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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10)

카지모도 2024. 1. 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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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물과 구름

 

"어머니, 창씨개명을 하기로 문중에서 결정이 됐습니다."

이기채는 단도직입으로 말을 던진다.

"혈손을 보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허울뿐인 성씨만 가지고 있으면 무얼 하

겠습니까? 우선은 급한 불을 끄고, 강모, 강태, 목숨을 보존하고 있자면 언젠가

는 일본이 망허지 않겠습니까? 그놈들이 오래 간다면 얼마나 가겠습니까? 몇 백

년 몇 천 년을 갈 것인가요? 아이들이 제 근본만 잊지 않고 정신을 놓지만 않는

다면, 성씨야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것이나, 자손이란 한 번 맥이 끊어지면 다

시 잇기는 어려운 법이라, 강물 같은 시세를 어찌 손바닥으로 막아 볼 수가 있

겠습니까. 징병 문제만 해도, 한 번 출병허면 그 목숨은 개나 도야지 값도 못허

는 형편인지라, 기표가 손을 써 보겠다고 했구만요. 우선 이렇게 창씨개명을 허

지마는, 이것은 사람이 옷만 바꿔 입는 것이나 한가지라서 근본은 그대로 남는

게지요. 어머니, 너무 심려는 하지 마십시오. 때가 이와 같으니 참아야지 어쩌겠

습니까."

이기채는 자신에게 타이르듯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 청암부인은 그

런 이기채를 바라보지도 않고,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있더니, 한참만에야 "별 도

리 없는 일이지."하고, 한 마디만 말하였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서로 깊은 침묵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윽고, 질식할 듯한 침묵의 무게에 눌린 이기채가 고

개를 들자 청암부인도 이기채를 바라보았다. 그때, 이기채가 본 것은 그네의 눈

매였다. 그 눈매에는 이미 서리가 걷혀 있었다. 무심코 이야기하다가 부인의 눈

매에 부딪치면, 보는 사람을 서늘하게 하였던 허연 서릿발은, 지금 습기처럼 축

축한 물기로 번져나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이기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것은 까닭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큰 죄를 지었구나. 그는 노안의 늙은

주름 갈피로 번지는 습기를 보면서, 지금까지 보아온 청암부인의 어떤 모습에서

보다 깊은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날 이때까지 거대한 기둥처럼, 혹은 질긴 힘

줄처럼 버티고 긴장시켜 오던 무엇인가가, 순간에 무너져 내리면서 탄력을 잃어

버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끝이 차게 식어들었다. (이 일을 어찌하

랴) 그는 심장이 거멓게 죽어드는 것을 가까스로 견디며 허리를 곧추세우려 하

였으나, 한쪽 어깨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청암부인은 소리

없이 낙루한다. 눈물이 옷섶으로 떨어져 젖는다. "한 생애가 허사로다..." 청암부

인의 허리가 앞으로 꺾인다. 삭은 나무토막이 부러지는 것처럼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진 그네는 두 팔로 몸을 버티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울었다. 이기채는 감

히 그 앞에서 아무 말도 더는 잇지 못한 채, 자실하여 넋이 나간 얼굴이다. 그리

고 자신의 몸이 티끌처럼 형체도 없이 흩어지는 것을 느낀다. 자기 몸을 이루어

주던 단단한 껍질을 잃어버리고 나니, 남는 것은 티끌뿐이었다. 아아, 내가 이

어른에게 지금까지 이대도록 마음을 의지하고 살아왔었단 말인가. 어찌 사람이

태산이며 하해이리요. 한낱 생물에 불과한 것을, 그런데도, 나는 어머니를 사람

이 아니시라고 생각했었다. 이기채는 자신의 심정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물이란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좁은 통에 들어가면 좁아지고 넓은 바다

에 쏟으면 넓어진다. 낮으면 아래로 떨어지고 높으면 그 자리에 고인다. 더우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추우면 얼어 버린다. 그릇과 자리와 염량에 따라 한 번도

거역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순응하지만, 물 자신의 본질은 그대로 있지 않은가.

모습과 그릇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땅 속으로 스며들어간 물은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마는 지하수가 되어 샘물을 이루고, 하늘로 증발한 물은 이윽고

구름이 되어 초목을 적시는 비를 이룬다. 대저 형식에 집착한다는 것이 무엇이

랴. 보이는 것에 연연하여 보이지 않는 것이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오히려 형

식에 본질이 희생을 당하는 것이리라. 작금은 시세가 불운하여 내가 조상을 욕

되게 하고 가문의 문을 닫는다마는, 이것은 다만 형식일 뿐이다. 얼음이 아무리

두꺼운들 실낱 같은 봄바람을 어찌 이기며,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천지를 한 입

에 삼킬 것 같아도, 구름이란 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무게를 못 이기어 빗

방울이 되고 마는 법. 기다리면 때가 안 오랴... 내 대에 안 오면 강모가 있고 강

모 대에 안 오면 그 다음 대가 있지 않은가. 그러고도 자손은 면면히 대를 이어

갈 것이니, 아무러면 때가 안 오랴...) 그러나 그런 것들은 어거지에 불과한 이론

이었다.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서 심중을 편히 하려고 생각을 고쳐 보아도 (잃어

버렸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는 허전한 절망감은 어떻게도 메울 길이 없었다.

