전 십시 득량착 기차로 무사히 집에 도라왓다. 그런데 너의 모친
과 남욱이는 무탈한데 용원이가 이십일부터 알키 시작하엿다는데 그 형상이 대
단 안탁갑게 되엿다. 곳 의사의게 왕진을 청하여 진찰하니 신열이 사삽오도이며
급성폐렴에 늑막염이 겸하였다 한다. 겁이 안 날 수 업서 백방으로 치료하여 십
일일 만에 어제부터 게우 사십도가 넘든 열도 나리고 차차 미음도 마시고 잠도
자기 시작한다. 한참 동안은 대소가가 소동되고 정신이 수수하엿난데 이제는 안
심이다. 조금이라도 걱정은 하지 말어라. 요사이 너의 시조모주 기력은 엇더하시
냐. 좀 차도가 잇스시냐. 궁금하구나. 요사이 용원이 약하려 노동 의원이 오섯난
데 노환에 조흔 약을 좀 지엇기로 조생원 편에 보낸다. 지극 정성으로 다려 드
려라. 그리고 너의 성질을 잘 아는 바이나 매사 승순하면 탈이 업스리로다. 일기
화창하면 한 번 갈가 한다. 남욱이는 날로 충실하게 자라고 잇스니 걱정 말고
너의 몸을 주의하여라. 일자가 너무 오래되어 네가 답답할가 하여 두어 자 소식
을 전한다. 일후에 너의 모주도 편지할 것이다. 대소 층절이 일안하시길 빌며 이
만 긋치니 너는 속히 소식을 통하여라. - 기묘 음삼월 이일 부서
효원은 아버지 허담의 편지를 손에 들고 글씨를 가만히 만져 본다. 글씨에서 아
버지의 체온이 묻어난다. 가늘고 선명한 주색 붉은 줄이 세로 그어진 편찰지 칸
에 잉크를 찍어 쓴 글씨였으나, 서법과 필체가 여전히 예 같고 역력해, 마치 아
버지의 숨결을 마시는 것만 같다.
일전 조생원 편에 네 소식을 들엇스며 또 너의 수서로 대략 알고 잇섯스나. 네
가 조생원 편 구전으로 용원 병기를 들엇스면 얼마나 놀라 상심하엿슬가. 용원
이는 지난 번 병치레 끝이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이번 음유월 이십일경부터
우연 목이 앞으기 시작하여 낫지 안 터니, 할 수 없이 음칠월 이십일에 광주도
립의원에 입원하여 그날 오후 구시에 수술한 후 인공호흡하여 차차 치료하니 칠
월 이십오일에는 완치되어 이날에 퇴원하여 귀가 하였다. 입원한 지 누 이십일
간에 칠백원의 경비를 내엿스나 의사의 말에 딸 하나 병원에서 어더가지고 간다
고까지 말하엿스니 병세가 엇더하다는 것은 알 수 잇슬 것이다. 병명은 지유데
리(디프테리아)라는 것이엿는데 호흡이 불통되어 못 사는 것인데 수술하기 전
삼십분만 경과하엿스면 곤란하다고 의사로서는 일희일비를 마지안엇섯다. 불행
중 대행인 것은 그 가운데 추석은 집에서 맞은 점이다. 보름달을 갓치 보았다.
그러니 이 앞으로는 안심하고 일신을 보전하여라. 남욱이도 습종으로 불안하나
약치를 하고 잇스니 요사이는 좀 나은 듯하다. 이외에는 별다른 말 없스니 다음
에 자상히 통신하겟다. -음팔월 이십일 부서
추신. 너의 시조모주께서는 여전 그만하시다니 일변 다행이고 일변 근심이다. 이
럴 때일수록 성심을 다하여 손부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바란다.
매안에 거짓말인 듯, 꿈결인 듯, 아버지 허담이 들리어 며칠간 사랑에 유하다 간
것은 작년 봄, 음이월 말이었다. 부녀 상봉이라고는 하나, 허담은 사랑에 머물며
이기채와 함께 이씨 문중 대소가 종족들을 만나면서, 담소로 인사하는 데 거의
모든 일과가 다 지나고 막상 효원과는 마주앉을 겨를조차 제대로 가지지 못하였
다. 그러나 그것이 법도였다. 시가에 어른들 엄존하신데, 저의 친정에서 살붙이
가 왔다 하여 버선발로 뛰어나간다거나, 그 곁에 붙어앉아 떨어질 줄을 모르는
것은 몰풍스럽고 본데 없는 짓이었다. 벙싯거리며 반가움을 참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범상한 낯빛으로 은근히 교감하고 오히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비
켜 서서 친정붙이를 대하며, 시댁에 자신이 잘 적응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드리
는 것이 도리였다. 둘이서 낮은 소리로 속삭이거나, 남모르게 무엇을 주고받으
며, 눈물을 짓는 것은 결코 가격있는 집안의 풍도가 아니었다. 지그시 가슴을 누
르고, 가까운 곳에 와 계시는 밧어버이 훈김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득
차, 일상에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는 위선이 아니라 품위였던 것이다. 그것은 사
돈댁을 방문한 친정 쪽에서도 출가한 여식을 대하여 지켜야 할 은연중의 불문율
이었다. 하지만, 심정도 그러했으랴. 효원은 돌덩어리를 삼키듯, 복받치는 반가움
과 설울을 함께 삼켰다. 늦도록까지 불이 밝혀진 사람에서 두런두런 홍연대소가
터지는 밤. 효원은 이만큼에 서서 남모르게 그 덧문에 번지는 불빛을 바라보며,
어느 그림자가 우리 아버지신고. 헤아려 보았다. 다만, 그렇게. 허담이 떠나는
날, 효원은 큰사랑에 좌정하신 아버지께 마루에서 하직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는
은혜로이 높으시니, 여식은 문외배로 방문 밖에 엎드리어 공례로 큰절을 하는
것이다. 허담은 묵묵히, 수그린 여식의 노란 저고리 등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대문을 나서며 말했다.
