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금 춘복이는, 두 팔을 뻗어 움키면 그 문중의 지붕들이 거머쥐어질
것만 같았다.
그의 우왁스러운 이 짚신발로 걷어차면, 삭은 수숫대 올바자처럼 넘어갈 것만
같은 오류골댁 사립문 쪽을 그는 매섭게 쏘아본디.
(내가 왜 그 생각을 진작에 못했이까. 내가 왜 그것을 몰랐이까.)
춘복이는 주먹을 부르쥔다. 그는 지금 늑대처럼 포효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다. 그가 고함을 지르면 산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거그가 그 사램이 있는 것을 내가 이때끄장은 넘으 일이라고 생각했는디, 그
거이 아니여, 그리여. 그렇제, 그거이 아니여.)
그의 눈앞에 강실이의 모습이 선연히 떠오른다. 항상 먼 발치에서 무슨 죄 짓
는 사람처럼 힐끗 훔쳐 보았을 뿐인 그네였지마, 그리고 그나마도 좀처럼 바깥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라서 정말이지 어쩌다 한두 번 밖에 본 일 없는 사람이었지
만, 지금은 달랐다.
상상 꼭대기 구름 속에서만 노닐다가 꿈결인 양 언뜻 모습을 비치던, 어쩌면
이야기 속의 선녀 한가지로 있는 듯 없는 듯하던 그네. 공배아재나 아짐이 그
이름만 입에 올려도 송구스러운 듯 얼굴에 화기를 띠며 말하던 사람. 우러러 섬
기며 빈말이라도 한 마디 비난도 하지 않던 평순네. 심지어 옹구네조차도 그 태
깔만은 인정하고 시샘을 참지 못하던 사람이 바로 강실이 아닌가. 거멍굴을 잡
아먹을 듯이 으르렁 거리고 있는 대갓집의 골기와 지붕 아래 오붓하게 감추어진
채, 언감생심 이쪽에서 감히 건너다보지도 못하게 감싸여져 있던 사람.
(그것도 인자 예날 이얘기다. 청암마님 돌아가세 바라. 아직끄장은 그래도 그
훈짐이 끊어지들 안했응게 버티고 있었지마는 오늘 니얄 숨 떨어지먼 그 집도
헛간 된다. 누가 지킬 거이냐? 배깥이서 드는 도적은 지켜도 안에서 나
는 도적은 못 막는다고 안 그러등가? 내가 다 안다. 내가 다 알어. 율천샌님
병약허고 새서방은 전주로 달어나 부리고. 거그다가 강실이는 인자 이 마당에
어디로 시집을 갈 꺼이냐. 소문이랑 거이 얼매나 무선 거인디. 허깨비맹이로 뵈
이도 안헝 거이 생사람 목심도 잡는 거인디 말이여. 거그다가 그거이 보통 일도
아니고 들통나면 즈그 집안 낯바닥에 똥칠허는 거인디.벙어리 냉가슴이나 앓겄
지. 쥑이도 살리도 못헐 사램잉게. 강실이는 오도가도 못허고 앉은 자리서 말러
죽게 생겠을 거 아닝가?)
춘복이의 주먹이 안으로 오그라진다. 그는 마치 병아리를 채려는 솔개처럼 오
류골댁 마당 나직이 떠서 빙글빙글 도는 자신을 본다. 발톱을 모은 그의 눈빛이
번뜩인다. 더욱이 그 병아리는 지금 맥없이 한쪽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기회
를 훔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춘복이는 자기도 모르게 보르르 몸을 떤다.
무엇인가 사무치며 치밀어 올라 목이 뜨겁다. 그것은 희열이었다.
(내가 이날을 이때끄장 지달렀능게비다. 그럴라고 이 거멍굴에 엎어 져서 살었
능게비다. 부모가 있이까. 성지간이 있이까. 아무껏도 없는 바닥을 못 떠나고, 허
허벌판 추운 시상을 모진 맘 먹고 친덕꾸레기로 살었다마는, 나라고 언지끄정
상놈으로만 살겄냐. 나는 죽어도 상놈 자식은 낳기 싫었능게 이 육시랄 노무 상
놈 꺼죽 훨훨 벗어 내부리고, 사램이 사는 것맹이로 살고 자펐다. 무지헌 곰도
하눌님 아들을 만나서 인연을 지으먼 곰껍닥을 벗고 사램이 되는디, 나도 언지
든지이 껍닥을 벳게 내고 사램이 되게 해 줄 여자를 만날라고, 그럴라고 지금끄
장 살어왔다...)
춘복이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며 다시 한번 오류골댁 쪽을 노려본다.
(작은아씨. 내 자식 하나 낳아 주시오. 나는 작은아씨한테 양반 자식 하나 얻
고, 작은아씨는 나한테 상놈 자식 하나 얻으시요.)
칼로 새기듯 또박또박 한 마디씩, 끓어 오르는 심정을 오류골댁 쪽의 하늘에
새기는 춘복이는 다시 한번 부를 떤다.
