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일언허고 양반이라면 돈 세는 것부터 무어 이문이 남는 짓을 해서는 안되는
법 아니냐. 그런데 천성은 어쩔 수 없었던가,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는 짓을 그
렇게 했어.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바느질을 하거나 옷감을 짜도 꼭 내 몫을 따로 챙겼는
데, 헝겊 짜투리고 무엇이고 나한테 오면 금방 곽이 넘치곤 했다. 그런 내가 몹
시 기구허게 시집으로 신행을 가니 친정에서 마음 낳이 아퍼허셨드니라. 유표히
제 것을 챙기드니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신행을 간다고. 그렇지, 오죽이나 없었
으면 신랑까지도 없었겄느냐. 그런데 지금은, 부잣집으로 시집간 다른 형제들보
다 그래도 내 살림이 훨씬 낫니라. 이 살림은 허실이 하나도 없고 속이 꽉 차
있거든.“
그때 바라본 청암부인의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평화로워, 효원은 웬
일인지 눈물이 울컥 솟구쳤었다.
할머님은 평생에 몇 번이나 저렇게 웃어 보셨을까.
새삼스럽게도 바로 엊그제인 듯 그 얼굴이 떠올라 효원은, 이 상사가 거짓말
인 것만 같았다.
(유인경주김씨지구)
선연하게 고와서 오히려 할머님의 정말 돌아가신 것을 일깨워 주는 명정의 진
홍빛 비단 위에서 이승의 빛깔이 아닌 흰 글씨가 소슬하게 돋아난다.
아직 신수를 만들지 않은 채 신주 대신 가주인 혼백을 접으려는 흰 비단폭 한
자 세 치가 방바닥에 정갈하게 펼쳐진다.
이 비단은, 지금은 그저 비단일 뿐이지만 이제 순서를 따라 정성을 다하여 접
으며 그 다음에는, 청암부인의 유혼을 이곳에 모신 사무치고 엄숙한 집이 되는
것이다.
혼백과 혼백은 서로 다르다.
앞의 말씀은 돌아가신 이의 넋을 가리키고, 뒤의 말씀은 그 넋이 잠시 깃들어
머무는 집을 가리킨다.
머무르소서.
잠시라도 이곳에 유혼이 머무르소서. 형체는 비록 어두운 땅속으로 들어갔으
나, 맑은 넋은 부디 이곳에 머무르소서.
혼백은 접을 줄 아는 사람이 정교하게 격식대로 잘 접어야만 한다. 다 접은
모양이 막힌 곳 없이 사방으로 자유로이 들고 날 수 있도록 사통오달하게 접은
이 안에, 아까 망인의 머리맡에서 다홍 철람의 색실로 맺은 동심결, 혼백을 모신
다.
그러면 이제 망인의 넋인 혼백은 흰 비단으로 접은 집 혼백에 고요히 머무는
것이다.
장사하고 돌아와서 지내는 첫번 제사 초우에 비로소 이 혼백을 몸 대신, 신주
대신 모시고 제사하며 아아, 망인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나간 것
을 절감하여 애곡하니.
슬프다.
그가 이 세상에 살았었다는 흔적과 자취가 어디 있느냐, 그 얼굴과 손은 다시
볼 수도 잡을 수도 없으며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데, 다만 흰 비단 가주 처연히
서 있으니, 저 쓸쓸한 헝겊 한 장으로 어찌이 허망을 달랠 수 있으리오.
그제서야 비단으로 접은 혼백이란 그저 형식이요, 일종의 상징에 불과한 것을
알겠다.
그러나 참으로 선조의 혼백이 있다 하면, 자손의 기운이 선조에 닿고 있고 선
조의 기운은 또 자손에 닿아 있어, 비록 그 몸의 형체는 유명을 달리하여 이 세
상으로 나뉘어 갈라지지만, 살아 있는 기운이 서로 이어질 것이다.
