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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25)

카지모도 2024. 3. 18.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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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속에 만권 장서를 쌓아 놓은 것처럼 지견이 풍연한 부인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다가 마치, 따로 한 권의 책을 특별히 꾸며 두기나 한 듯,

온 문중의 기제사며 생일, 회갑 등을 안팎으로 다 기억하고 있는 청암부인에게,

사람들은 항상 공경과 어려움을 함께 느꼈다. 그것은 매안의 문중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씨 집안의 사가들과, 동제간의 반가에 있는 애사와 경사를

반드시 기억하고 있다가, 거동을 하거나, 인사 물품을 보내거나, 아니면 편지, 혹

은 말로라도 예식을 갖추었다.

거미줄같이 복잡한 그 날짜들을, 단 한 번도 뒤섞이게 한 일이 없는 그네는,

꼭, 눈만 감으면 필요한 부분의 기록이 소상하게 펼쳐지는 사람같이 정확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다 외우시느냐고, 신기하다는 듯 문중의 질녀뻘 되는 누가 찬

탄하는 말을 했다가, 오히려

“별 것이 다 신기하구나. 너는, 끼니마다 밥을 먹는 것도 신기하냐? 밤이 오

면 잠을 자고, 아침이면 일어나 세수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이런 일을 안

잊어 버리고 챙기는 것이 사람이라면 마땅히 행해야 할 기본 도리일 뿐이지, 무

엇이 그렇게 신기하단 말이냐? 천하에 불상 것들이나 허는 소리를 부끄러운 줄

도 모르고 어디서.”

하는 벼락 같은 꾸중만 호되게 들은 일이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 대상이 타성바지에게까지 이를 줄이야.

그것은 미처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라에서 임금이 몸소 이름을 지어 현판을 하사하시고, 그에 따른 책, 노비,

토지를 함께 받은 ‘사액서원’이 있는 마을이어서, 매안에는 타성들이 여러 가

호 사고 있었다.

현유의 위패를 모시고 유림들의 학문을 장려했던 서원들이 거의 모두 강제로

철거될 무렵, 고종 8년 삼월 열여드렛날, 이 ‘매안서원’도 무참히 헐리었는데,

그 훼철령 이후에도 서원에 딸린 사람들은 그냥 매안에 눌러 남아 근근이 살았

다.

자작 일촌을, 동성의 문중이 벌족하게 이루고 사는 사부향에 뉘처럼 섞인 타

성바지란, 연유 곡절 여하를 막론하고 천한 대접을 받았다.

물론 타성바지 안에도 구분은 있었다.

‘상놈’이라고 하대하는 상민과, ‘하게’를 붙여 주던 중인. 중로, 그리고 ‘

겨우 양반’이라는 소리를 얻어듣던 무세한 반족이 서로, 몇 집 안되는 타성끼

리도 삼엄하게 나뉘는 것이다.

‘상놈’도 또 구분이 있어, 한 칸 띠집이나마 제가 살 집을 지니고 누구한테

매이지 않은 몸으로 제 먹고 살 궁리를 제가 하는 사람과, 종이나, 호제로 남의

집에 매어 살고 있는 사람이 서로 다르다.

창달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전답이나 마찬가지로 문서에 적힌 종을 여

러 명, 혹은 몇 명을 받은 자손은, 남노여비 할 것 없이 그것을 모두 재산의 한

목록으로 정리하였으니, 종이란, 생사 존망이 제 손에 달려 있지 않은 존재였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출가하는 딸에게 재산 상속으로 전답 문서를 나누어

주면서, 말미에

“종 아무개가 비부를 얻어 새끼를 낳으면 그 첫배는 너에게 준다.”

는 말을 적기도 했으니, 그‘새끼’는 송아지와 다를 바 하나도 없었다.  

머슴은, 일정한 시한을 서로 약조하고 고용살이를 하며 그 일한 대가로 곡식

이나 돈을 받는 사람들인데, 새경은 보통 연말에 계산을 한다.

그리고는, 그대로 더 눌러앉아 머슴을 살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든지는 제

생각대로 할 수가 있었다.

머슴을 많이 부리는 집은, 큰 머슴, 작은 머슴, 새끼 머슴, 담살이, 이름도 다양

하고, 머슴 쪽에서도 굳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않으면서 한 집에서 오래 있다

가 늙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호제는, 종도 머슴도 아니지만, 양반의 집에 들어가 한쪽에 살면서 안

팎으로 종이나 머슴과 똑같이 일을 하는 사람이다.

같은 성씨 한집안간이라 할지라도 다 각각 앞앞의 살림은 규모가 다르므로,

어떤 집은 대대로 여러 명의 종을 부리지만, 어떤 집은 머슴 하나 두지 못한 채

자기 손으로 논밭을 매야 한다.

