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 왜 사람을 보고 그렇게 놀래냐?"
아무렇지도 않게 마당으로 들어서다가 노랗게 질린 딸의 얼굴에 오히려 놀란 기
응이 의아하게 물은 일조차 있었다.
"저 아이가 요새 어디 아픈 거 아니요? 어째 저렇게 시름시름 사람이 맥이 없는
고? 아직 나이 젊은 것이."
"말은 못해도 제 속에 근심이 채인데다가, 여름을 타서 그러겄지요."
"좀 물어 보고 그래 보아. 혹시 가슴애피라도 있는가."
"아이고, 가슴애피는 무슨. 아직 나이 젊고 어린 것이. 제가 무슨 그런 게 생길
만큼 모질게 속상헐 일 있다고."
"딸자식은 애물이라 낳고 나서도 한숨이고, 키울 때는 살엄음 같고, 나이 먹으면
보낼 일이 걱정이고."
그뿐인가. 보내고 나서도 한시 잠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 시집살이 매운 줄
을 누가 모르리. 그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나날이 어찌 편하겠는가. 그래서
전생에 죄가 많은 사람이 금생에 여자로 태어난다고 했던가 보다. 그렇다고 품
안에 가두어 둘 수도 또한 없는 일이어서, 어찌 되었든 여의살이를 시켜 주어야
부모로서 할 도리는 다하는 셈이 아닌가.
"그나저나 갑갑한 일이네요. 짚신도 짝이 있다고 우스갯소리 할 일이 아니라, 발
벗고 찾아댕겨야 무슨 결말이 날는지. 아무리 시절이 흉흉하고 우리 가세 곤란
하다고는 허지만, 이렇게까지 마땅한 혼처가 없을까요?"
아닌게 아니라 그러했다. 옛말에도 딸은 귀한 데로 시집 보내고, 며느리는 낮은
곳에서 데려온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집안 살림 형세가 남만 못하다고 해서 그
것이 혼사를 가로막을 만한 흉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강실이가 어떻게 키운 아인데, 흠도 티도 없이 빙옥 같이 자란 것을 어떻
게 아무한테나 줄 수가 이따요...? 고운 용색이나, 범절이나, 어디 빠질 데가 있
어서."
"그것을 누가 모른다든가?"
온 문중에서도 다 알고 인근에서도 다 안다. 어려서 자박거리며 걸어 다니기 시
작할 때부터도, 강실이의 보얀 얼굴과 고운 탯거리를 귀여워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뿐이랴, 자라나면서 남다르게 어여쁜 자태로 보는 눈을 즐겁게 하더
니, 하나하나 익히는 숙덕 또한 칭송이 자자했었다. 누구보다도 청암백모님께서
저것을 얼마나 귀애하셨던고. 저렇게 실섭만 안하셨더라면 부모가 못다 한 몫을
대신 맡아 해 주셨을 것을, 그저 아비가 못난 탓으로 애꿎은 자식 일이 세월을
썩히며 터덕거리는 구나. 그런데 더욱 알다가도 모를 것은 그간 몇 군데 괜찮다
싶은 곳에서 말을 꺼냈다가 그만 흐지부지 되고 만 일이었다. 첫 자리에서 냉큼
호감을 표시하기 민망하여
"좀 생각해 봅시다."
정도로 미루었던 집안 쪽이 슬그머니 그 말을 거두어 버린 적이 여러 번 있었
다. 채근하여 묻기도 어렵고, 이쪽에서 서두른다는 것은 더욱이나 체면이 서지
않아서 서운한 대로 단념했던 것이다.
"고슴도치 제 새끼라고는 허지만, 조선에 강실이만한 규수도 흔치 않을텐데, 늦
게 가야 좋은 사주를 타고났는가."
그렇게 말끝을 흐리는 것을 듣는 강실이는 입 안에 신물이 괸다. 창자 어디에서
부터 쥐어 틀며 쓰라린 기운이 가슴으로 밀고 올라와 그러는 것이다. 백반을 물
고 있는 것만큼이나 시고 떫은 침이 그방 한 모금이 된다. 마땅하게 뱉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삼키면 살 속에 생채기가 난 듯 쓰리며 캥겼다. 바늘로 속을 긁
어 내는 것도 같았다. 가슴애피. 이 쓰라리고 독한 슬픔. (소문이 났는가 보다...)
강실이는 입 안의 시디 신 침을 삼켜 넘기듯이, 그 생각을 삼킨다. 새벽이나 한
밤중에 눈을 떴을 때, 어김없이 긁히는 가슴패기에서 신물이 넘어오고 그때마다
(오늘은 아버지가 논에 나가셨다가 내 소문을 듣고 오실는지도 몰라.) 하는 두려
움이 소름처럼 살갗을 훑고 지나갔다. 아니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머리 복
판에 그 생각은 웅크리고 틀어 앉았다. 그러면 그만이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기
만 하면 덜미를 잡힌 듯 목이 답답해지고 가슴이 뛰어 진정하기 어려웠다. 자던
잠을 깬끝이라도, 다시는 잠들지 못하고 말았다. 맷돌을 얹어 놓은 것처럼 답답
한 가슴은, 일어나 앉아 보아도 숨을 내쉬어 보아도 내려가지 않았다. 그 맷돌의
무거움은, 가슴에 고인 신물의 무게 같기도 하고 걸려있는 한숨의 무게 같기도
하였다. 아니면 그것은 서러운 사람, 강모의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아, 오라
버니.) 강실이는 얼굴을 베개에 묻고 만다. 자칫 울음이 터져 나와 버리면 곁에
서 잠든 오류골댁이 깰 것이다. 어금니를 물어, 소리가 터지지 않도록 있는 힘을
다한다. 그런데도 어찌할 수 없는 눈물이 배어나면서 차갑게 베개를 적시었다.