생전의 청암부인은 효원에게 그렇게 말했다.
“사람이, 비록 핏줄을 통해서 그 부모로부터 생물적인 모습을 받았다 할지라
도 만일 정신이 서로 불통하면, 그것은, 겉모습만 닮었다 뿐인즉 서로 죽은 사람들
인 것이다. 허나, 사람이 죽은 뒤에라도 그 정신이, 혼이 서로 닿아 있다면 그
선조는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이다. 몸에 너무 마음을 두지 말아라. 살아 있고 없
는 것으로 살고 죽은 것을 생각하지 말고, 정신의, 혼백의 길이 서로 막히지 않
도록 늘 그 길을 닦어야 한다. 우리 마을 저 앞 서도역에 서는 기차를 보아라.
제 아무리 그 형체를 거대하고 공교하게 만든다고 해도, 기계는 수, 화가 없으면
못 움직이는 것이다. 수는 기름이요, 화는 불인즉, 이것이 들어가야 기계는 동허
는데, 그 수.화가 바로 혼백인 것이다. 저일.월의 밝은 기운, 맑은 기운이 몸에
들어야 비로소 사람은 물체에서 생물이 되는 법이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덩
어리가 아니라, 산 것, 진정한 산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참으로 오른 이라면, 이
혼백의 기운이 살아 있는 사람인 것인즉, 시.청.언.동이 모두 다 이에 근거해서
일어나고 생기고 하는 사람이지. 비록 사람이 죽었다 해도, 그 기운이 살어 있으
면 죽은 것이 아니니라.”
어른.
효원은 그 말이 가슴에 박혀 와 사무친다. 이제 어른은 가시고 천지를 둘러보
아 자신을 가리워 줄 지붕 한 닢 없는 것이 절감되었다.
허전한 머리 위로, 무겁게 아득한 동짓달의 하늘이 드리워져 음울한데, 곡성이
가서 닿을 리 없는 땅, 만주란 과연 여기서 어느 쪽 어디쯤이나 있는 곳이가.
효원은 자신의 머리 위가 열린 채 비어 있는 것은, 청암부인의 임종때문이 아
니고 남편 강모 때문인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순간, 이 세상은 거대한 항아리인가 싶어진다.
항아리 속에 들어앉아 몰라도 좋은 세상은 안 보아도 좋았는데, 어느 하루 써
늘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을 때, 지붕처럼 덮여 있던 뚜껑은 간곳 없고, 서리 비
낀 찬 하늘만 텅 빈 우주에 홀로 걸린 것이 보이니,
그 하늘이 이제 뚜껑 없는 항아리 속으로 내려앉아 효원이 짓눌리는것 같다.
가슴을 누르는 것은, 빈 하늘이다.
아, 빈 것이 이렇게 무거운 것이구나.
그런데 그 뚜껑을 벗겨 들고 간 사람은 강모였다.
남의 세상을 황량하게 열어 놓고 자신은 자취를 감추어 버린 남편 강모를 대
신하여, 효원이 의지하고 있었던 것은 오직 청암부인이었다.
품계받은 소나무의 퐁모로 서서, 넉넉하고 깊은 그늘로 지붕을 만들어 준 부
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치 두 팔을 벌린 채 웃으며
이리 오라.
하는 것 같다.
효원은 북받치는 설움에 고꾸라지며 곡을 한다.
저쪽에서 누군가 곡성에 못을 박는다.
관을 짜는 것이다.
미리 널을 만들어서 옻칠을 여러 번 하여, 아래채 호제의 집 점례네 뒤쪽 처
마 밑에 짚으로 싸 놓았던 송판은, 석산에서 몇 백 년 잘 큰 소나무로 만든 것
이어서, 온몸에 붉은 송진이 고루 깊이 절어들어 관목으로 아주 좋다.
사실 가장 좋은 관목은 오동나무지만, 그것은 임금이나 왕족의 장례에만 쓰이
고 일반인에게는 금법이었다.
