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은 손톱 발톱이 서로 뒤섞이지 않도록 추려 모아 넉 장의 백지에 차례차례
싸고, 낙발을 싼 백지를 여미어 접는데, 옆에서는 오낭을 챙긴다. 붉은 명주로
만든 이 작은 주머니 다섯 개는, 얼핏 보면 앙징스럽기조차 하다.
그러나 그렇게 앙징스러워서 가슴 밑이 북받치는 설움은 더욱 크다.
자신의 몸에서 떨어진 머리카락, 부질없는 손톱 발톱까지도 이렇게 어여쁜 주
머니에 담아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거두어 망인은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홈실댁은 작은 붓을 들어 주머니마다 꼼꼼히,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구분하
여 적는다.
붓이 닿는 헝겊은 마치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헐렁하게 느껴진다. 그
래서 홈실댁은 문득 세필을 멈추고, 주머니를 가만히 눌러 보았다. 육신의 끄트
머리 손톱 발톱마저 이미 잡히지 않는 곳으로 기화해 버린 듯한 빈 주머니는,
허물같이 벗어 놓은 허전한 휘장인가 싶어진다. 무엇으로 그 속을 채울 수 있으
리.
이윽고 그네는, 청암부인의 얼굴을 검은 비단 멱건으로 가리우고, 홑이불을 조
용히 덮었다.
이제 목욕을 마친 것이다.
옆에서 거들던 사람은 목욕물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당 한쪽
에 미리 파놓은 구덩이 앞에 이르러, 잠시 숨을 죽이더니, 마치 하직 인사를 하
듯 허리를 굽혀 대야의 물을 그곳에 부었다.
얼어붙은 땅의 구덩이 속으로, 청암부인의 몸을 머금은 자단향 물은 소리없이
스며들어 지하로 가는데, 그 자리에 젖은 수건과 빗을 놓는다. 가는 빗살에 찬
바람이 스미고, 수건의 물기가 얼어든다.
이렇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영영 가시는 부모의 몸을 손수 씻기어
드리고, 그 몸에 마지막 옷을 정성껏 눈물로 입혀 드리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마땅한 자식의 도리이겠지만, 슬픔을 참지 못하여 가슴을 두드리며 부르짖어 우
는 애자 상제들이 어떻게 이 애통한 절차를 추스릴 수 있겠는가.
옛말에 일러오는 사람들은, 일찍이 그 부모를 여의고는 지원 극통을 가누지
못하여, 주먹을 쥐고 뛰고, 발을 구르고, 머리를 땅에 박으며 우니, 입은 옷은 갈
가리 찢어지고, 동곳은 빠져 상투가 풀어지며 머리가 흩어져 산발이 되었다 한
다.
그러한 정황이야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어서, 부모 형제 상당한 지친
이나, 팔촌 이내 근친들은 슬픔만으로도 이미 벅차서 차마 손수 습과 염을 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대개는 그 외앳사람으로, 복을 입는 그들 못지않게 서로 가까운 집안
간 사람들이 대신 이 일을 맡아서 하게 된다.
그러니 살아 생전 나누던 정리가 남다르게 두텁고 따뜻했던 손이 아니라면,
어찌 그 가는 길을 평화롭게 해 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문중의 그 누구라서
부인의 손길과 숨결을 받지 않은 이 있어, 이 마지막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크게 꾸중 들은 부인이 먼저 너무나 허망하여 슬피 울었다.
호상은 물론 사이 돈독한 친지가 맡았지만, 실제로 뒤에서 일을 본 것은 상주
이기채의 본생가 아우 기표였다. 기표는, 아미 초상이 나기 며칠 전부터 큰사랑
으로 올라와 있었다.
기표는 큰사랑에서 문중 사람들과 둘러앉아, 이번 상례의 모든 문서를 맡아
관장할 사서와, 일체의 재물을 책임 맡는 사화를 정하고, 백지 공책 세 권을 만
들었다.
