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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完, 46)

카지모도 2024. 2. 16.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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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모가 왔는가요?"

"그렇다네. 아까 참에 수천양반이랑 같이 큰집으로 올라가데. 좀 들여다볼까 싶

드구마는, 무슨 좋은 일도 아니고 해서 그냥 먼 바래기로 보기만 했네."

"소문에는 하도 허황한 것이 많어서 무단히 쓸데없는 말들을 허는 거겠지. 짐작

만 속으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난다던가? 막상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나도 정신이

산란해서 자네한테 이야기나 할까 허고 왔구만."

"어쩔라고 그랬으까요. 그 애가 암만해도 무슨 신수 액땜을 단단히 허는가 보네

요. 후여어. 저놈의 달구새끼. 무어 먹을 게 있다고 꼭 저렇게 마루 위로 올라오

는지 모르겄네. 하루 종일 닦아내도 닭 발자욱이 부옇게 찍히니. 강실아. 거 간

짓대 이리 가져 오니라. 아주 들고 앉어 있어야겄다."

수천댁과 말을 주고받던 오류골댁이 손짓으로 닭을 쫓았다. 그런데도 강실이는

얼른 일어서지를 못했다.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떨리는 탓이었다. 아까 낮에, 올

다래 피었는가, 면화밭에 나갔던 오류골댁이 머리에 쓴 무명 수건을 벗어 들고

치맛자락을 두어 번 털며 마당으로 막 들어설 때, 뒤미처 따라온 수천댁이 툇마

루끝에 먼저 앉았다. 두 사람의 얼굴빛이 무거웠다. 강실이는 그때까지도 뙤약볕

아래서 호박과 가지를 썰어 말리고 있었다. 그네의 손등도 땡볕에 익으면서 고

지나물 한가지로 말랐다.

"강실아. 어머니가 간짓대 가져 오라고 안허시냐? 그러고, 이렇게 볕뜨거운 날은

마당 가운데 쪼그리고 앉었는 거 아니다. 더위 먹어. 웬만큼 그늘에서 좀 쉬어

라. 여고베, 저것이 요새 안색이 영 안 좋데. 속이 허한가? 아프단 말은 못 들었

고."

"그렇지 않어도 걱정이네요. 이런 가문 날에는 실헌 사람도 머리 정신이 어지러

운데."

마지못하여 일어선 강실이가 헛간 모퉁이에 세워둔 간짓대를 오류골댁에게 건네

주다가 휘청 어지러워 마루 기둥을 붙잡았다. 발이 공중에 뜨면서 머리 속이 노

래진 탓이었다.

"거 봐라. 어른 말 안 듣고. 아직 젊으나 젊은 몸이 그렇게 허깨비 같어서 너도

큰일났다."

근심스럽게 혀를 차는 수천댁이 큰집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집안대소가, 무어 몇 식구 되기나 한다든가? 집안 내림이 그런지라 손이 귀해

놔서 기껏해야 이 애들뿐인데. 큰집에 강련이말고는 강모 하나, 작은집에 강실

이, 우리한테 요것뿐인 자식들이 다른 집 열이나 스물이나 되는 몫을 해야 할

것을."

"그나저나, 대실 질부도 마음 고생 좀 허겄구만요. 시앗을 보면 부처님도 돌아앉

는데, 아무리 대가 찬 사람이라고는 해도 여자 심정은 매일반 아닌가요?"

"아이구. 그거야 말해서 무엇 허는가? 오죽하면 시앗하고는 하품도 안 옮는다고

안 그래? 하나, 그것은 여자 말이고, 열 계집 싫다는 남정네가 어디 있어. 옛말

에도 있지 않던가 왜. 하도 여색을 밝히고 두름으로 엮어서 첩실을 들이는 서방

님 때문에 속이 상한 본부인이 하루는 그랬더라네. 내가 머리 깎고 중이 되고

말지 이제 더는 못 참겄소, 오늘이 이별하는 날이니 그리 아시오. 그 말을 들은

서방님이 무릎을 치며 반가워, 거 좋은 일이요,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여인을 가

까이 하고 거느려 보았지만 그 중에 스님은 없었는데 이제는 소원을 풀게 되었

소. 그러니 마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남자들 속셈은 다 그런 거라대.

단지 요령껏 단속을 해야지 강모 마냥으로 패가를 할 정도가 돼서야 쓰겄어? 거

기다가 망신살까지 뻗쳐 놓았으니."

"듣고 보니 그렇기도 허겄네요. 그래도 그렇지. 어디 도무지 말 헤길 일이 없을

것 같던 착실한 강모가, 느닷없이 이런 일을 벌일 줄이야 누가 알었을까요?"

"짐작한 것이라면 놀래기나 덜하지."

