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없는 허공을 향하여 사는 것보다 더 고달픈 일은 없느니... 장애가 디딤돌
되는 일도 있으매, 묶여서 오히려 떠내려 가지 마소. 비록 그 사람이 오늘은 여
기에 없지만 기다리는 마음으로 집을 지키고 있게. 누추하나마 아랫몰에 초가
한 채를 지어 놓았네. 나의 심정으로는 솟을대문에 기와 겹집이라도 얼마든지
지어 주고 싶네만, 떠나간 사람을 생각하여 일부러 저만치 아랫몰에 조촐하게
초가를 지었으니, 과히 섭섭히 여기지는 말게나."
그것은 옳은 처사였을 것이다. 과연 그것을 신행이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는 모
르겠지만, 열아홉에 신행을 온 인월댁을 앞에 앉히고, 청암부인은 마치 인월댁의
심경을 거울로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인월댁은 그때 하늘보다 높
은 어른 앞이라 고개를 수그린 채 드러내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자신의 말을 새
기고 있었다. (첫날밤에 소박을 맞은 여인이 시집의 문중으로 들어온 것만 하여
도 소문거리이온데, 무슨 염치로 고대광실에 살겠습니까? 하늘을 바로 볼 수 없
는 부끄러운 사람이니 초가 삼간도 제게는 바늘방석입니다. 오히려 목숨이 붙어
있다는 사람만으로도 호사스러운 일이지요. 친정에서 죽지 않고 시댁의 문중으
로 들어와 죽는 것조차도 제게는 과분한 일입니다.)
"기서가 일찍이 조실부모 해서 집안에 자네 시어른이 안 계시네. 자격은 없으나
마 내가 그래도 명색이 종가의 종부로서 시어른 대신 기서 부모님의 흉내를 낸
것일세. 그리 알게나. 지금은 자네가 죄도 없이 근신을 허게 되었네만, 달리 또
어찌하겠는가. 일단 이씨 문중으로 들어왔으니 우리 같이 세월을 기다려 보세."
청암부인은 인월댁을 안쓰럽게 여기며, 집 한 채를 내려 주었다. 그때 청암부인
의 나이 서른일곱, 인월댁은 열아홉이었다. 아랫몰의 개울가에 세워진 인월댁의
초가 토담 옆에는 각시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애잔하게 서 있었다. 그 개울을 경
계로 저쪽은 거멍굴이었고 이쪽은 문중의 마을이었다. 열매도 탐스럽게 맺지 못
할 각시복숭아의 꽃잎은 무엇하러 그렇게 진분홍으로 고울 일이 있었던가. 기껏
설레게 꽃잎이 피어도, 결국은 도토리만한 열매를 맺고는 그만일 것이. 인월댁이
안서방네의 안내로 그 초가의 사립문을 들어서려 할 때, 복숭아 꽃잎은 하염없
이 날리며 개울로 졌다. 물 위에 진분홍의 꽃잎이 물 소리에 섞여 떠내려 가던
그 밤에 온 산에서는 소쩍새가 그렇게도 음울하게 울었었다. 인월댁은, 신랑 기
서가 잠깐 나갔다 올 것처럼 일어서서 장지문을 열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밟혔
다. 사모관대도 벗지 않고 자색 단령 자락에서 휙 바람 소리를 내며 나가던 때
의 그 써늘한 기운은 오래오래 인월댁의 가슴에 남았다. 그 기운은 가슴에 자리
를 잡으면서, 살 속으로 파고들고, 뼛속으로 근을 내렸다. 기서는 그 길로, 매안
에도 들르지 않고 경성으로 떠나 버렸다.
"기서한테 역마살이 있는 것이라... 역마살을 타고난 사람은 아무리 반가에 나도
끝내는 엿장수라도 하고 마는 법이거늘. 한 사람의 청춘이 가엾고, 끝내는 인생
이 안쓰러운 일이로다."
청암부인은 그 소식을 듣고 홀로 탄식하였다. 그저 단순히 가엾고 안쓰러운 것
이 아니라, 핏줄이 땡기는 것 같은 아픔에 가슴을 오그리며 한숨을 토하였다. 결
국, 문중은 종가에 모여 인월댁의 일을 의논하게 되었다. 남의 일이라 가끔 궁금
하게 생각하고 염려는 하였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까지는 가지지
못했던 문중 사람들은, 청암부인이 주도한 문중 회의에서도 의견들이 분분하였
다. 그렇게 분분한 의논 중에도 가끔씩 가라앉을 것 같은 침묵이 무겁게 좌중을
짓누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다만 청암부인만은 시종 자신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책임을 질 사람도 없이 무조건 이쪽으로 데리고만 오면 무슨 수가 나겠습니까?