그 한 권은 초종에서 장례까지의 절차를 소상하게 기록하여 그 진행을 살피
고, 남겨 두어 후일의 참고를 하기 위한 신종록이요, 다른 한 권은 조문객의 성
명과 문상 온 날짜를 적을 조위록이며, 나머지 한 권은 부의로 들어온 음식이나
물품, 금전 등을 사람 이름과 함께 적을 부의록이다.
그의 옆에서 연신 먹을 갈고 있는 사람은 아우 기응이다.
이기채와 의논하여 적어 놓은 친척, 친지 벗들의 명단을 짚어 가며 살피는 기
표 앞에 부고를 쓸 백지가 쌓여 있다. 그는 벼루에 붓을 적시어 흰 종이에 찍는
다.
‘청암대신’, ‘여대신’이라고 ‘대신’칭호를 생전에 주변에서 받았던 청
암부인의 기세 부음은, 문중이나 이웃 동제간 반가뿐만이 아니라 남원 군내 두
루 보낼 만한 곳에는 다 예의를 갖춰 빠짐없이 보내야 했으므로, 붓이 백지 위
를 달리는 소리는 기민하고도 신속하다.
좀처럼 그 거대한 또아리를 풀어 줄 것 같지 않던 어둠의 무거운 먹물빛이 가
까스로 조금씩 풀리는 듯한 기색에, 정지에서는 망인에게 올릴 전을 부지런히
준비한다.
비록 육신은 숨을 거두었다 하나 아직은 신이 이곳에 머물고 있다 여기어서,
생시나 다름없이 하루에 한 번씩, 그가 살아 생전 쓰던 그릇에 미음과 과일을
담고 술을 따르어, 시신의 동쪽 어깨 닿는 곳에 상을 올리는 것이 전이다.
귀신의 그릇인 제기가 아니고, 만지면 따뜻했던 생전의 밥그릇이 자신의 어
깨맡에 닿이게 놓인다면, 그 아무리 무감한 사체라 할지라도 어찌 유정하지 않
을 리 있겠는가.
청암부인의 손아래 동서 이울댁은, 전 올리는 잔에 술을 따르는 허전하고 투
명한 음향에 눈물이 고인다.
사람이 이렇게 가려고 그 한평생을 사는 것인가.
“내가 만일 종부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진즉에 칼을 물고 자진을 했을 것이
다. 열녀가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 허나, 내가 그 참담한 형상 중에도 목숨을 버
리지 않고 살아 남은 것은 오로지 종부였기 때문이었느니라. 내게는 남의 가문
의 뼈대를 맡은, 무거운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종부는, 그냥 아낙이 아니니라.”
청암부인은 몇 년 전, 친정 대실에서 이제 갓 신행 온 손부 효원을 맞이하여
마주앉아 그렇게 말했었다.
“너도 이제 이 집안의 종부가 되었으니 내 말을 잘 들어라. 대저 종가란 무
엇이냐. 그것이 단지 큰집이라는 말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조상 저 윗대 아득하
신 현조 이래로 그 어른의 장자에 장자로만 이어온, 한 가문의 맏이 집안이 곧
종가이니라. 그것이 어찌 한갓 태어난 순서나 혈통만을 이르는 것이겠느냐. 거기
에 깃든 정신의 골격도 참으로 중요한 것이니라.
종가 한 가문의 맏이로서 그 부형의 책임을 다하고, 선조의 정신을 바르게 받
들어 다음 대에 온전하게 물려주는 책임을 또 다해야 하느니. 한 가문의 바른
피와 정신의 봉화불이 종가에서 이어지는 것이다.
일찍이 이곳 매안에 자리를 잡으신 입향조 이래로 매안은 사백여 년 동안 우
리 이씨 문중 세거지가 되었는데, 자손이 번창하매 자연 가까운 잔등이 하나 넘
는 동네로 분가해 가서 작은집 동네가 생겨나고, 또 그 다음 자손들이 다른 곳
으로 자리를 잡아 분가해 가서 작은집 동네가 생겨나고 하여, 멀리 그 자손이
번창했던바, 우리는 낙남파의 대종가니라.
