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부인은 지그시 눈을 내리감고 한참씩 쉬어가며 숨소리로 말했었다. 인월댁
은 아직도 얼굴빛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푸르게 질린 채 듣고만 있었다. 그
말소리와 숨소리 사이에 복숭아 꽃잎이 지는 소리가 들리었던가, 아니었던가. 그
날로부터 이십여 년의 세월을 하루같이 인월댁은 베틀에 앉아 살아 왔다. 동무
라면 오로지 속으로 나직이 흥얼거리는 베틀가 한 자락.
천상에 놀던 각시가 세상으로 귀양을 왔더라오 배운단 게 질쌈이요 부르나니 베
틀가라 명주 한 필 짜을라니 베틀 놀 데가 전혀 없어 좌우 한편 둘러보니 옥난
간이 비었구나 베틀 놓세 베틀 놓세 옥난간에 베틀 놓세 낮에 짜면 일광단 밤에
짜면 월광단 옥난간에다 베틀 놓고 베틀 몸을 동여매어 베틀 다리는 네 다리요
앞다릴랑 두 다릴랑 동에 동창 배겨 놓고 뒷다릴랑 두 다릴랑 남에 남창 맞쳐
놓고 앉을개라 돋우 놓고 그 우에가 앉은 각시 허리 부테 두른 양은 절로 생긴
산지슭에 허리 안개 두른 것고 북 나드는 저 기상은 피징강도 건넌 기상 대동강
도 건넌 기상 용두머리 우는 양은 조그마한 외기러기 벗을 잃고 슬피 우네 황새
같은 도투마리 청룡이 여의주를 다투난가 달을 따서 안을 삼고 해를 따서 거죽
을 삼고 삼태성의 끈을 달아 무지개로 선을 둘러 금자를 갖다 대어 옥자로 재어
보니 서른 대자로오구나 청태산 구름 속에 만학이 넘노난 듯 옥색 물을 반만 놓
아 서울 가신 서방님 청도포라 지어 보세 옷이라도 지어 보세
누가 올리도 없고 달리 갈 데도 없는 세월이, 베틀에 짜여지는 무명필처럼 흘러
갔다. 다만 인월댁이 남의 눈을 피하여 청암부인에게 다녀온 몇 번을 제하고는,
그 긴 세월 동안 집을 비운 일이라고는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원
뜸의 종가에서 안서방 내외가 번갈아 심부름을 내려오는 것이 손님의 전부라고나
할까. 그네는 그림자처럼 홀로 살아왔다. 인월댁의 길쌈 솜씨는 그다지 두드러진
편은 아니었다. 동틀 무렵부터 해질녘까지, 꼬박 앉아서 하루 열 자를 짜기도 하
였으나, 매달리어 억세게 일을 하지는 않았다. (내 할 일이 이것뿐인 것이라 ...
그저 ... 벗 삼아서...) 그네는 때때로 잉앗대에 이마를 대고 베틀에 엎드려 울었
다. 멍울멍울 떨어지는 눈물은 무명의 올 사이로 스며들어 실을 젖게 하였다. 실
은 살이었다. 그리고 용두머리 위에 기름등잔을 밝혀 얹어 놓고, 밤을 새워 베를
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을이 깊이 잠든 한밤중에 그네가 잠 못 이루며
길쌈하는 소리는 덜컥, 덜컥, 밤의 가슴에 얹히곤 하였다. 그럴 때 차갑게 귀를
적시며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는 얼마나 시리었던가. 차마 베틀에도 앉지 못한
채, 가슴을 오그려 우는 밤도 있었다. 명주실낱 같은 핏줄 하나하나가 땡기어 그
대로 터져 나갈 것만 같은 설움에 목이 메어 홀로 우는 밤이면, 각시복숭아 꽃
잎이 개울에 날려 떨어지는 소리까지라도 역력히 들리었다. 무섭게 적막한 밤이
었다.
"부질없는 것들같이 보일지라도 무엇에다 마음을 묶어 두면 의지가 되느니. 바늘
쌈지 부지깽이 하나라도 애중히 아껴 보면 어떻겠는가. 한 세상이라는 것이 허
허벌판 위태로운 바람닫이인 것을, 바람벽도 없이 어디에 마음을 가리우고 살
것인고."
청암부인은 인월댁에게 그렇게 간곡하게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인월댁은 길쌈한
것으로 논이나 밭을 사지는 않았다. 그네 앞으로 단 한 마지기의 논이나 하루갈
이의 밭조차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다른 치장을 할 리도 없었다. 다만
그네는 겨우 연명할 곡식과 몇 가지의 일용품을 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일
은 장날이면 안서방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충직하게 맡아서 해 주었다. 인월댁
은 늘 그렇게 생각하였다. (논 사고 밭을 사면 무얼 하겠는가. 그것도 애착의 끈
이 된다. 내 무엇을 위하여 흙덩어리에다 마음을 묶어 두리오. 내 마음 하나도
나한테 묶여 있는 것이 짐스럽고 무거운 것을... 삼간 초가에 이 한 몸 의탁하고
있다가, 때 되면 툇마루에서 일어나 길 떠나가면 그뿐이라. 무엇에든지 나를 묶
어 두면, 떠나는 발걸음이 또 얼마나 무거우리.)
