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나이값도 못허고, 자식 새끼 거느린 년이 넘으 숫총각을 넘보고 찌웃대는 꼬
라지는 참말로 못 보겄습디다."
"내비두어, 애끼먼 똥 된다고 안허등게비. 좋은 시악시 다 놓치고 쇠고집 부리드
니만 그 꼴 났지 머, 다 지 팔짜 소관이겄지."
방이나 마당이나 다를 것도 없는 갈자리 방바닥에 등을 부리며 공배는 다시 한
숨을 삼킨다. 묵은 흙냄새가 끕끕하게 차 있는 방이지만 그 흙내가 바로 제 몸
에서 나는 땀내처럼 낯익었다. (순허게 살어야는디... 토를 달고 나서자면 손꾸락
하나도 책 안잽히고는 까딱 못허능 거이다. 또아리져서 원한 삼을 것도 없고, 치
부책으다 적어 놀 것도 없다. 풀어 부러야제. 또랑물에 가서 발이나 씻고 흘러가
는 물에다가 풀어 부러얀다. 흘러 흘러 가다가 저절로 녹아서 풀어지고 없어지
게 떠나레 보내야제. 응어리 두먼 못쓴다. 못씨고말고. 그나저나 떠꺼머리를 못
면허고 죽으먼 몽달귀신이 될 거인디, 이 노릇을 어쩌끄나.) 아무래도 공배는 쉽
게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을 못 이루기는, 물 건너 문중의 강실이도 마찬가지였
다. 방안의 등잔불을 끈 지는 이미 오래였지만 오만가지 생각으로 정신이 점점
맑아질 뿐 잠은 오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들리던 오류골댁의 숨소리가 깊다. 낮
의 일이 고되었던 모양이다. 거기다가 밤은 짧고 날은 더워 땀을 많이 흘리고
나면, 아무래도 여름 사람이란 고단하기 마련이다.
"너는 안 잘래?"
아까 참에 먼저 자리에 누우며, 아직 앉아 있는 딸을 올려다본 오류골댁이 삼베
홑이불 자락을 가슴까지 끌어 덮다 말고 물었다. 강실이는
"곧 잘라요."
하고 대답했다. 그때 오류골댁은 딸의 얼굴이 오늘따라 몹시도 파리해 보이는
것에 내심 놀라, 한쪽 팔굽으로 윗몸을 버틴 채 반쯤 일으키고는
"아가, 너 어디 아프냐?"
하면서 강실이의 낯색을 살폈다. 그러나 강실이는 고개를 한번 힘없이 가로 저
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머리맡에 놓인 부채를 집어 들고 오류골댁을 부쳐 주었
다.
"모기도 없는데 무얼."
"어서 주무세요."
"어디 아프면 아프다고 해라. 속이 안 좋은가?"
"아니요."
"저녁 먹고 나서는 괜찮었지?"
"예."
"여름에는 그저 조심해야지, 찬물 마시고도 탈이 나고, 조끔만 맥을 놓으면 더위
먹고."
그러면서 오류골댁은 모로 돌아눕는다. 모기를 쫓으려는 부채질이니 땀을 식혀
주기에는 힘이 없다. (저것이 왜 저렇게 안색이 안 좋을까...? 여름에는 누구라도
마르고 바트는 것이지마는... 혼인 때문에 혹시라도 말 못하고 저 혼자 애가 쓰
여 그러는가... 에미 마음이 이럴 때 저라고 무심헐 리가 없지. 대관절 연분이 어
디 가서 숨어 갖꼬 이렇게 안 보일꼬. 여기서는 애간장이 녹게 찾고 있건만, 연
분은 어디 낯선 데서 헛눈 팔고 먼 길을 돌고 돌아서 오고 있는고.) 그나저나 당
혼하면 처자나 낭재나 신색이 훤해지고 물이 오르면서 남의 눈에도 탐스럽게 보
이는 법인데, 어째서 저것은 날이 갈수록 졸아드는지 모르겠다. 여태까지는 벌로
보았는데 오늘 밤에 보니 여간 안된 것이 아니구나. 저러면 못쓰는데. 생각이 얽
혀들자 오류골댁은 머리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누르며
"그만 부치고 어서 자거라."
