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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24)

카지모도 2024. 3. 16.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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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름드리 흰 뿌리

 

구름인 양 쪽찐 머리

몇 해 되면 흙 되련가

 

아직 젊은 나이 숱이 많아 무성한 검은 머리에 자주 댕기 붉은 입술을 물릴

적에는, 그것이 곧 흙인 줄을 누구라서 알 리 있으리.

아침마다 참빗으로 찰찰이 빗어 내릴 때, 그 기름 돌아 흐르는 맑은 윤기는,

흡사 물오른 꽃 대궁같이 신신하여, 단을 자르면 그 자리에 금방이라도 투명한

진액이 어리어 묻어날 듯하지만.

그런 모양은 한낱 거짓에 불과한 것이었던가.

그날 보던 경대의 거울빛은 여전히 맑은데, 어느 하루 무심한 햇발이 비친 머

릿결은, 사위는 가을 풀처럼 기운이 없다.

그러다가 다시 보면 스산한 귀밑 머리 서리보다 희어, 말 그대로 상빈을 이루

니.

허망하다.

문득 명부의 습기가 시리게 끼쳐들어, 성근 머리 속이 더욱 수늘한데. 경대 서

랍의 백동 장식에는 손때 그친 푸른 녹이 적막하게 슬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만 해도 이승의 호사이리라.

빈 산에 홀로 누워 뼛속에 흙이 차면, 빗던 머리 대신으로 쑥대가 우거질 때,

바람이 빗어 줄까, 달빛이 쓸어 줄까.

베개에 묻어 있는 청암부인의 낙발 몇 오라기를 줍는 홈실댁의 나이 든 손이

허전하게 떨린다. 타 버린 검불의 재와도 같이 힘이 없는 머리카락은, 집어들어

백지에 올려 놓기도 전에 스러져 버릴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은 함부로 할 수

가 없다.

자단향을 깎아 넣고 오래 끓인 물을 두 개의 놋대야에 각기 담아 온 부인들

이, 시신의 왼쪽과 아래쪽으로 조용히 앉는다. 떠 온 물에서는 그윽하여 아득한

향기가 피어 오른다. 참으로 먼 곳의 향기이다. 그 향기는, 시방에 모여 앉은 부

인들의 머릿결과 저고리와 치마의 갈피로 스며들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저승의

그림자로 에워싸며 자욱하게 하였다.

한 할아버지의 자손인 동고조 팔촌 이내의 복입는 부인이 아닌 무복친이면서,

문중에서도 각별히 범절이 남다르고, 생전의 청암부인과도 같은 항렬로 도탑게

지냈던 홈실댁은 망인의 습을 하려고 둘러앉은 동종 부인들에게 낮은 소리로 절

차를 이른다.

“그저 공손히 하는 것이 제일이요, 슬퍼하는 것은 그 다음인즉.”

시신을 대할 때 반드시 정성을 다하라고 하였다.

자단향 물을 적시어 머리를 감기고 깨끗한 무명 목건으로 닦은 다음 가지런히

빗질을 하는데, 힘 없는 낙발 몇 올이 빗에 묻어났다. 그것을 아까처럼 백지 위

에 조심스럽게 올려 놓고, 검은 흑단으로 댕기를 감아 흰 머리를 묶는다.

이제 다시는 이처럼 머리를 빗는 일이 없으려니, 살에서 물러난 머리털 흙 속

에 흩어지고, 반듯한 가리마 길 어느결에 무너져, 그 위에 더북한 청초만 덧없는

바람결에 나부낄 것인데.

홈실댁은 한숨을 쉰다.

눈을 감은 망인의 얼굴을 씻기고, 약간 오그린 듯도 하고 방심한 듯도 한 둣

손을 씻기고, 욕건에 물을 축여 상하체를 고루 씻긴 뒤에,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거두어 내며.

사람의 몸이 이렇게 작은 것인가.

다시 한숨 지었다.

그네는 이미 수기없는 마른 몸을 하염없이 내려다본다.

본디 청암부인의 체양은 결코 작은 사람이 아니었다.

천문, 인문, 지문이라 일컫는 주름, 삼문이 잘 갖추어진 넓은 이마와 두드러진

양 광대뼈, 그리고 두툼하고 긴 코에 풍요로운 턱은, 깊고 높은 오악이 분명하고,

어여쁘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색이라기보다는 제세의 호걸같은 기상을 느끼게

하였다.

웬만한 남자라도 올려다볼 만큼 키가 크고 어깨가 우뚝한 부인은, 삼동의 골

격이 두루 당당하여, 그 기혈은 추상 같은 위엄을 뿜어 내고 있었다.

거기다가 눈매에 맺힌 서릿발이라니.

집안의 남노여비나 머슴이나 호재는 물론이고, 대소가와 문중의 사람들, 그리

고 집안에 출입하는 손님들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라도 부인에게는 함부로 범접하

지 못하였다. 부인의 서릿기운에 질린 이쪽이 자기도 모르게 얼어붙는 때문이었

다.

그리고 음성은, 보통 평온하게 말을 할 때에도 우렁우렁 울리는 편이었는데,

만일 무슨 노여운 일이나 잘못된 일이 있어 호령을 하고 꾸짖을 때는 벽력 뇌성

을 치는 것 같아 기둥머리가 흔들리고, 듣는 사람 혼이 있는 대로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부인의 체용은 그 엄숙한 위의가 둘레를 제압하는 큰 산악같고, 기

상은 상기횡추, 뻗친 서릿기가 가을 하늘에 비낀 것 같았다.

그러나, 덕이 있는 산악은 우뚝 솟은 봉우리를 구름 위에 두면서도 치맛자락

기슭에는 옹기종기 마을을 기르듯이, 청암부인 또한 문중의 집집마다 크고 작은

일 있는 것과, 저 윗대에서 갈리어 나간 작은집이 창성하여 다시 큰 동네를 이

룬 구선동의 일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이웃 반촌 둔덕이며 그 너머 서로 혼인할

만한 가문인 동제간의 삼동네 대소사를 잊지 않고 염려하였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

매안의 아랫몰 한쪽에 비스듬히 살고 있는 타성바지 아낙이, 그날, 날이 저물

도록 밭에서 콩을 따고 있는데, 마침 도선산의 잔등이 하나 너머에 있는 작은집

동네 구선동에 안서방네를 데리고 다녀오던 부인이 밭에 엎드린 타성을 불렀다.

“내 오다 보니 그 집에 연기가 안 나던데, 오늘이 너희 조부 제삿날인 것을

알고 있느냐?”

그 말에 깜짝 놀란 아낙은 목덜미가 홍시같이 붉어지며 당황하여

“아이고 마님, 오늘이 메칠잉기요?”

소리조차 차마 하지 못하고, 연신 송구스러운 몸짓으로 두 손만 비비고 있었

다. 아낙은 타성들 중에서도 귀가 빠지는 상민이었다.

청암부인은 쯔쯧, 혀를 찼다.

“사람이, 없으면 없는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찬 물 한 그릇이라도 정성을

다해서 올리고 도리를 챙겨야지. 그래 어찌 제 조상의 기일을 잊어 버린단 말이

냐.”

아낙은 점점 더 고개가 수그러져 옹송그린 등허리가 둥그렇게 되었다. 그런

아낙을 뒤로 하고 원뜸으로 올라온 그네는, 안서방을 시켜 조기와 과일 몇 가지

를 아낙의 집으로 내려 보냈다.

그 이야기는 곧 마을에 번져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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