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안이 작별이 본대 길어서 아마 오늘 해 지기 전에 정거장까지 닿기는 어려우
실 겝니다. 아예 천천히 이약 이약 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별사가 섭섭잖게 나
누고 가시지요."
기표가 농을 섞어 말했다. 그러나 아주 빈말은 아니었다.
"다 정 깊은 일이지요. 그래서 귀문에 예부터 체리암이 있지 않겠습니까?"
허담의 응대에 기표가 호오, 놀란다.
"체리암을 알고 계십니까?"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체리암은, 동구밖에서 한참 오 리 바깥으로 나간 길목에, 큰 내를 낀 갈림길 어
귀를 지키고 있는 커다란 바위다. 매안 이씨 문중에 손님이 왔을 때, 헤어지기
몹시 서운하여 떠나는 길의 발걸음 동무를 하면서 따라 걷다가, 차마 떨치기 어
려운 소맷자락을 아쉽게 서로 놓고
"자, 이제는 여기서 헤어지자."고 명표를 해 놓은 이 바위 글씨는 매안 이문 몇
대조 할아버님께서 몸소 쓰시어 음각한 것이라 하였는데. 머물 사람은 남고, 갈
사람은 떠나는 바위. 이 은근하고 그윽한 바위까지 효원은 아직껏 한 번도 나가
본 일이 없으나, 대문간에 선 채로 흰 두루마기 자락이 펄럭, 펄럭, 검음을 따라
나부끼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날은 날씨도 ...
청명하였다. 그 아버지가, 매안역을 출발하여 순천에서 하룻밤 자고, 아튿날 대
실이 있는 득량역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 음력 삼월 초이틀.
그리고 다시, 소식 없는 효원에게 두 번째 서한을 띄운 것은 팔월 스무날이었다.
그 사이에 반 년이나 흘렀건만 효원은 일자 서신을 감히 올리지 못하고, 날마다
속으로 먹만 갈았다. 효원은 벼루에 붓을 적시려다 말고 무릎에 얼굴을 묻는다.
손끝이 떨리는 것을 진정하기 위함이었다. 아직까지 시집와서 한 번의 문안서도
올리지 못한 까닭은 단순히 인편이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힘주어 버티고 있는
어깨의 천근 같은 무게가 손끝으로 쏟아지면, 결국 그것이 오히려 더욱 큰 불효
인 것을 그네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네는 탄식이 두려웠다. 검은 벼루 시꺼먼
먹물보다 더 짙은 한숨을 밀어내며, 효원은 아우 요원의 봉서를 펼친다. 여린 듯
부드럽고 애처러운 글씨체가 아직 병중인 기색을 머금고 있어, 울컥 눈물이 솟
는다. 아아, 내 동기간. 간절 사념 나의 형님은 무용제의 필적을 받으쇼서. 우리
형님 옥음을 언제 드럿든고. 수십 년 수백 년이나 되온 듯 기억에도 아득하고
지체없는 세월은 머나먼 곳으로 달리는지 발셔 기묘를 지나 경진 조춘이라. 가
물거리는 아즈랑이는 만청산의 너울이 되고 진달래 봉오리가 오는 봄을 재촉
난대 이 수심 많은 아녀의 심리를 울울케 하오며 일우우일우하니 시드는 고목에
띠봉오리가 구슬 갓고 빳빳 마른 잔디 우에 새 움이 동아 금수강산이 형형색색
으로 아름다온데, 그간이라도 우리 형님 기체후여전 만안하시온지요. 이곳은 아
버지 기체후 강녕하시옵고 어머니께서도 여일하시오나 아버지께서는 몃 가지 집
안일로 분망하시오며, 거번에도 기곳 행차하려 하셨사오나, 이제는 단 십 리만
왕래하셔도 기력이 부치시니 하정에 뵈옵기 죄송만만, 작추지사를 생각하면 심
장이 탈 지경이나 뉘라서 일호인들 아라 주리요. 이 쓸모업는 아우 뜻박게 병을
얻어 목을 찢고 구멍을 뚤어 대수술을 하온 끝에 대대로 내려오던 전답과 가산
을 만금이나 탕진하여, 아버님 그 일로 십년은 쇠하시고, 문서와 곳간이 남의 것
이 되오니, 이 사제의 찌저지는 설움을 뉘기다려 말 한 마디나 할까. 입술이 마
르고 심장이 타는 이 속을 그 뉘라 일 분인들 아라 주오며 뉘게다 반 분인들 호
소하올까요. 쓸 곳 업는 이 인생, 무엇하러 차세에 탄생하여 이러케 자랏는고.
