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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45)

카지모도 2024. 2. 15.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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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냥 집으로 갔는가 부지 무어, 할머님 편찮으신데 번거로울까봐, 중정 깊

은 것이 그렇게 했는가 보네."

"아이고, 그런대도 그렇지, 저 혼자 빈 집에 앉혀 놓기가 여간 거리지 않아서 큰

집에다 재울라고 했그마는."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혼자라고 하지만 온 동네가 한집인데 무어. 무슨 일이

야 있을라고? 집에 가면 어련히 있겄지. 그나저나 자네 애썼네. 어서 가서 한숨

자야지?"

"예, 내려가 봐야겄구만요."

"으응. 그러게. 나도 어머님한테 들어가 뵈어야겄네."

"참. 큰어머님은 그만허시고요?"

"그러시다네, 더했다 덜했다..."

두 동서는 서로 무겁게 침묵한 채로 잠시 마주 바라보았다. 그때, 닭이 홰치는

소리가 깜짝 놀랄 만큼 갑작스럽게 들렸다.

"아이고 형님, 별 소리에 다 놀래겄네요."

"저것들도 무슨 놀랠 일 있었는가 보네. 그래 이대로 그냥 내려갈라는가?"

"그래야겄어요."

후두르르, 가슴이 떨리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침착하게 댓돌에 내려선 오류골

댁은 율촌댁을 향해서 가겠다는 인사를 하고는 그만 발이 허공에 떠 헛짚고 말

았다. 무슨 정신에 중문 대문을 벗어났는지 몰랐다. (이것이 무슨 일이 난 것 아

닐까. 혹시라도 늑대한테 물려가든 안했겄지 설마.) 염소 새끼, 씨암탉까지도 걸

핏하면 물어가던 늑대가 요즈음엔 발길이 뜸했었는데, 엊그저께 토끼 몇 마리를

밤 사이 잃어 버린 숲말댁이

"그 호랭이 물어갈 것들이."

하고 혀를 찼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오류골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달

리다시피 종종걸음을 쳤다. 큰집에서 오류골댁까지는 불과 세 집 건너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길은, 거꾸로 흐르는 물살처럼 그네를 밀어내며 제자리 걸

음을 하게 했다. (아이고, 아가.) 사립문을 밀친 오류골댁의 눈에 맨 먼저 들어온

것은 댓돌 위의 강실이 신발이었다. 그 신발짝을 보듬을 듯 달려들어 들여다보

는 오류골댁의 입에서

"강실이 안에 있냐?"

하는 말이 터짐과 동시에 손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강실이는 구석지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오류골댁이 놀란 사람 형상으로 밀어 닥치는 서슬에, 비

칠하며 강실이가 일어섰다. 바깥은 새벽이라 하나 방안에는 아직도 어둠의 그늘

이 고여 있었다. 그것이 강실이에게는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집에서 잤냐?"

"...예."

"왜? 엊저녁에 그냥 그 길로 내려와 버렸드냐?"

"...예."

"왜?"

강실이는 대답이 없었다. 오류골댁도 딸이 집에 있는 것만으로 이미 근심이 가

신 터라 더 묻지 않았다. 다만 이것이 어디 아픈가 싶어

"속이라도 안 좋았든가?"

하고 새로 걱정스럽게 물었다. 강실이는 그만큼 쇠진해 보였던 것이다.

"어디 아퍼서 혼자 잠도 못 자고 그런 거 아니냐?"

"... 아니요..."

"새우젓 국물이라도 좀 떠다 주랴? 체헌 것 같어?"

강실이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웬만한 일에는 입을 떼지 않는 강실이의 성격

을 아는 오류골댁은

"아픈 것 참는다고 좋을 거 하나도 없니라. 너는 어려서도 배가 잘 아펐어. 그래

도 울지도 않고 한쪽에 가서 아픈 자리만 제 손으로 움켜 쥐고 앉어서 참어 볼

라고 애쓰던 게 노상 안쓰럽드마는. 본래 병은 자랑허라고 안 그러더냐."