일문의 사람들은 종손을 누구보다 귀히 여기고, 아끼고, 존중한다. 누구라도
종손한테는 말을 놓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항렬이 낮은 종손을 함부로 하지 못
해, 그러고, 시제 때에는, 우리 낙남과 일문이 도종산에 모두 모인다. 서자는 물
론이고 여자와 미장가 소년을 뺀, 성년 자손으로만 삼사백명이 하얗게 모여 제
사를 올리지. 그게 모두 한 할아버지에게서 뻗은, 도덕과 학문이 빼어난 자손들
이니, 그 창성하심을 생각해 보아라.
이 제사 첫번으로 신위에 드리는 술 초헌은 말할 것도 없이 언제든지 종손이
먼저 올리고, 그 위치도 문장은 오히려 문중에 끼어 서 있지만, 종손은 맨 앞자
리 한가운데 혼자 앉느니라.
문장이 누구냐. 문중에서 제일 항렬이 높고 나이가 많은 어른이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장을 받들고, 공경하고, 어려워하지 않느냐. 그런 백발의 문장이 계
셔서 종손을 지켜 주고 문중을 지도해 주는 크나큰 힘이 되는 것이니라.
허나, 종회를 열 때도 문장의 댁이 아니고 종손의 집인 이 종가에서 열고, 종
중의 모든 기록 문서 또한 반드시 종가에 보관해서 대대로 전하게 허느니. 그뿐
이냐. 종회를 할 때면, 그 앉는 자리도 종손이 문장보다 상좌에 앉는 것이다. 비
록 종손이 아직 이십도 채 못된 홍안 소년이라 할지라도, 백발의 문장보다 윗자
리에 앉는 게지. 자, 이제 너는 그렇게 존중한 종손의 아내 되어 이 집안의 종부
가 되었니라.“
청암부인으로부터 단 한 번도 꾸중을 드어본 일이 없는 손부 효원은 오직 공
손히 그 말씀을 새겨 들었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자면 죽기보다 어려운 고비가 꼭 있게 마련이니라. 그럴
때는 잊지 말고 내 말을 명심해라. 저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가 맡고 있는
책임인즉.”
청암부인은 효원과 마주앉아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언제인가는
“너는 나를 많이 닮았다.”
고 말한 일도 있었다.
부자지간은 어려워도 조손간은 허물이 없다는 말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그 어떤 알 수 없는 기의 맥이 핏줄같이 서로 견인하여 끌어당기는 것
일까.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청암부인이 효원은 오히려 의지가 되고
인자하게 느껴졌으니, 시댁에서 도리로 만난 인연도 이와 같이 따뜻하여 목이
메게 그리울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우스운 옛날 이약 한 자리 해 주랴? 전에 내가 몇 살 안 먹은 조그만
아이였을 때 이야기니라. 그때 청암 친정에는 개를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해던
가, 그것이 새끼를 대여섯 마리 고물고물 낳아 놨지 뭐냐. 나는 그 중 한 마리를
내 것으로 따로 달라 했단다. 집에서 기르는것 어차피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느
냐고, 그냥 두고 놀아라, 어른들이 안 그러시겄느냐. 그래도 나는 꼭 따로 달라
했지. 그래서 내 몫이 된놈을 호제한테 맡겨서 길러 달라고 했더니라. 집안에서
놀다가도 내 강아지는 더 이뻐 보이고, 들고 나며 잘 크는가 들여다보면 뿌듯했
다. 그것이 다 커서 새끼를 낳으면 또 다른 사람한테 나누어 맡겨서 길러 달라
고 그랬지. 그렇게 불어나는 것이 좋아서 그 어린 것이 집집마다 돌아댕기며 강
아지 세어 보는 것이 일이었니라. 닭이고, 오리고, 불어나는 것이면 그렇게 했단
다. 재미가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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