분분하고 원통절통. 젼생에 뉘게다 척을 지어 이 세상에 태였든가. 피어나는 한
시절에 설빙을 뿌려노니, 무쇠라서 견듸오며 철석이라 견듸리요. 부귀영화로 한
없이 살아도, 초로인생이니 부유인생이니 하난대 이 갓탄 인생이야 무엇에나 비
하리오. 삼경 월색 명백하야 남창에 가득하고 고요이 들려오는 귀촉도 우는 소
리 깊어가는 울울심사 더욱 잡지 못하온대 꽃 피어도 아까운 청춘의 구곡지중에
회한만 가득 넘치나이다. 상젼이 벽해 된다 하더니만, 사람의 사는 일이 일일 한
만 커지오니 우리 형님이나 계시오면 만단정회를 풀어 볼까요. 집안의 형세가
이와 갓타 마음이 무너지고 질정을 못하온대 여자로 태어난 죄를 또 어이할까,
무용제의 혼사로 걱정만이 크십니다. 우리 형님 떠나실 때 그다지도 작별을 설
워하여, 소맷자락 잡고 울고, 놓고 돌아서서 울고, 꿈속에서 반겨 만나 또 울었
는데, 이 무용제, 부모님께 불효를 저지르고, 천산 갓튼 한이 남아 이 한 몸 바
위에 부서뜨려 다 바친다 할지라도 손톱 티끌만치라도 갚을 길이 전혀 없어, 앉
아 생각하여도 어즈럽고 일어서서 헤아려도 일천간장이 촌촌이 잘리우는 것만
갓타서 첩첩한 이 죄를 어디다가 호소하여 용서를 받으리오. 터질 듯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업나이다. 그리운 우리 형님, 해동하여 일기 온화하면 만사 제폐하시
고 이 아우를 생각하여 이삼 일 경영하시와 부듸부터 오시압소셔. 아모쪼록 이
소원이 공허가 되지 안토록 천신께 복원 축수 하나이다. 학수고대 일각이 여삼
추로 우리 형님 반가운 발소리를 기다리오니 형님은 사제의 심정을 저바리지 마
오소셔. 만일에 못 오실 테면 점점이 금옥 갓튼 알들하옵신 글이라도 반기게 하
여 주옵기 간절히 바라오며 금츈 상봉을 고대고대하옵고 회생하난 봄바람에 내
내 귀체 만안하시옵소셔. 그리운 우리 형님 - 경진 중츈 염일일 사제 용원 올림
글자마다 가슴을 짓찧으며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용원의 편지를 차마 접지 못
하고, 옷고름짝 하나도 떼어 줄 수 없어 애간장이 미어지는 효원의 무릎 위에,
어머니 정씨부인의 두루마리 궁체글씨 편지가 어루만지듯 펼치어져 놓여 있다.