한다. 강실이는 대답이 없다. 방안을 내리누르는 무거운 더위가 모녀의 사이에
막을 친다. 그것은 근심의 무게만큼 답답하다. 가슴이 눌린다. 그러면서 오류골
댁은 미끄러지듯 잠에 빠진다. 근심은 근심대로 눈을 껌벅이며 가슴 한편에 고
여 있지만, 고단한 육신은 그 근심까지 쓸어안고 잠이 드는 것이다. 내일 아침에
도 새벽닭이 홰치는 소리는 근심이 먼저 듣고 깰 것이다. 강실이의 부채끝에 물
큰 땀냄새가 묻어난다. 뭉근한 오류골댁의 머릿내 같기도 하다. 오래 쓴 대소쿠
리나 바가지에서 묵은 나무 냄새가 번지듯 오류골댁한테서는 낯익은 체취가 번
져났다. 부치던 부채를 놓고 강실이는 오류골댁의 등허리에 손을 대본다. 땀이
축축한 삼베 적삼의 감촉이 손끝에 닿는 순간 그네는 코끝이 매워, 자기도 모르
게 어금니를 문다. 물고 있는 잇살로 눈물이 배어 오른다. 금방 입 안에는 배어
오른 눈물이 찐득하게 괸다. 그것을 토해 내듯 강실이는 돌아 앉아 등잔불을 불
어 끈다. 작은 불꼬리 하나가 밝혀 주고 있던 방안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쓸
려든다. 그러자 등잔의 심지에서 내쫓긴 불꽃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강실이의
살갗 속으로 숨는다. 불꽃이 비늘을 일으킨다. 강실이는 오스스 한기가 들어 어
깨를 오그린다. 어둠 속에서 보아도 그네의 어깨는 각이 져 있다. 이미 둥글고
무지개 같던 살진 어깨가 아니다. 머리 타래조차 힘에 겨워 보일 만큼 비쩍 마
른 어깨는, 숨을 쉴 때마다 그대로 내려앉을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숨소리가 너
무 크지 않았는가 놀란 그네는 고개를 돌려 어머니 오류골댁의 기척을 살피고는
다시 돌아 눕는다. 삼베 홑이불도 무겁게 느껴진다. (훌훌 다 걷어 내던지고 나
도 아느실 형님마냥 이리저리 떠돌아 다닐 수 있었으면 그나마 좋으련만.) 아느
실 형님이란 둔덕 너머 아느실 최씨 문중으로 출가해 간 진예를 이름이다.
그 진예가 꿈결같이 이 마을에 나타난 것은 달포 전 늦은 봄이었다. 그러지 않
아도 연전에 강수의 사혼이 있고 나서, 진예 걱정을 안한 바 아니었는데, 그쪽에
서 별다른 소문이 들려오지 않자 적이 안심을 하던 끝에, 그네가 밭머리 저쪽에
모습을 비친 것이다. 마침 느티나무의 연한 잎을 가루에 섞어 느티떡을 찌고 있
던 강실이는, 정지 문간에 이른 진예가 부르는 소리에 소스라쳐 일어섰다. 순간
에 웬일인지 반가운 마음보다 가슴이 내려앉아 얼른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가까스로 진정하고는
"형님"
하면서 그네의 두 손을 부여잡았다.
"응, 잘 있었는가."
진예는 손을 잡힌 채 웃었다. 한쪽으로 입술이 기울어지는 엷은 웃음이었다.
"어려서 본 모색이 그대로 있네."
이번에는 강실이가 웃었다. 설핏 얼굴에 스치다 마는 누른 빛이 도는 웃음이었다.
"방으로 좀 들어가시지요. 내, 떡솥에 불 좀 봐 놓고..."
"아니, 나 저 마루에 앉었을라네. 밥만 한 숟가락 먹고는 또 갈 데가 있어서."
