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참에 평순네에게 해붙였던 말끝의 기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지 옹구
네는 볼따구니가 빨개져서 춘복이 쪽으로 돌아눕는다.
얼기설기 얽은 농막이라 시린 외풍이 선뜩했다. 춘복이는 팔베개를 한 채로
멀거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밤이 기울어 그 모습이 보일 리 없지만,
이렇게 옆엣사람 생각도 안하고 한동안 말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러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아이 그렁게 원뜸에 새서방은 사랑으다 가돠 놔도 소용없고 인자는 전주로
아조 도망을 가 부렀다 그거이제?”
아까도 한 말인데 다시 되짚는다. 춘복이는 대꾸가 없다. 무슨 생각을 해도 골
똘히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먼 그 기생 첩실은 어쩠스꼬? 데꼬 살으까?”
“머 도망끄장 감서, 지집 내부리로 갔을라고요?”
“아이고매 정나미야. 갔을라고요는 무신 쎄빠질 노무 갔을라고요오? 참 내.”
옹구네는 샐쭉하여 핀잔을 준다.
그네로서는 이렇게 말을 올려붙이는 순간이 무단히 섭섭한 탓이었다. 춘복이
가 투박한 대로 말을 놓을 때는 마치 자기와 한살인 듯 여겨지다가도, 이렇게
평상대로 말하면 별안간에 허망해지며 내쫓긴 듯한 기분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그만 집으로 가 보라는 무언중의 신호이기도 한 셈이어서 더욱 그렇게 느
껴졌다. 몸도 마음도 식었으니 이제 한 잠 잘 일만 남았다는 시늉 같기도 하여,
문득 가슴이 선뜩해지기까지 하는 말투였다. 어쩌면 그네는
“옹구네, 우리 기양 살어 부리제.”
하는 말을 은연중 애가 잦게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춘복이는,
언제나 새로 만난 남정네처럼 어설프고 약간은 심란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그 심정을 말투로 드러내고 마는 것이었다.
“헐 일도 잔상도 없능갑소. 무신 애들맹이로 그께잇 거를 갖꼬 다 트집이다
요?”
“흥 허기사 머 나 같은 년은 마느래도 아니고 첩실도 아닝게 암칙게나 대거
리헌들 따질거이 머 있당가?”
“왜 또 그러시요?”
“내가 머 무신 거마린 중 아능게빈디, 뒤집어 보먼 자개도 손해난 거없지 멀
그리여? 떠꺼머리가 맘만 먹으먼 엎어질 예펜네 공으로 챙게두고, 솔레솔레 꽂감
꼭지 빼먹는 것도 복이라먼 복인디, 맨날 그렇게 내 사정 봐 주는 사램맹이로
그리여?”
“맨날 들어도 그 소리. 인자 알었응게 그만허시오. 아닝게 아니라 나도 품삯
안 주고 연장 갈응게 좋소, 좋아.”
옹구네가 그 말에 발딱 일어나 앉는다. 짚수세미같이 엉클어진 머리채 뒤꼭지
가 어둠 속에서도 우우 소리를 지르며 일어설 듯한 기세다.
그러나 그네는 아직도 아까 그 자세대로 누워 있는 춘복이를 눈이 돌아가게
흘기기만 할 쭌, 얼른 무어라고 입을 떼지 못한다. 아마 분이 치받치는데다가 야
속한 생각에 몸이 떨리는 모양이었다.
“머머? 상놈 자식 안 날라고 펭상에 장개를 안 들겄다고? 핑계가 좋아서 떡
을 사 먹겠네. 매급시 그러지 말드라고. 내가 홀메미라고 깜보능게빈디이. 이리
뜯어먹고, 저리 발러먹고, 공것잉게 맘대로 맛보시겨. 그러다 개빽다구맹이로
고샅으다 동댕이쳐도 됭게에. 누가 머래야? 내가 들러붙어서 찐드기맹이로 떨
어지도 안허고 살자고 그러께미 장개 안 간다고 으름장 놓능거 내 다 안다고오.
그런디, 이건 알어 두어. 상놈은 상놈 낳고, 상년은 상년 낳능 게에. 그런디, 지
아무리 잘 났어도 상놈은 상년 만나 사능 거이여. 무신 천지개빅을 허겄다고 꿍
꿍이여, 꿍꿍이가.”
춘복이는 아예 귀를 봉창한 듯 꿈쩍도 하지 않고, 옹구네는 더욱더 약이 올라
말끝이 착착 감기게 찰져진다.
그네는 화가 난다고 말소리가 높아지거나 빨라지지 않는다.
그럴수록 조근조근 누비듯이 말하는 것이다.
“흐응, 내가 그 속 모르는 중 아능갑서. 어디 귀 빠진 눈먼 년, 중인 집구석
으서라도 데릴사우로 데레가기 바래는 거이제? 앉은뱅이 꼽사라도 좋응게. 그리
장개가서 벵신 뒷바래지험서 저도 벵신 노릇 따라 허고라도, 상놈 소리 안 듣고
싶은 거이제?”