그러나, 종은 없으면서도 농사를 많이 짓는 양반은 보통 머슴들을 부리는데,

그것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하고 농사일은 많고 할 때, 갑자기 어디서 누구를 종

으로 데려올 수도 없는 일이니, 형편대로 호제를 두는 것이다. 물론 종이 있어도

호제를 또 두는 집도 있다.

집안에 남는 방이나 아래채, 혹은 대문 양쪽에 붙어 있는 행랑을 내주어, 내외

면 내외, 아이들이 있으면 아이들까지 함께 들어 살게 하고, 그 대신 일을 하도

록 부리는 호제는, 중로(중인) 이하의 사람들이다.

대개 신분이 미천하고 가진 재주 없는데다가 집도 절도 없이 궁박한 처지인

호제들은, 웬만하면 어디로 가지 않았고, 한 집에서 대를 물리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가운데 청암부인이 온 마을의 어른으로서, 비노리 풀같이 하찮은 타성바

지 아낙에게 그 할아비의 제삿날을 일깨워 준 일은, 반상을 가리지 않고, 듣는

사람에게 송연한 충격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부인의 눈과 흉중에 든 세상의 넓이가 얼마만한 것이며, 그 세

상의 위로 높은 곳은 어디까지 이르고, 아래로 낮은 곳은 어디까지 손금 보듯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인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데서 오는 경악과, 그네의 눈매

에서 누구라도 단 한치라도 벗어날수 없다는 두려움, 그리고 결코 그 눈 밖에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조심스러움이 뒤섞인 심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문중으로 갓 신행을 온 새댁을 경우에는 어떠했겠는가.

온 남원 군내를 우렁우렁 울리고도 남는 청암부인의 기상과, 그 행하는 범절

과, 열아홉 소년 청상의 몸으로서 오늘의 가세를 일으킨 엄청난 힘에 대해서 미

리부터 다 듣고 온 새각시는, 원뜸의 대종가로 올라오기 전부터도 벌써 속이 후들

후들 떨린다.

집안에 새 식구가 들어오는 것은 언제라도 즐겁고 새로운 일이어서, 새각시

시댁의 가까운 대소가를 물론이고, 온 마을의 이 집 저 집에서 갖은 음식을 다

장만해 놓고 새각시를 오라 청하는데, 이때는 저녁마다 흥겨운 잔치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어디도 가기 전에 맨 먼저 찾아 뵈옵고, 극진한 예를 올려야 한

는 곳이 바로 원뜸의 대종가였다.

그곳에는 이미 문중의 부인들이 일찌감치 먼저 올라가서 온 방안 가득히 모여

앉아 웃고 이야기하며 청암부인과 함께, 새각시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날이면 으레, 집안 부인들이 매안으로 신행 오던 날이 이야기되는데, 그

중에서도 원뜸에 올라와 청암부인께 절하던 정경이 제일 큰 이야깃거리였다. 선

연하게 고운 초록 저고리와 다홍 치마를 입고, 대종가의 대문을 들어서던 그 순

간이야말로, 이씨 문중으로 시집은 부인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남길

만큼 화려하고, 준엄하고, 긴장되면서도, 한편 자랑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로소 이 집안의 며느리가 되었다.”

는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낳아 주신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던 친정을 떠나, 이제 지아비의 집안에 첫발

을 들여놓는 순간을 누구라서 잊을 수 있으리오만, 원뜸의 솟을 대문과 구름 같

은 골기와 지붕이 장엄하게 눈앞에 들어오던 정경은 어린 새각시의, 이제 막 유

충의 고치를 벗고 나비로 날아오르는 수줍은 눈에는, 아찔하게 아득한 것이었다.

그래서 오금이 오그라붙는 긴장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던 것이다.

새각시를 보려고 대종가에 모인 사람들이 방안에 가득한데, 숨을 못쉬고 눈을

내리깐 새각시는 발이 마당을 짚는지 공중을 짚는지 모르게, 오직 온몸의 힘을

다하여 얌전하고 조심스럽게만 걸음을 떼었다.

“아마, 내 평생에 그렇게 조심스럽고 어려운 절은 다시 할 일이 없을거요. 아

이구. 절이 그게 그냥 허는 게 아닌 줄은 알었지만.”

이것은 이씨 집안 며느리라면 어느 누구 한 사람 빼놓지 않고 꼭 같이 하는

말이었다.

칼날에 베일 것 같은 아슬아슬한 조심으로 문지방을 넘은 새각시가 방안으로

들어설 때는

“숨을 명주 오라기만큼밖에 못 쉬었다.”

는 말이 저절로 나오도록 숨을 죽였다.

그때는 온 방안의 사람들도 다 숨을 죽이고 새각시를 지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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