그런 인월댁의 생각에 청암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서 깊이 고개만 끄덕
이었다. 인월댁은 인월댁대로 그러한 청암부인의 모습에서 풍우를 가려 주는 지
붕을 느끼었다. 그런데 지금 청암부인은, 이미 며칠째 혼수에 빠져 있는 것이다.
부인의 연세는 올해 일흔. 고희에 이르렀다. 인생칠십고래희라, 해서 사람의 나
이 일흔은 예로 부터 드문 일이니. 일흔 살이 되는 생일에는 환갑 때보다 더 융
숭히 차려 큰 잔치를 한다. 이는, 다른 사람의 경우에도 물론이겠지만, 청암부인
의 고희연이라면 가히 그 정성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을 뻔했으나. 이기채의
간곡한 소청에도 부인이 끝내 허락 아니하여서, 내놓고는 준비하지 못하던 중,
팔월 열나흗날, 그러니까 추석 하루 전날이 생신이라. 율촌댁이 알게 모르게 마
음쓰고 있는데, 그 눈치를 못 챌 리 없는 청암부인이 아들 내외를 불렀다. 그리
고 준절히 나무랐다.
"시절이 이와 같아, 나라를 잃은 것도 분하지마는, 그 통한을 지금에 비하겠느냐.
나는 일개 아녀자라 큰일은 모른다. 다만 내 앞에 주어진 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나라 이름 앞세운 것보다 더 크게 생각하고, 내 힘을 다 하려 했다. 만일
에 결과가 불미스럽거나 미흡했다면 이는 내 능력이 모자라 할 수 없었을 뿐.
내 뜻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헌데 오늘, 이 가문의 성씨를 바꾸어 왜놈의 이
름으로 갈아야 한다는데, 창씨개명을 내 손으로 해야 하는 마당에, 내가 무슨 염
치로 낯을 들고 앉아서 고희 상을 받는단 말이냐. 조상님께 사죄하고 스스로 목
숨을 끊어도 부족하리라. 내 일찍이 너희 아버님 조세하신 것이 늘 애통하여, 세
상의 온갖 목숨이 다 아름다워 보이고, 곰배팔이 째보도 살아만 있다면 귀해 보
였다만. 이제 와 이런 참혹지경을 당하니, 일찍 죽지 못한 것이 오직 한스러울
뿐이로다. 내가 오래 살아 이런 전고에 없는 욕을 당하는 것이야. 너희가 나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고희라고 물 한 그릇도 떠 놓지 말아라."
그리고... 쓰러졌다. (아무래도 큰집에 좀 올라가 봐야겠다. 오늘은 차도가 있으신
가) 인월댁은 찬 방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앉는다. 그리고 아직도 빛을 밝히고 있
는 등잔불을 불어 끈다. (저렇게 사람들이 청호로 몰려가서, 공들이던 고기들을
손으로 거머잡고, 저수지 바닥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다면 종가의 운수가 ...)
마음이 허방으로 떨어진다. 그네는 서둘러 매무시를 고친다. 이만큼 날이 밝았으
면 청암부인을 찾아뵙는 것도 이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인월댁은
아까부터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느라고 애가 탔었던가 보다. 여자가 식전 손님이
될 수는 없는 탓이리라. 그네가 막 방문을 열고 나오자, 햇살이 실린 감나무 가
지 위에서 까치가 까악 까악 운다. 지금까지의 인월댁은 아무리 아침 까치가 울
어도 마음이 설레지 않았었다. 설렐 일이 없는 것이다. 기다릴 소식도 없었다.
그리고 까치에게라도 걸어 보고 싶은 아무 소망도 없었다. 그저 무심히 까치 둥
우리를 한 번 울려다보면 그뿐이었다. 그럴 때 까치는 검은 감나무 가지 꼭대기
에서 까악 까악, 눈부시게 아침 햇살을 토해 내곤 하였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달랐다. 저수지로 몰려가던 거멍굴 사람들의 어수선한 발소리와 양철 대야 물통,
물지게 소리를 몰아내 주는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월댁은 까치 소리를 깊
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뻘밭이 되어 버린 저수지 밑바닥과 뒤재비를 치는 가물
치, 뱀장어, 큰 붕어들의 검은 몸부림, 그것들을 삼태기로 건져 내는 사람들의
손, 덩그렇게 드러나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는 조개바위들이 한꺼번에 청암부인
에게로 달려들어, 덮어 누르는 것이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를 털었
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까치 소리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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