“핫따, 거 시끄럽소.”
드디어 더 참지 못하고 홱 돌아누워 버리는 춘복이 서슬에 흠칫 밀려나며 그
네는 모질게 해붙인다.
“그러먼? 그러머언. 원뜸에 강실이가 자개 차지 될 중 알었당가? 거그는 대
체나 더 좋겄네? 양반 중에 양반잉게. 맵씨 좋고 태깔 좋아 향내가 난당가 냄새
가 난당가, 남원골에 쩌르릉 허는 양반의 따님인디, 거그다가 몸뗑이도 헌 것 되
야 부렀겄다. 온전헌 시집 못 갈 것은 불속을 디리다보디끼 훤허고. 나이는 먹
고, 오란 디는 없고, 잘 되았네. 업어오지 그리여? 오매불망 정든 님은 기생첩을
옆에 찌고 전주로 도망가 부렀담서, 더 잘 되았네 그리여.“
순간 춘복이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쩍 빛났다. 마치 부싯돌을 맞부딪친 것 같
은 시퍼런 빛이었다. 그 느낌이 옹구네에게까지 전해져 오는 섬뜩하고도 예리한
안광에, 오히려 말을 내쏘던 그네가 멈칫하고 몸을 움츠린다.
“왜 그런당가?”
벌떡 일어나 앉는 춘복이의 기세에 옹구네가 뒤로 밀리는 소리로 묻는다. 한
대 후려치는가 싶었던 것이다.
“아니라요.”
“내가 머 못헐 말 했당가?”
아무래도 쭈빗거리는 투로 춘복이의 기세를 살피던 그네는 주섬주섬 두루치를
챙긴다. 이럴 때는 길게 말하는 것보다 얼른 일어나 집으로 가는 편이 더 낫다
고 생각한 것이다.
어둠 속이지만 치마 솔기가 뒤집힌 채 입고 나갈 수 없는 노릇이라 더듬거리
면 옷을 간추린 그네는
“나 갈라네, 그런디 한 마디는 허고 가야겄어. 여자가 마음에 한을 품으면 오
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안허등게비? 내가 암만 막 사는 년이라고는 허드라
도, 쓸개끄정 썩은 년은 아닝게, 내 오장육부에다 바늘 꽂든 말드라고. 무신 일
을 헐 때 허드라도, 나를 살살 달개감서 히여. 나 설웁게 말고오.” 하며 못을
박는다.
“조심해서 가기요.”
다른 때 같으면 그 말 정도는 꼭 하는데 오늘 밤은 그조차 없다. 여전히 춘복
이는 눈에 불을 켠 채로 무엇엔가 넋을 흘린 듯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런 모양을
힐끗 바라보고는
“나는 갈랑게.”
하더니 옹구네는 덧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쌔앵 몰아친다.
“아이고매 호랭이 물어가겠네. 오살 노무 바램이 기양 살을 비어 갈라고 그
러네에.”
거기다가 또 무어라고 구시렁거리며 짚신짝을 꿰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농막 안은 괴괴해진다. 이따금 회초리로 후려치는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다.
(...강실이...?)
아까 옹구네가 내쏘던 말이 그대로 춘복이 가슴 복판을 쒜뚫고 있는 것이다.
뚫린 복판에 꽂힌 이름은 곧 화살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소스라치게 놀
라운 발견에 그는 아직도 흥분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화살 맞은 자리에서 선혈이 쏟아지는 것 같은 뒤설렘을 가누지 못하는 춘
복이는 벌떡 일어나 덧문을 열어젖히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동짓달의 매운 바람
이 오히려 그의 더운 몸을 식혀 주기에는 알맞은 것이었다. 막힌 피가 터지면서
철철 흘러 넘치는 흥건함에 자신의 몸을 내 맡긴 채 숨도 쉬지 않고, 매안 마을
의 종가 쪽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검푸른 밤하늘의 별들이 소름 끼치게 영롱한 빛으로 반짝였다.
그 별들을 쓸며 바람이 허공을 날카롭게 가를 때마다, 별빛은 더욱 차갑게 깜
박인다.
매안 문중의 마을은 여기 거멍굴에서는 아득할 만큼 멀어 보인다. 아니, 멀다
기보다는 보이지 않는다는 편이 옳았다. 불이 밝혀진 방문이 하나도 없어 그렇
게 짐작되기도 하겠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닌, 물을 건너고 굽이를 돌아 엄중한
막을 치고 저만큼 있는곳.
문중.
그 코앞에 바싹 엎드려 있을 때도, 대문간 앞을 지날 때도, 그곳은 아득하기만
했었다.
어쩌다 무슨 심부름 때문에 그들의 앞에 마주 대하고 있을 때도, 그들은 들판
너머쯤에나 있는 사람들처럼 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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