"삼가 공경을 다해서 조석으로 어른들 지성껏 모시고, 이서방 잘 섬겨라. 아부지
간다."
효원은 눈물어린 고개를 수굿하였다. 말씀을 잘 알겠다는 표시다. 정거장으로 가
는 먼 길까지 고불고불 한눈에 들어오는 대문간에 서서, 허담은 잠시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 세상에 제일 큰 것은 마음이다. 마음 안에는 담지 못할 것이 없느니."
효원의 고개가 좀더 숙이어졌다.
"항상 부지런하고, 너의 규문의 예에 어긋나지 말아라."
"... 예"
"들어가거라."
"예..."
허담은 시선을 멀리 들어 아물아물한 길 끝 너머를 바라보았다.
"네 어머니한테는, 잘 있더라고 전할 터이니 그리 알고."
효원은 목이 막혀 대답을 못한다. 잘 있지 못합니다. 아버지. 어머니께 차마 여
쭙지는 못하옵지요만, 이 불효여식은 아직까지 음양을 모르고, 부부의 도리를 다
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신랑이 어리어 초립동이 소년이라 그러한가 하옵고,
다음에는 학업이 중하여 객지타관 전주로 유학을 하느라고, 집을 떠나 멀리 있
어 그러하옵고, 혹 어쩌자 집에 들러도 시어르신 뫼시고 사랑에 머무온즉, 여식
은 빈방에 청 등을 홀로 지키고 있사오니, 병자년에 혼인하여 정축에 신행 오고,
무인,기묘 다 지나서 경진년에 이르도록 아직 공규를 면치 못, 하릴없는 세월만
축내고 있습니다. 아무 생산 없는 세월은 쌓여서 무엇에 쓰오리까. 손이 귀한 남
의 집 대종가에 종손부로 들어와서, 책임이 막중한 무릎에 좀이 슬고 먼지만 가
득하니, 슬하의 근심을 어디에 하소하올지. 시조모님 뵈옵기 민망하고 면구스러
워 삿갓을 쓰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머니. 한 여인으로서 이 수모를 어찌 당하
며, 어찌 갚으리잇가. 눈물이 굳어서 돌덩이 되었단 말 들은 일은 없으나, 이 마
음은 돌보다 더 굳어 풀리기가 어려우니. 이 돌로는 또 인생에 무엇을 하오리요.
성벽을 쌓으리잇가.
"자, 이제 들어가거라."
허담이 효원에게 눈빛을 남긴다. 대문간에 저만큼 고샅길로 내려선 이기채가 기
표, 기응과 함께 몇몇 안면들을 대하며, 허담을 배웅하려고 나와 있다. 그만큼까
지 나가 있는 것은 부녀 작별의 말미를 잠시 주고자 하는 배려이다. 이제, 언제
나 다시 뵈올꼬. 근친이나 한 번 간다면 모르지만. 그날이 쉽게 올 것 같지는 않
았다. 효원의 뇌리로 나부산 형님이 근친 오던 날이 번개처럼 스친다. 그네가 나
이 아직 어려서 철 모를 때 본 정경이었지만, 하도 기이하여 잊히지 않았던 것
이다. 마을 뒷산이 나비머리 모양이라 동네 이름도 그러한가, 나부산으로 시집간
재종매가 대실 천정 부모님께 처음 근친을 온 것은, 출가한 지 사 년인가 오 년
인가 지난 다음이었다고 한다. 그때 재종매는 젖먹이 아이를 하나 안고 왔는데,
안에서 비자가 나와 아이만 안고 들어갔다. 그리고 나부산형님은 개구멍으로 들
어갔다. 시부모 상을 당하였거나 시댁에 우환이 있어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닌데,
시집간 딸이 친정에 가서 어버이를 뵙는 근친을 신행 후 삼년 안에 못하면, 그
다음에도 가도, 버젓이 대문으론 못 들어가고 개구멍으로 기어서 들어가야 하는
것이 법이라 했다. 왜 그리했을까. 사람 못났다는 나무람일까. 괘씸하다는 꾸중
일까. 야속하고 매정한 시댁에 대한 무언의 응징일까. 금의 환향을 해도 시집간
딸은 바라보기 애처로운데, 굳이 이처럼 홀대하여 우세 망신을 주는 심정인들
오죽하리야. 이러한 시속을 아는 까닭에 시댁에서도 어지간만 하면 삼 년 안에
며느리 근친을 보내 주는 것이 상정이었다. 그러나 죄 많은 세상에 여자로 난
것이 또 하나 죄라서, 한 번 시집가고 나 끝내 친정에는 못 오고 만 사람도 있
었다. 개구멍을 기어 나가느라고 흙투성이가 된 나부산형님이 친정어버이께 절
을 하면서, 온 식구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는 말도 있고, 폭소 끝에 목을 놓아
울었다는 말도 있었으나. 지금 와 생각하니, 그 둘 다 맞는 말 같았다. 어떤 마
을에서는 개구멍 입납을 시집간 햇수로 세어 삼 녀이라 하고 어떤 마을에서는
햇수와 상관없이 첫아이 낳도록까지 안 오는 경우에 행한다고도 하지만. 아무러
나 두 세월 모두 짧다고야 어이 하리. 눈이 짓무를 시간인 것이다. 효원은, 내가
언제 매안으로 왔던가, 헤아려 본다. 그리고는, (나도 이미 대문으로 들어가기는
틀렸구나.) 고개를 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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