여름날은 새벽이 짧다. 잠깐만 한눈 팔면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마는 것이다. 그

래서, 한숨도 눈 붙이지 못한 오류골댁이었지만 아예 누울 생각은 아지 않고 젖

혀 둔다. 그 대신에 강실이 쪽으로 다가앉으며

"어디, 속 안 좋으면 손으로 좀 쓸어 주랴?"

해 본다. 강실이가 희끄무레한 그림자처럼 앉은 채로 고개를 흔든다.

"이 애가 하룻밤 새 영 축났는가 보다. 어찌 이리 힘이 없을까... 너 어디가 아퍼

도 단단히 아픈 것 같구마는, 왜 말을 안허냐아. 에미 갑갑허게. 어디가 어떻게

안 좋아아?"

하는 오류골댁 기세에 눌리어 그제서야 강실이는

"어머니, 아무렇지도 않어요. 그냥 좀 울렁거려서..."

하고 몇 마디를 대답한다.

"언제부텀? 엊저녁에는 괜찮었잖으냐? 밥도 잘 먹고."

"...더위를 먹었는가... 지금은 아까보다는 많이 가라앉었어요."

"그럼 진즉에 그리 말해야지. 큰집에 가서는 네가 없어서 놀래고, 집에와서는 네

가 아퍼서 놀래고... 하룻밤 새 몇 번 근심이냐 이게. 이리 좀 누워라. 그렇게 체

헌 데는 손으로 눌러 주면 좀 가라앉니라."

오류골댁은 베개를 내려 방바닥에 놓으며 강실이의 어깨를 안아 눕힌다. 강실이

는 허깨비처럼 가볍게 눕혀진다. 그 힘없는 몸이 오류골댁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누워 있는 강실이의 가슴에 오류골댁의 손이 닿았다. 강실이는 자기도 모

르게 소스라치며 오르르 몸을 떨었다.

"이 애가 단단히 서체를 했구나. 으응?"

강실이에게는 그 목소리조차 아득하게 들렸다. 그러면서 등을 찌르던 명아주 여

뀌 꽃대 부러지는 소리가 아우성처럼 귀에 찔려 왔다. 그러고 난 뒤 오늘까지

이 년이 되도록 밥맛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만 셈이다. 부러진 것이 어찌 꽃대뿐

이며, 잃어버린 것이 어찌 밥맛뿐이리. 무거운 것 들어올리다가 허리를 질린 젊

은 장정이 끝내 마른 고추 한근마저도 들지 못하고 마는 것을 강실이는 본 일이

있었다. 겉모습은 예나 다름없이 장대하건만 아무 힘도 못 쓰고 걸음걸이마저

조심하던 일은, 집안 어른들 간에도 자주 거론되었었지. 어려서 본 형상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이따금씩 떠오르고, 한번 떠오른 모습은 오랫동안 지워지

지 않은 채, 그네의 머리 뒤편에 그림자 지는 것이었다.

"거 참. 사람 일 허망헌 거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그 허리 좀 삐끗했다고, 아무

러면 한참 나이 팔팔할 때, 그래 영 힘을 못 찾고 말어? 저사람 저래 가지고 어

디 종이 한 장이나마 제대로 들겄는가?"

아버지 오류골양반이 근심스럽게 하던 말도 귓가에 묻어 남아 있었다. 그런 말

이 오래 기억되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어디 갈피에 묻혀 있던

지나간 날의 말과, 지나간 사람의 형상이 이다지도 선명하게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강실이는 세운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로 눈물이 멎

기를 기다린다. 마음 놓고 혼자 앉아 울 곳도 없는 처지여서, 가슴패기에 고인

눈물의 응어리가 깊은 밤이나 새벽녘이면 저절로 새어나오고 말았다. 그나마 숨

을 죽여 간신히 소리를 참노라면, 밀려 올라오던 울음은 다시 목 안으로 넘어가,

몸 속은 눈물로 그득 차 휘청 어질병을 일으키곤 했다. 어지러운 머리채를 휘어

잡고 있는 것은 강모의 컴컴한 그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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