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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10)

카지모도 2024. 2. 28.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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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없이 그를 대하면 경계심이 앞서고, 사갈처럼 소름이 일던 기표의 눈빛이

강모의 가슴에 와서 꽂혔다. 그리고, 느닷없이 귀청을 찢으며 터져 나오던 희재

의 울음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재작년 여름이었던가. 중문간 마당에서 흙으로 담을 두르고 놀면서 산더미를

쌓듯이 흙더미를 쌓아 올리던 희재의 작은 손.

아아따. 그만 우시요오. 이것이 참말로 곡석이고 참마로 황금이간디요오...이렁

거는 다 흙이요, 흐윽.

이께잇 노무 흙데미, 내가 산에 가서 바지게로 열 번이고 스무번이고 지어다

가 부서 디리께요. 천지에 쌔고 쌨는 거이 흙인디요. 이렁 거는 다 장난으로 집

짓고 노는 거이제 참말로 이거이 노적이고 살림살이 간디요오. 장난이제에.

이렁 거는 다 흙이요오, 흙.

아아따아, 울지 마시요오.

새끼머슴 붙들이의 목소리도 들린다.

검은 지붕에 그물처럼 엉키어 있던 암키와 수키와의 골짜기와, 그 지붕에 서

리 틀고 앉아서 탐욕스러운 대가리를 공중으로 치켜 올린 용마루들이 우르르,

무너지며 강모를 덮어씌운다.

순간 머리가 깨지는 듯한 통증에 그는 소스라친다. 기왓장이 이마를 정통으로

때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왓장이 아니라 이기채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던

진 퇴침이었다.

그때 강모는 이기채가 던진 퇴침을 용케 피하였으나, 그것이 자기 귀밑을 스

치고 날아가 차탁자를 후려치던 것을 지우지 못하였다. 퇴침에 맞은 차탁자에서,

다기들이 와르르 쏟아지며 박살나던 소리는 쉽게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 소리는 바이올린이 부서지며 지르던 비명과 흡사하였다.

아아, 나는 떠나고 싶었다. 음악을 공부하러 동경으로 가고 싶었다. 아니다. 굳

이 그렇지 않았더라도 나는 다만 어디로든지 떠나고만 싶었다. 그런데 나는 무

엇에 눌리어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말았던가.

그림자.

신혼의방, 일렁거리는 촛불빛을 받으며 현란한 꽃밭처럼 오색이 영롱하던 효

원의 화관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큰비녀와 도투락댕기를 드리운 그네의 그림자

가 벽에 비치어 커다랗게 드리워진 것을 보고 덜컥 겁이 났었지. 그때 먹은 겁

은 이상하게도 얼른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무서워졌어...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랬는지 모르

겠다. 나는 혹시 그 사람한테서 할머니의 눈매에 서려 있던 서리를 본 것은 아

니었을까?

할머니의 서리. 그 허연 서리. 청암부인.

강모는 흐윽, 숨이 막힌다.

베개 밑 명주 수건에 싸여 있던 삼백 원이야말로 나의 발목을 비끄러맨 동아

줄이 아닌가. 할머니는 생전에 한번도 나를 꾸짖으신 일 없고, 매를 때리신 일이

없는데, 나는 왜 그렇게도 할머니가 어려웠던가. 들어오라 하면 들어가고, 나가

라 하면 나갔다. 오늘 밤은 좋은 밤이니 건넌방에서 자거라 하면 또 그렇게 했

다. 나는 할머니한테 벗어날 수가 없다. 결국 이제는 마지막까지, 이렇게, 당신의

체온과 어둠을 한 뭉치 수건에 싸서 내게다가 덜컥, 안겨 놓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내 발목을 잡고 계신다.

나는 아무것에서도 벗어날 수가 없다.

강모는 주먹만한 얼굴로 고무락거리던 철재가 자신의 목을 휘감아 끌어안던

꿈속의 감촉이 다시 살아나, 자기도 모르게 목을 털어냈다.

