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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5)

카지모도 2024. 2. 22.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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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여울네의 처지가 한없이 가엾고 처량하였으며, 수천샌님 기표가 무서웠다.

그리고, 말라 비틀어져 죽었다는 쇠여울네의 자식 새끼 때문에 목이 메었다.

“어쩌끄나...”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도 그네를 훨씬 놀라게 한 것은, 쇠여울네가 쇠스랑을

거꾸로 치켜 들고 이기채에게 덤볐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참 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구나.

평순네는 떨리는 다리를 오그려 붙이고 쇠여울네가 미친 듯이 찍어 내린 대청

마루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허연 허깨비처럼 앉아 계시던 청암마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네는,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며 송구스러워하였다.

(마님은 정신을 놓고 지심서도 얼매나 마음이 아푸시까잉...저어그, 이러어케

앉어 지시든 양반이, 당신 앉으시던 자리를 저렇게 내리찍으니, 말씸 한 마디도

못허시고, 얼매나 원퉁허고 설우실꼬...참말로 인심도 무섭구나...이 일을 어쩌끄

나...무신 일이 날라고이러까잉.)

평순네는 안절부절을 못하며 서성거린다. 차라리 청암부인이 이런 저런 꼴을

못 보고 못 듣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부인께서 못 보고 못 들으시니

이런 죄로 갈 일이 생기는 것만 같았다.

평순네는 그만큼 심덕이 온순하기도 했으며, 이 원뜸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대하여 아무 원한도 없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원한보다는 오히려 항상 공연히

송구하고 그 은덕이 하늘 같기만한 마음이었다.

더구나, 바로 지난 봄, 밭에서 풋고추와 애호박 한 덩이를 소쿠리에 따 담아

가지고 오다가, 청암부인이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여 곡기를 통 못든다는

말이 생각나서 대갓집에 들렀던 일은 두고 두고 생각하여도 가슴이 벅차고 감격

스러웠다.

가뭄에 딴 애호박이라 물도 제대로 안 오르고 살도 차지 않은 것이었으나, 어

째서인지 한 덩이 드리고 싶었다.

이께잇 하찮은 것을...무신 천도 복송이라고...기양 가까...?

중문간을 들어설 때는 발걸음이 쭈밋쭈밋하여, 누가 볼까 싶어지면서 그냥 돌아

설까 망설여졌다.

산지 사방에서 일꾼들이 이고 지고 오는 온갖 곡물과 진귀한 물건, 새로 난

과일들도 누가 다 먹지를 못하여 썩어난다는 집안 아닌가, 거기다가 소식의 이

기채 때문에, 바리 바리 싣고 오는 갈비짝이며 귀물단지 생선 상자가 몇 날 며

칠을 가도 헛간에 산적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였다. 또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

다.

그런데 이런 애호박 한 덩이를 소쿠리에 담아 가지고 가서, 무슨 우세를 당허

려고 내가 이런 마음을 먹었을까.

평순네는 그만 돌아서고 싶었다. 그러나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대청에 나와

앉은 청암부인의 눈에 띄고 말았다. 옆에서 손부 효원이 부축을 하고 있는 것으

로 보아, 답답하여 대청에라도 나와 앉아 바람을 쐬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냐, 들어오다 말고 왜 가?”

“예...저...아무껏도 아닌디요.”

“그래...?”

청암부인은 더 말이 없었으나, 그때 평순네의 눈에 비친 부인은 예전의 부인

이 아니었다. 허옇게 백발이 되어 버린 그네의 머리와 흰옷이 유난히 그렇게 비

쳤던가. 청암부인은 허깨비처럼 앉아 있었다.

바람만 불면 그대로 펄럭, 누워 버릴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평순네의 가슴을 쩌르르하게 울리었다.

“저...벨 것은 아닌디요. 마님, 진지를 못 잡숫는다고 허길래요. 이애호박 너물

조께 해 잡수시먼 입맛이 나실랑가 허고요...”

자기도 모르게, 민망한 김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평순네는 두루치 자락을 치켜 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고맙구나...내 그렇잖어도 애호박죽이나 좀 먹었으면 했더니라...네가 내 맘

을 잘 보았다...어디 이리 가지고 와 보아...”

청암부인은 쉬엄쉬엄 말하였다.

그리고 그네를 힘없이 손짓으로 불렀다.

평순네는 자꾸만 눈앞에, 그때의 그 허연 허깨비처럼 앉아 있던 마님의 모습

이 떠오른다.

“아주 맛있겠구나...올 농사는...가물어서...고생이 많었지?”

평순네가 두 손으로 올린 애호박 한 덩이를 받아 어루만지던 청암부인의 누렇

게 마른손이 떠오른다. 그때 부인은 애써 미소를 지었었다.

(아이고...어쩌끄나...)

평순네는 내리찍힌 대청마루의 쇠스랑 자국에 몸을 떤다.

그때 기표를 데릴러 갔던 붙들이가 털레털레 그냥 올라와서

“전주 가싯다는디요.”

하고 말한 다음에도, 쇠여울네는 죽어 나갈 만큼 몰매를 맞았다.

그네는, 자기 가슴을 쥐어 뜯으면 쏟아지는 몰매를 피하려고 하지도 않고, 사

정없이, 내리치는 대로 다 맞았다.