한번 길을 찾은 눈물은 저절로 흘러내리고 또 흘러내린다. 눈물에도 응어리가
있는 것인지. 이미 베개 속으로 흥건하게 스며든 눈물이 끈끈한 점액인 양 찐득
하였다. (무정한 사람...) 하염없이 솟아오르는 눈물에 섞여 강모의 모습이 젖은
채로 떠올랐다. 그 모습이 어둠에 흥건하였다. 강실이는 어둠을 밀치고 일어나
앉는다. 마치 그대로 누워 있으면 자신을 누르고 있는 어둠이, 그대로 맷돌짝이
되고, 바윗덩이가 되어 짓눌러 버릴 것만 같은 숨가쁜 심정 때문이었다. 그 어둠
은 형체도 없는 연기나 안개이면서도 또한 밀어낼 길 없는 뚜렷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강모. 한 사람의 무게가 한 생애를 능히 눌러 버릴 수도 있는 것, 무슨
질 긴 인연과 질긴 업을 타고났길래, 그 이름은 그저 스쳐 지나가지 못하고 서
리서리 어둠을 감고 있는가. 각진 강실이의 어깨가 간신히 어둠을 이기고 앉아
있었다. 그 내리누르는 힘을 버티어 보기에는 너무나도 메마른 어깨이다. 어둠은
그네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네의 몸 속을 점령하여, 삼킬 듯 무너져들다가 숨
을 내쉴 때면 한 웅큼씩 밀려났다. 그네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어머니
오류골댁의 숨소리르 따라 자신의 토해 내는 한숨을 다스려 보려 한다. 고르게
나누어 조금씩 뱉어 내야 할 한숨은 저절로 터져나와 가누어지지 않는다. (매정
한 사람...) 잦아든 한숨이 핏줄로 스며들면서, 그네 자신이 살도 뼈도 없는 바람
소리 같은 것으로 스러져 막막한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만나보기라도
하였으면, 속에 있는 말이라도 시원하게 쏟아내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심정, 손
톱만치라도 내 들어볼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으랴.) 여한도 없지. 무엇을 더
바라리오. 우리가 서로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
다. 순한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이었다면 물결이 흘러가듯 순리로 흘러갔어야 할
일. 부질없는 마음이 소용돌이 일으키며 솟구쳐 올라, 길도 없는 공중에서 물 밑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이런 허망함에 빠지지는 말았어야 한다. 내 그것을 어
찌 모르리. 사촌이면 지극한 사이, 그것만으로도 이승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가
까운 인연인 것을 새삼스레 돌아보는 강실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등을 구
부리며 소리 죽여 운다. 이제는 돌이켜 본다 한들 무엇에 쓰겠는가. 절구에 짓찧
은 손가락의 살점처럼 이미 피멍이 든 채로 떨어져 나간 사람과의 인연을, 이리
저리 기워 맞추어 다시 이어 보려 하여도 하릴없는 희롱에 불과하게 되다니. (그
대로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모든 것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으련만, 속눈썹 하나
빠지지 않고 그대로 있으련마는.) 그러나 이미 모든 일은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되돌아와 어루만지며 다시 나누어 볼 아무런 가닥도 남기지 않고. 강실이는 율
촌 큰집의 솟을대문이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던 밤을 떠올린다. 그날 밤 어머
니 오류골댁이 동녘골아짐네 굿자리로 가면서
"일 보아서 중간에라도 나오게 생겼으면 일어날 것이니 깊은 잠 들지 말고 있거
라. 데릴러 오마."
하던 말이 지금도 엊그제 저녁의 소리인 양 귓전에 남아 있다. (깊은 잠 들지 말
고 ... 데릴러 오마.) 허나 오류골댁은, 딸자식이 잠 못 들고 있는 이 밤에 아무것
도 짐작하지 못한 채 혼자서만 자고 있는 것이다. 재작년 여름 그때, 새벽녘에야
강수의 명혼이 대강 마무리지어졌었다. 주섬주섬 자리를 치우면서 먼저 일어선
오류골댁은, 서둘러 큰집으로 올라갔다.
"강실아... 강실아..."
큰방 문앞에 서서 낮은 소리로 딸을 부르는 기척에 율촌댁이 문고리를 열고 내
다보았다. 율촌댁은 초저녁에 잠깐 동녘골댁 일에 얼굴 비쳤다가 먼저 집으로
왔었다. 청암부인 때문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는 탓이었다.
"자네 지금에야 가는가?"
"예."
"들어와."
"내려가 봐야지요. 강실이란년, 여기 있는가요?"
"아니."
율촌댁은 반문하듯이 말꼬리를 세워 대답한다. 목소리에 잠기가 묻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난 밤에도 앉아 새우다시피 한 모양이었다.
"왜? 여기 온다고 했는가?"
그 말에 오류골댁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안 왔는가요?"
"그래.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다녀가지도 않았는데."
"제가 엊저녁에 대문 앞에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여기 안 들어오고 어디를 갔단
말이까요?"
"자네가?"
"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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