차라리 친가에 있는 것이 신간이 편할 겁니다."
그때 생존해 있던 병의는, 데리고 오자는 청암부인의 말에 난색을 보였다. 병의
는 기표의 부친으로 청암부인에게는 시아재였다. 형수인 청암부인은 간곡하게
말했다.
"이미 이씨의 문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번 출가하면 그뿐, 친가에는 더 머
무를 수가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이쪽에서 오라는 말이 없으면 그곳에서 한평
생을 얹혀 살아야 하는데 그 정경이 오죽 딱합니까? 비록 신방에는 신발 한 번
벗었다 신은 인연밖에는 짓지 못하였으나 그 역시 내외는 내외인지라, 남편의
가문에 와서 생애를 보내야지요. 이곳에 와서 사는 것이야 어찌 살든 흉될 것이
없습니다만, 그쪽 친가에서 산다면 껀껀이 말이 될 것이며, 처신에 괴로움이 많
을 터이고, 죽어도 이곳에 와서 죽어야 도리일 것입니다. 기서 부모님께서 구존
해 계시다면 그 어른들께서 알아 하실 일이나, 지금은 두 분이 계시지 않는 형
편입니다. 문중이 책임을 지고 보살펴 주어야지요. 새댁도 지금이야 나이 젊고
부모님이 계시다지만 미구에 타계하시면, 그 인생이 어디에 몸을 의탁하고 살겠
습니까? 결국 자진을 하게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소홀히 하고 있는 동안에
한 인생이 시들어 죽어간다면, 이는 사람의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기서는 이미
돌아오기 어려운 사람이나, 법도대로 새댁을 신행 오게 하십시다. 비록 신랑은
없는 집이라 하나, 이씨의 가문으로 오는 것이 바른 이치일 겝니다. 결정만 내리
면 목수를 불러 초가 한 채를 짓겠습니다. 새댁도 호사할 생각은 없을 것이니,
죄인은 아니로되 누옥에서 근신하며 살자면 때가 오지도 않겠습니까? 어쨌든 이
가문의 사람이라 종가에서 돌보겠습니다."
청암부인의 심정이 너무나도 간곡하여 사람들은 무해무득한 일에 공연히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아랫몰 개울가에 초가를 짓고 홀로 있는 듯 없는 듯 살 것인데,
정경은 딱하겠지만 굳이 막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오게 된 신행이었
다. 물론 잔치도 없었다. 다만 구경꾼들이 울타리같이 두르고 있는 중에 종가의
청암부인에게만 시부모님께 올리는 구고례를 대신하여 절을 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랫몰 개울가 초가집에 들어서, 토방 아래 마당에도 나서지 않을 만큼
방안에서만 숨어 살다시피 하던 만 십이 년의 세월. 그것을 어찌 말도 다할 수
있으랴. 십삼 년째 되던 해, 봄 소쩍새가 그렇게도 울음을 토하던 밤. 그네는 방
죽에 몸을 던졌다. 울다 울다가 제 목에서 피를 토한다는 새, 토한 피를 다시 삼
키며 무슨 서러운 일, 무슨 한 많은 일로 제 속에 피멍이 들게 간직한 원통한
일로, 한세상을 밤이면 울다가 죽어 가는 새. 인월댁은 방죽의 수면 위로 번득이
며 파고들어 울려 오던, 그 낮고 목 쉰 울음 소리가 조금도 무섭지 않았었다. 내
가 죽으면 그 넋은 무엇이 되랴. 그때 여우가 빈 어둠을 향하여 길게 울었던 것
도 같았다. 그네의 귀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차가운 물 소리뿐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제방으로 건져내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전신이 물에 젖어 혼곤
하게 눈을 떴을 때, 인월댁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불똥이 떨어지고 있는 횃불의
무리였다. 횃불들은 허공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지럽게 웃으
며 춤을 추는 것도 같았다. 하늘이 불붙으며 쏟아져 내렸다. 그 불덩어리 하나가
가슴에 떨어지면서, 그네는 다시 정신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나서 얼마 동안이
나 그렇게 길고 긴 혼수에 빠져 있었던가. 그네가 깨어났을 때, 북향의 뒷방에는
청암부인이 보낸 베틀이 그네의 정신이 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인월댁
을 위하여 각별히 새로 맞추어 만든 베틀이었다.
"한꺼번에 다 살려고 하지 말게나. 두고두고 살아도 꾸리로 남는 것이 설움인데,
원수 갚듯이, 그렇게 단숨에 갚아 버릴 생각일랑 허지 말어... 그런다고 갚아지는
것도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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