강실이는 아직도 귓속에서 윙윙거리는 어머니와 수천댁의 이야기를 몰아내려고

돌아앉는다. 어둠이 무거워 그만한 움직임도 힘에 겹다. 이대로 앉은 채 돌이라

도 되었으며. 그랬으면 좋으련만. 여기서 큰집이 몇 천 리 바깥인가. 이 젖은 베

갯머리에 눈물 스미는 소리까지 얼마든지 들릴 만한 거리인데, 그곳은 아득하고

아찔한 절벽의 저쪽 건너편 단애와도 같았다. 그 어둠 속에서 강모가 돌아눕는

다. 옷자락 버석이는 소리가 강실이의 귀에 역력히 들린다. 그의 숨쉬는 소리도

들린다. 그네는 가슴살이 마치어 흡, 한숨을 끊는다. (오라버니. 나는 오라버니의

무엇인가요... 숨소리도 들리는 지척에 계시면서 오라버니는 내 소리 무엇을 들

으시는가요... 무슨 기척 듣기는 들으시는가요.) 어여쁜 조카 철재를 안고 의연하

게 대청마루에 서 있던 효원의 모습이 강모의 뒤쪽에 비친다. 그네에게는 알 수

없는 광채가 났다. 서릿발 같은 광채였다. 그 빛에 지질려 강실이는 더욱 깊고

캄캄한 어둠 속으로 떠밀린다. 철재의 희고 둥근 얼굴이 해도 같고 달도 같다.

눈이 부시어 바로 볼 수가 없었다. 다시 보니 철재는 강모였다. 기둥처럼 우뚝

선 효원이 그 두 팔로 강모를 안고 있는 것이다. 무안하고 서러운 강실이가 죄

지은 듯 그 모습을 훔쳐본다. 효원이 손들 들어 저리 가라는 시늉을 한다. 그네

의 얼굴은 푸르고도 여염하다. 평소의 효원이 아니었다. 본 일이 없는 얼굴이다.

자태조차도 농숙하여 보는 이를 휘황하게 한다. 무르녹듯 익어 넘치는 몸매에

교태가 어린다. 그네는 강모를 휘어감으며 강모에게 안긴다. 두 사람이 붙안고

선 자리에 요기가 빛난다. 오유끼. 강실이는 머리를 젓는다. 허공에 쓴 글씨를

손짓으로 지우듯, 그네는 머리를 저어 강모를 지우려 한다. (아아, 오라버니, 제

발 나를 좀 놓아 주시요. 나를 생각해서라도 내 마음속에 오지 마시요... 나는 오

라버니를 막아 볼 힘도 없고 도리도 없으니 제발 어디 안 보이는 데로 가 주시

요... 내 속에 마음대로 스며들어 저미게 하지 마시고, 오라버니, 어떻게든 생각

좀 안 떠오르게, 생각 좀 안 떠오르...) 강모의 모습은 시도 때도 없이 강실이가

눈만 뜨면 뒷머리를 후려치고, 숨만 쉬면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다. 마치 귀신에

씌인 것처럼 그물을 뒤집어쓰고, 헤어나지 못하게 조이는 이름을 향하여 강실이

는 주문을 왼다. (오라버니. 내 생각에 오지 마시요... 오지 마시요... 내 사지 어

느 구석에도 흔적 남기지 마시고 제발 거두어 떠나 주시요... 부질없소... 내가 오

라버니한테 야속한 짓 한 일 없건마는 무엇이 노여워서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나를 미워한단 말씀이요... 보이는 몸을 감추고 들리는 소리를 막아 버릴 양이면

아예 정도 걷어 가야지. 무엇 하러 부질없는 그림자만 남아서 내 심정을 덮고

있으신가요... 내가 혼자 견딜 일이 아직도 남었는가요.) 캄캄하고 캄캄하여라. 뒤

덮인 그림자 때문에 하늘을 보아도 캄캄하고, 들판을 내다보아도 캄캄하였다. 돌

아앉아도, 일어서도, 손을 내밀어 보아도 모든 것은 암담하여, 이가 시리게 고적

했다. (내 일신이 이럴진대 내 앞에 남은 한평생이라는 것이 어찌 광명스러우리.

목숨을 보존하고 있는 형상만도 뻔뻔한 노릇이다. 하물며 내 무슨 영화를 바라

랴. 아마도 나는 천하디 천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이 궂은 명운을 부모님께

보여 드려야 하는 일이 불효 중의 불효로구나. 허나, 난들 나를 어찌하랴.) 강실

이는 그대로 방바닥에 고꾸라진다. 무거운 어둠이 자기를 내리덮는다. 아직도 날

이 새려면 멀고 먼 한밤중. 서리를 틀고 목을 내리누르는 캄캄한 어둠은 구렁이

처럼 그네의 가슴에 또아리를 짓는다.

 

 

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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