시시로 보고 십흔 여아 보아라. 무심등한한 어미 이제야 두어 말 적난다. 너를
일생 삼셰 유아로 아랏더니 너의 연기 어나듯 스무 살이 되어시여 어언간 다리
밧기여 열두 다리 가고 또 몃 해가 가니, 보고 십흔 내 여아야. 우리 모녀 몽중
상봉은 밤마둥 안면을 대하여 흔흔 반기다가 깨다르면 헛본 몽중이라 실 데 업
더라. 내 새끼야. 이졔나 저졔나 마음 조려 문 밧글 내다보아 이리저리 둘러보나
내여아 오는 기색이 업섯구나. 일구월심 고대하던 너의 제 용원이 하로에도 몃
차례나 문 소리에 놀라건만, 지나가는 바람 소리 마음을 희롱하니 그 정경이 안
스럽다. 어미가 너 가는 아침, 여엿븐 너의 거동 새로 한 번 보려 하고 깃차오기
를 기달르며 머리를 들고 보니 너의 거동 실 잇기로 새로 한 번 보려 한즉 번개
갓치 가난 깃차 언 듯 압페 드리다라. 다만 나믄 게 석탄 연기뿐이더라. 집에 오
면 네 모습을 다시 볼가 급한 걸음 드러와서 문을 열고 둘너보니 내 새끼는 간
곳 업고, 신엇든 너의 보선만이 웃목에 노엿구나. 밤낮으로 신고 다닌 하릴업난
보선 들고 내 새끼 발목인 듯 쥐어잡고 불너보니 이리저리 다 보아도 듯고 십흔
여아 음성 대답 소리 간 데 업다. 들리난 듯 보고 십흔 그 거동을 인제 어디 가
서 어이보랴. 지척이 만 리라고 매안이라 하난 곳이 어느만한 거리인고. 첩첩산
중 가로 노여 빈 구름만 오갈 뿐 소식조차 듯기 어려온데 어미 살아 생젼 내 새
끼를 다시 만나 반길 날이 잇기나 잇슬 거신가. 너를 보내고는 엇지 그리 보고
십흔지 어디서 그리 소사나는지 모를 눈물로 심정을 적시더니 이제 용원이도 저
와 갓치 중병을 치르고 기사회생 목숨만을 건졌난대 허청허청 거러가는 발거름
이 안스러온 지라 어미 마음 새삼 진정을 못하는구나. 어미 심정 이 갓틀 때 미
듬직한 내 새끼야 네가 곁테 잇슬지면 그 얼마나 조흐리오. 내 새끼야 어미가
너를 볼 때 헌헌장부 남아를 의지하는 심졍이엇스나 안개 갓튼 꿈결인 양 한 번
가고 나니 모든 거시 하릴업다. 세월은 어디 가서 머물고 있는고. 이곳 사정은
날이 갈수록 핍박하여 안팍그로 근심이 천 근 만 근. 거번 공출에는 제사에 쓰
라고 감초아논 쌀마져도 헤집어서 뒤져가니 억장이 무너지고 심사울울 답답하기
그지업다. 몃 바가지 안되나마 지성으로 감고 싸서 뒤안 담장을 허무러 그 밋트
로 숨겻으나 엇지그리 자세 알고 대창으로 헤적이니 야속 한심한 정경이야 말로
다할 수가 잇스리오. 문중에도 지붕을 못 이어서 초가가 기와 되게 골골이 패어
나고 연긔 아니 나는 집이 한둘이 아닌지라. 사람 사는 지경이 설상 가상 트인
곳이 업구나. 그저 다만 비난 거슨 너이 내외 평안하고 우리 사돈께서도 기체
안영하시며 우리 현서게서도 일일이 재수 대통하오며 우리 사돈게서 미거한 너
를 사랑이 역이시여 귀히귀히 어엽비 보시기를 천만축수하는구나. 매사 온순 정
직 부듸 마음 단단히 먹고 심신을 중히 하여 위로는 층층 시어른 지극 봉양할
일이며 부덕을 게을리 하지 마라. 흉중이 어즈러와 이만 난필을 총총 접으나 너
는 이미 뽄을 보지 말고 다만 두어 자씩이라도 편지 자조 하여라. - 경진 칠월
그믐 어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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