(무엇으로 보상을 받으리오. 내가 무슨 부귀영화와 복락을 누리려고 이런 욕된

일을 하고 말았을까. 무엇인가 이 일에 합당한 대용의 결과가 있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기채는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서서 서성거렸다. 자신의 내

부에서 허물어져 버린 맥락의 기둥을 어떤 것으로든지 떠받치지 않으면 금방이

라도, 가문이고 재산이고 그냥 그대로 쓰러져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 빈 곳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채워 넣어야만 이 허전함이 다스려질 것 같았

다. "한 생애가 허사로다..." 청암부인의 사그라지는 한숨 소리가 이기채의 가슴

에 흙더미 무너지듯 무너져 얹힌 것이, 숨을 들이쉬어도 내쉬어도 뱉어지지가

않는다. (한번 잃어버리면 그뿐, 어찌 다른 것으로 채워 넣을 수 있으리오. 내가

믿느니 다음 대라고 하지만, 강모가 어디 실한 사람인가. 제 심중 하나를 이기지

못하여 비틀거리는 허약한 놈이고, 그놈이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어찌 그 아들

을 또 믿을 수 있겠는가. 어머니 저러다가 힘없이 돌아가시면, 나도 성치 않은

몸 언제 덜컥 죽을는지 아무도 모르는데, 누가 다시 성씨를 찾아 줄 것인고. 어

허어. 이 노릇을, 허망한 이 노릇을 어디 가서 하소연을 헐 수 있을꼬) 확실히

이기채는 평정을 잃고 있었다. 그의 안색이 노랗게 졸아들었다. 본디도 이재에

밝은 사람이었지만, 그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재산을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 바

로 이 무렵이었다. 이기채의 곤두선 신경 때문에 그의 소맷자락까지도 손이 스

치면 베일 정도로 날이 서 있었고, 기표는 이기채의 사랑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이기채는 문갑 속에 쟁여져 있는 문서들을 빈틈없이 점검하고, 산판으로 계산을

맞추고, 때때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느 결엔지 가슴이 무너진 자리에는 불안

이 소리 없이 스며들어 조금씩 이기채를 삼키고 있었다.

"대실 사가에서는 별반 거조할 기미가 없지요?"

이기채가 문서를 접어 봉투에 넣는 것을 보며 기표가 무심히 지나가는 말로 묻

는다.

"허가들이 뭐 언제는 거조를 했는고?"

이기채의 말꼬리가 아니꼬움을 참지 못한다.

"참, 내색을 드러내 놓고 헐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웬만하면 그만헌 살림 몇 천

석씩 가지고 있다면서 여아를 출가시키는데 그래 한 백 석 거리 논 문서 한 장

을 농지기에다 못 끼워 보냅니까? 다 그만 못해도 사오십 석의 문서 정도는 으

레 예의로 따라오는 거지요. 쓸모없는 장롱 이부자리에 온갖 가구 집기만 바리

바리 싣고 오면 뭘 합니까? 실속이 있어야지요. 더구나 며느리가 또 있는 것도

아니고 달랑 하나 외며느리 인데, 그 사장 어른도 어지간히 변통이 없으신 분이

구만요."

이기채가 마른 기침을 돋우어 한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

"뭐 며느리 맞어들여 치부를 허자는 것은 아니올시다만, 이쪽에서 바라지 않더라

도 그리허는 것이 저쪽 인사가 아니겠습니까? 혼인 당시에야 어찌어찌 사정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이씨 문중 대종가의 외며느리가 자신의 눈치나 수완으로 그

만한 일을 못해내고 맙니까. 부혼이라고 남들이 부러워했던 일도 다 빛 좋은 개

살구고, 남보기만 민망하게 되었지요."

"그렇다고, 가서 내놓으라겠나?"

"형님이 그러실 수야 없는 일이고, 강모를 시켜서 제 안(아내)한테 말하랄 수는

있지 않습니까?"

"그게 속보이는 일이 아닌가? 집안의 체면도 있는 것이고."

"속은 무슨 속이 보인다고 그러세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백모님

은 저렇게 맥을 놓아 버리시고, 강모는 나이만 스물 몇이지 그 소견이나 언행이

유아를 벗지 못하였습니다. 시국 또한 심상치 않어요. 이런 고비에 집안 고삐 단

단히 틀어쥐지 않으며 어느 귀신이 와서 채갈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입

니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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