그리고 은행나무도 상품이다.
그러나 이만한 송판이라면, 오동나무나 은행나무에 견줄 바 아니게좋은 소나
무를 베어 청암부인의 관목을 만들었다.
부인 아직 생전의 일이었다.
작은 솔씨가 떨어져 큰 관목이 되려면 한 이백여 년 걸려야 한다. 집안에 산
이 있는 사람들은 그 산에다 씨를 뿌려서 오십년목, 백년목, 이백년목, 솔숲을
만들어 놓는데, 그 중에는 나중에 자손들이 관목으로 쓰라고 길러 두는 이백년
목이 꼭 있게 마련이다.
저 이백 년 뒤에 올 자손이여. 자, 이나무를 베어 관으로 쓰라.
하고 티끌만한 솔씨를 뿌리는 선조의 심점을 청암부인은 효원에게 여러번 이야
기했었다.
“소나무는, 나무 자체가 아주 영험한 생체거든. 옛날 임진왜란때, 우리나라
산야에 소나무 없었으면 우리 백성은 다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것 벗겨 먹고
다 그 비참한 중에도 살어 남은 것 아니냐.”
나무 껍질에 목숨을 맡기어 그 힘으로 살아난 것은 본디 소나무가 가지고 있
는 덕성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껍질 하나가 능히 사람의 목숨을 살릴 만한 것
이라면 다른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소나무 꽃은 송화로, 다식을 만들지? 또,솔잎은 선식이란다. 몸의 기를 맑게
해 주기에 예로부터 선승이나 공부허는 사람들이 상식허고. 소나무 껍질은 벗겨
다가 끓여 먹고, 송기 소나무 어린 가지 속껍질 말이다. 송기로는 송기떡을 해먹
지 않느냐. 송기를 멧쌀가루에다 버물여 섞어서. 그뿐이냐, 솔방울은 따서 송실
주를 담고, 둥치는 잘라서 관목을 만든다. 이 소나무 송판은 결이 부드럽고 조밀
헌데 아주 단단해서 관목으로 좋으니라. 관목뿐 아니라 판자로는 송판 이상 없
지. 그리고, 소나무가 숲에 가득 차면 가뭄이 없단다.
노송 한 그루가 머금고 있는 물이 엄청난 것이거든. 그뿐 아니야. 잎갈이 하느라
고 떨어진 낙엽은 긁어다가 불을 땐다. 가리나무 불땀이 제일 아니냐.”
참으로 나무 한 그루의 쓰임이 이만 하다면, 이는 영물이라는 말이 조금도 과
장이 아닌 것을 알겠다.
“실제로 쓰이는 덕이 그만 하거니와, 풍채와 운치를 좀 보아라. 그야말로 용
의 기품이 아니냐. 하늘로 솟구치는 그 기상하며 조금도 속기없는 몸통의 귀격
은 속진 속의 군자로다. 거기다가, 사시사철 푸른 잎은 너훌거리지 않아서 점잖
고, 바늘 같은 침엽은 그 결직이 선비의 성품 그대로라, 감히 누가 흉내낼 수 있
으리오.”
한번은, 이백여 년 된 관목을 베어 낸 소나무 뿌리에서 백복령을 캐다가 떡을
해먹은 일이 있었다.
산을 둘러보다가, 관목하려고 베어 놓은 노송 큰것이 쓰러져 있으면 그것을
잘 눈여겨 보아 두었다가, 그로부터 한 이 년쯤 지난 뒤에 그 나무 뿌리를 헤쳐
캐는 이 백복령은 참으로 귀한 약재이다.
관목으로 잘라 낸 아름드리 나무 밑둥의 뿌리는, 둥치가 베어져 없어져도 그
대로 살아서 여전히 무서운 기세로 땅의 정기를 빨아들여 위로위로 솟구쳐 올려
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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