진예는 굳이 방으로 들어가라는 강실이의 말을 마다하고 마루끝에 앉았다. 마치
눈치를 보는 사람 같았다.
"다들 어디 가셨는가 부네?"
"예. 밭에."
"으응."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한참이나 고개를 끄덕이던 진예는 문득 강실이를 불렀
다. 정지로 들어가려던 그네가 돌아보자
"내가 밥 바구리를 어디다 두고 왔으까...?"
하는 것이었다. 그 얼굴빛이 몹시 근심스러워 보였다.
"밥 바구리요?"
"응."
"그걸 들고 오셨던가요?"
"응."
"어디 들러서 오신 데다 두고 왔는가 부지요."
"아니, 아무 데도 안 들어갔는데."
"거게 무에 들었는데요?"
"...밥."
"밥이요?"
"응."
고개를 비스듬히 떨구고 앉아 손가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진예는 대답했다.
할 수 없다는 듯한 낯빛이엇다. 그때서야 비로소 강실이는 진예가 예사롭지 않
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얼른 아궁이의 삭정이를 대강 살피고는 사립문 쪽
으로 나갔다. 진예가 걱정하던 밥 바구니는 삼베 보자기에 꽁꽁 묶인 채 사립문
간에 놓여 있었다. 둥그렇게 휘인 손잡이에 뚜껑까지 덮인 대나무 채롱이었다.
속에는 밥이 하나 가득 담겨 있는지 묵근했다. 그것을 들어올리는 강실이의 마
음도 밥 바구니만큼 무겁게 처져 내렸다.
"형님, 여기 있구만요."
"으응."
진예가 알았다는 시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 돌아 댕길라면 배가 고파서."
"어디를 가실라고요?"
"몰라."
"집에서는 형님 여기 오신 거 알고 계신가요?"
"모올라..."
"말씀도 안허고 오셨는가요?"
"몰라."
"애기들은 어쩌시고요?"
"..."
고개를 수긋하게 숙이고 있던 진예는 강실이의 치맛자락을 별안간에 움켜쥐며
좌우를 훔쳐보는 것이었다.
"형님."
정신차리시오. 왜 이러시는가요. 정신 좀 차리고 찬찬히 말씀해 보시오... 형님.
강실이는 움켜쥔 치맛자락을 끌어당기는 진예의 손을 감싸쥐었다. 그러자 진예
는 후두둑, 눈물을 떨어뜨렸다.
"점심은 자셨소...?"
눈물 범벅이 된 진예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강실이는 떨리는 소리로 묻는
다. 진예는 시름없이 고개를 흔든다. 그럴 때 보면 성한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가 없었다. 다만 그네의 눈빛이 몽롱하게 풀린 채 어디라고 할 것 없는 허공에
못박혀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 얼른 상 채려 드리께요."
"... 내 밥 여기 있어."
진예는 마루끝에 놓인 밥 바구니를 무릎에 끌어올려 두 팔로 보듬었다. 소중한
것을 감추듯이 아예 얼굴까지 삼베 보자기에 파묻는 양이 마치 어린아이들의 탯
거리 같았다.
"이리 주시지요. 내가 정지로 가지고 가서 상에다 봐 오께."
강실이가 바구니에 손을 대자 소스라치며 고개를 털어내 버린다. 그리고 아까보
다 더욱 안간힘을 쓰며 채롱을 끌어안는다.
"날도 더운데, 밥이 쉬겄네요."
하며 강실이는 억지로 빼앗다시피 밥 바구니를 빼냈다. 그런 그네를 혼자 마루
에 앉혀 놓고 돌아서다 말고, 강실이는 목젖에 치미는 뜨거운 김에 허억, 숨이
막히더니 그예 눈물을 쏟고 만다. 진예는 언제 울었는가 싶게 치마귀에 말끔히
얼굴을 닦아 내고는 한가롭게 마당과 토담을 바라보았다.
"... 찔레꽃, 참 좋으네..."
토담 귀퉁이에 어우러진 찔레 덩굴에는 하얀 꽃이 벙울 벙울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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