해가 설핏할 무렵에야 그네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찢어진 옷자락에 살점

을 너풀거리며 맨발로 좇겨났다.

쇠여울네는 몹시 서럽게 울었다.

이미 다 울어 버려서 목청만 남았을 뿐, 눈물도 흐르지 않는데, 그네는 하염없

이 울었다. 죽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는 절룩절룩 고샅길을 지나갔다. 사

람들은 웅긋중긋 내다보다가 고샅으로 몰려나왔다.

그네는, 자갈이 비죽비죽한 고샅에 핏자국을 찍으며 맨발로 허청허청 걷는 중

에, 연신 코에서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를 닦아냈다.

해가 저물어 밤이 되어서도 동네는 조용해지지 않았다.

조용하기는커녕, 더욱더 술렁거렸다.

어흐으으으.

어흐으응.

쇠여울네가 목을 놓아 우는 소리가 온 마을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흡사 여우가 우는 소리도 같았다. 아니면 늑대가.

아마 날이 새기 전에 쇠여울네는 어디론가 떠나가야 할 것이었다.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가 날카롭게 울음 소리를 채간다. 곡성은 칼로 자른

듯 끊겼다가 다시 바닥에서 솟구친다.

춘복이는 농막 귀퉁이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그 소리를 새긴다.

무섭게 내리치던 몽둥이와 장작이 새파랗게 불꽃을 일으켰지.

개 한 마리 잡는 것보다 더 처참하게 튀어 오르던 피.

이 피를 갚으리라.

그날, 쇠여울에 피 젖은 뒤꼭지, 헝클어진 머릿단이 생생한 피비린내를 풍기며

되살아나, 춘복이를 격렬하게 뒤흔든다.

그는 소름으로 온몸을 훑는 찬바람 속에서 움쩍도 하지 않고 원뜸의 지붕들을

노려본다. 이미 어둠이 깊어 지척조차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그의 눈에는 불을

밝힌 것보다 더 훤히 보인다. 그 중에서도 조갑지를 엎어 놓은 것 같은 오류골

댁의 다소곳한 초가지붕은 더 잘 보인다.

내, 이 피를 갚으리라.

온몸의 힘줄이 땡기면서 주먹으로 모인다.

저절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주먹이 힘줄을 땡기고 있는 것이다.

주먹은 돌멩이보다 더 단단해진다.

(쇠여울네. 나를 야속타 말으시오. 내 이날 이때끄장 안 죽고 살어 남은 죄로,

그 집이서 밥 얻어먹은 죄로 쇠여울네 등짝을 내리치고 말었지마는, 인자 그 몽

둥이, 그 장작으로, 때리라고 헌 놈 쥑여 부릴 거잉게. 오늘 니얄 안되먼 모레가

있고 곱페가 있소. 내 것 뺏기고 몰매맞고, 벵신 되고 동낭치로 쬐껴나는 심정은

죽어서도 섹히지 말고, 살어서도 잊어 부리지 마시오. 시방은 혼자 당헌 것 같

고, 혼자 쥐어뜯음서 울지마는, 두고 보시오. 두고 보먼 알 거이요. 밤이 짚어지

먼 새복이 오고 마는 거잉게. 쇠여울네. 더 울으시오. 더 울으시오. 울다가 숨이

끊어져서 죽어도 좋응게 울으시오. 나도 따러 울고, 공배아재도 따러울고, 그 옆

집이도 울고, 이 거멍굴이 떠내리가게 우읍시다. 언제 한 번도 한 소리로 소리

내 보도 못헌 놈의 벌거지 같은 인생살이, 인제라도 한 소리로 뫼야서 창사가

터지게 울읍시다. 호령 소리가 아무리 크다고 헌들, 우리들이 죽기로 한을 허고

어는 소리보다 클랍디여.)

그때, 춘복이는 쇠여울네의 통곡이 이기채의 고함을 잡아먹을 만큼 커지기를

간절하게 바라며 어금니를 맞문다.

그리고 지금. 이기채를 잡아먹은 통곡 소리가 성난 물결처럼 소용돌이치며 솟

구쳐 올라온 마을을 뒤덮고, 강실이네 오류골댁 초가집을 한입에 삼켜 버리는

환각에 등을 부르르 떤다.

(쇠여울네. 인자 두고 보시오. 죽지 말고 살어서 두 눈 딱 뜨고, 꼭 보시오. 강

실이가, 이놈 춘복이란 놈 자식 새끼를 낳고 마는 것을 뵈야디릴 거잉게. 그날끄

장은 죽지 마시오. 그거이 머 몇 천 년이나 남은것도 아닝게, 쇠여울네, 어디로

가서 살든지 소식 끊지말고 그날을 지달리고 있으시오. 쇠여울네가 울고 내가

울고, 거멍굴에 엎어진 인생들이 울고 울던 설움을 내가 모질게 갚어 줄 거잉게,

오늘 내가 내리친 장작에 어깨 찢어진 거, 너무 야속타 말으시오, 쇠여울네, 미

안허요.)

춘복이의 번쩍이는 두 눈이 어둠 속에서 새파랗게 빛났다.

얼핏 보면 승냥이 한 마리가 거기 서 있는가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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