(인자는 시상도 많이 변해 부렀응게요. 언지끄장 같은 시상이 아니여요. 천 년
묵은 낭구도, 죽고 나먼 그 썩은 자리가 개미굴이 되고 마는 거잉게. 사램이 살
자면 팔짜가 뒤재비 칠 때도 있겄지라우. 사램이 비얌도 낳고, 곰이 사람으로 환
생도 하고, 애초에 인연이랑 거이 맹랑헌 거 아닝교? 산골짝으서 나무 패든 나
무꾼도 선녀랑 맺어지면 두룸박을 타고 하눌로 간다는디. 작은아씨는 비얌 한
마리를 낳고, 나는 곰껍닥을 찢어 내고 사람 한마리 낳고, 그렇게 피를 섞어야
나도 두룸박을 타고 승천을 헐랑갑소.)
새파란 불꽃이 일어나는 가슴팍으로 기와 지붕이 무너져 내린다. 그때 춘복이
의 귀에 찰진 옹구네 목소리가 엉긴다. 마침 사람들이 아무도 없고 평순네와 옹
구네 둘이서 정짓간에 허드렛일을 하던 날이었다.
춘복이가 막 장작을 한 짐 부려 놓을 때 한 말이다.
“참말로 마님도 젊었을 적으는 넘 못헐 일 많이 허겠다등만.”
“호랭이 물어갈 노무 예펜네.”
“누가 그랬다등만 그리여. 숭년으, 이 집 대문 앞에서 누구라등만, 나는 듣고
도 넘 일이라, 하이튼지간에 숭년으 장리 쌀 이자를 못 갚어 갖꼬 논밭을 기양
눈 버언히 뜨고 이자로 뺏김서, 이 집 앞으 와서 죽었다등가아, 거랭이가 되서야
타관으로 떠났다등가, 그럼서 저주를 했드리야. 오냐 인제 두고 바라. 느그집 곡
간에 곡식이 썩어 나도 먹을 사램이 없어서 못 먹는 날이 올 거이다. 내 생전에
그 꼴을 못 보먼 죽어서 혼백이라도 남어 갖꼬, 느그집 씨구녁을 막어 부릴 거
이다.”
거기까지 이야기하던 옹구네는 평순네가 휭하니 뒤꼍으로 나가 버리자 그만
제풀에 머쓱해졌다.
“아이고매, 호랭이. 벨라도 얌전을 떨고 자빠졌네. 안 듣는 디서는 나랏님 숭
도 본다는디 지께잇 거이 무신 충신 났다고... 허이고 차암, 즈그 씨어씨등갑다.
내가 머 그른 말 했간디? 밥 한 숟구락이라도 얻어먹을랑게,속도 없는 것맹이로
주뎅이 다물고 살제마는 그런다고 내가 머 없는 소리 지어 낸 것은 아닝게. 그
러고 이날끄장 차알찰 시퍼렇게 물이 넘치든 청호 저수지가 멋 헐라고 작년 올
에사 말고 그렇게 거북이 등짝맹이로 짝짝 갈러졌겄어? 이거이 다 징조여 징조.
이 대갓집도 인자 운수가 다 된 거이제 머. 운수 소관이야 일월성신이나 아시제
누가 알거잉가. 가만히 앉어서도 산데미 같은 노적가리가 지 발로 걸어오는 운
수도 있능 거이고, 쇠시랑 갈고리로 찍어 붙들어도 임자가 따로 있는 운수가 있
능게...두고 봐라. 이집 운수는 바닥이 날텡게. 지금이라도 청호 저수지으 가 보
라제. 집채 같은 조개바우가 헐떡헐떡 그 넓은 저수지 물을 다 둘러 생키고 말
었는디? 조개가 머어이간디, 조개가! 그 주뎅이에서 물을 펑펑 쏟아 내도 시언치
않은디, 이것은 됩대 물 밑바닥끄장 죄다 핥어먹고 패싹 말려 놨이니, 재산이고
자식이고 불어 가기는 애저녁에 그란 거이제. 청암마님 돌아가심서 집안 안팎
운수도 다 한끕에 말어갈 거여. 허기사 머 청춘에 독수공방도 피멍이 맺히게 독
이오를 일인디 자개 속으로 난 자식도 하나 없는 이놈의 시상에다가 누구 존 일
을 시키자고 복을 냉게 놓고 가겄냐. 나 같어도 기양은 안 갈 거이다. 좋은 드끼
넘 보는 디는 기세 좋게 살었어도 그 한 펭상이 어뜬 세월이었겄어? 그 양반이
인자 그 한풀이를 꼭 헐 거이다. 두고바아. 인자 두고 보라고. 내 말 헐 거잉만.”
엉구네는 솔가지를 툭툭 분질러 아궁이에 쑤셔 넣는다. 아궁이의 불길은 옹구
네 낯바닥을 빨갛게 비추며 탄다. 그러다가 후욱 불길이 밀려 나오기도 한다. 밀
려 나온 불길이 솟구치며 춘복이의 가슴에 붙는다. 새빨간 불혓바닥이 그를 둘
러 삼킨다.
그렇게도 옹골지게. 저주에 가까울 정도의 모진 예언을 옹구네는 퍼부어댔었
다. 그러나, 그 예언을 증명해 주는 어이없는 일은 며칠 뒤에 정말로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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