“언제 가십니까?”

“며칠 후에 떠난다.”

“떠난다면?”

“봉천, 시칸방으로 갈 것 같다.”

“거기 오래 머무르십니까?”

“가 봐야지. 만날 사람이 있는데, 사정을 보아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해

볼 생각이다.”

“사회주의...”

“자, 오늘은 그만 일어서자. 너무 늦었다. 나도 또 가다가 만날 사람도 있고

하니, 이만큼 마시고 갈리자.”

강태가 다다미 위에 벗어 놓았던 갈색 캡을 머리에 쓴다.

그러나 강모는 웬일인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새 술도 깨어 버려 머리 속에 찬바람이 스미는 것 같았다.

“혹시 동경에 강호형도 합류 동행하십니까?”

“우선은 아니지만, 내가 봉천으로 가는 것은 알고 있다. 연락은 늘 닿고 있으

니까. 편지도 하고 인편에도 소식을 전하고.”

“형님, 정확하게 며칱날 가시는 겁니까?”

“왜?”

“가기 전에 한 번 더 만나고 싶어서 그럽니다. 꼭 의논드릴 말씀도 있고요.”

“그래...?”

“연락을 주십시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지.”

강모는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나요?”

계산대의 여자가 상냥하게 웃는다. 단풍잎보다 붉은 빛깔의 공단 기모노 바탕

에 오색이 찬란한 매화, 국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주인여자이다.

“계산.”

강모가 지갑을 꺼내자 먼저 밖으로 나간다.

뒤따라 나온 강모는 골목 어귀에 서서 잠시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

늘에서는 너풀 너풀 눈송이가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을까.

길바닥이 희끗거리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다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갓을

쓴 전등이 희미하게 골목을 비추고 불빛 아래 눈송이는 꽃잎처럼 하염없이 진

다.

“눈이 오시는구먼요.”

강모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채로 무심히 말한다. 그 무심한 말투 속에는 무엇

인가 성급함이 깃들어 있는 것도 같다. 그런 강모의 말에 강태는 대답이 없다.

그저 우두커니 서서 어둠 속을 한참이나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윽고 강태는

몸을 돌리며

“가자.”

하고 짤막하게 말했다.

“내, 가기 전에 너한테 들르지. 나는 지금 또 가 볼 곳이 있다. 그만 여기서

갈리자.”

“그러지요. 꼭 들렀다 가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강태는 고개를 끄덕했다. 강태의 외투 어깨에 눈이 내려앉는다. 어깨에 내려앉

은 눈송이는 금방 스르르 녹으며 올 사이로 스며들어 버린다.

“그럼.”

강태와 강모는 서로 눈빛으로 인사를 나누며 골목 어귀에서 헤어졌다. 너풀

너풀 내리던 눈송이들은 점점 바람을 타고 흩날리면서 길바닥에 쌓인다. 첫눈치

고는 소담스럽게 내리는 것이다.

...봉천으로? 곧 떠난다...?

강모는 아까 강태가 하던 말들을 처음부터 되뇌어 본다.

눈은 어두운 하늘에서 적막하게 춤을 춘다.

활 흥 훨 후어리.

눈발은 내리다가 날아오르고 아득한 곳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어느 날의 꿈 속에서처럼, 매안의 넓은 들픈 끝없는 매화낙지에 살구꽃이 지

듯 그렇게 눈꽃은 지고 있다. 눈꽃 속에 한 얼굴이 떴다가 진다. 강모의 가슴으

로 날아 떨어지는 그 얼굴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녹아 버린다. 행여 그 이름이

새겨질세라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지른다. 그 손자욱에 눈이 내린다.

강모는, 그 얼굴로부터 도망치려는 듯 돌아서 버린다.

그러나 돌아서도 등뒤에 그림자 지고, 바라보면 살구꽃잎처럼 흩어져 버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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