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가도 가도 내 못 가는 길
"내 이제 죽어 육탈이 되거든 합장하여 달라."
청암부인은 유언하였다.
이승에서의 인연은 사람마다 다 서로 다른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전생과 금
생, 그리고 내생에까지 이어진 인연이 지극하여 끊어질 수 없는 사이를 삼생 연
분, 부부라 한다.
그것이, 오다 가다 쉽게 어우러진 사람이든, 우여곡적 뒤얽힌 끝에 어렵게 만
난 사람이든, 아니면 도도하게 흘러가는 물줄기같은 좌우 풍경을 데불어 거느리
고 만난 사람이든 한 번 부부가 된 연후에, 누구는 삼생보다 더 길고 깊은 한세
상을 누리어 살기도 하고, 또 누구는 삼생의 원수를 한 지붕 아래 둔 것처럼, 모
질고 그악스러운 평생을 겪기도 한다.
"전생에 은인이나 원수가 금생에 부부로 난다는데, 은헤를 갚을래도, 원수를
갚을래도, 멀리 있어서는 어려운 일이거든, 바로 지척 가까운 곳에 한 몸이나 다
름없는 관계로 만나야, 선연이든 악연이든 지은 대로 갚고 받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동아줄 같은 인연은 다 놓아 두고, 스쳐가는 바람이나 옷자락만도 못
하게 어이없이 이별하는 사람도 있으니.
고희라 하는 일흔을 넘기고 칠십삼 세에 숨을 거둔 청암부인의 한 생애에, 신
랑 준의가 머물다 간 것은 단 사흘이었다.
부친을 상객으로 모시고 청암 고을에 이르러 초례를 치른 열여섯 살의 그는,
다만 사흘을 머문 뒤에 신부 청암부인을 홀로 남겨 두고 매안으로 돌아갔다.
신랑 준의가 청암에서 사흘을 머물렀다 하나, 온 날을 내내 신부와 함께 지낸
것은 아니었다.
신방에 든 새 내외는, 이른 새벽 일찍이 일어나 매무새를 단정하게 갖추고 나
란히 나와, 안방으로 가서 부모님께 문안을 드리고는, 바로 신랑은 바깥 사랑으
로 나가야 했다. 이때 혹시라도 신랑이 신부 곁에서 머뭇거리면 그런 큰 흉이
없는 것이다.
사랑에서는 벌써 소세 의관을 가지런히 마친 상객, 준의의 부친이 아들의 문
안을 받았다.
이윽고, 처가의 집안간 대소가와 문중의 하객들이 하나씩 둘씩 사랑으로 모여
와 둘러앉아, 새로 맞은 취객과 사돈을 환영하고, 한편으로는 신랑의 됨됨이를
여러모로 시험도 해 보면서 온종일 문답 담소를 그치지 않았다.
학문이며 시재, 그리고 집안과 인물의 국량을 두루 재 보고, 되어 보고, 다루
기도 할 때, 신랑은 신랑대로 이제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라는 긴장감 속에서,
자신의 기량과 호연한 기상을 보여 주게 되는 이 시간들은, 이쪽이나 저쪽 모두
에게 서로 큰일 치르는 수인사인 셈이었다.
부친이 옆에 같이 있어 든든하다고 하지만, 일생에 큰일인 혼례를 치르고 어
린 나이에 심신이 고단한데다가, 낯선 동네의 처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의례를
차리는 일이, 신랑으로서도 결코 홍감한 것만은 아니었으리라.
즐겁다기보다는 오히려 번거롭고 어려운 마음에, 어서 절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 법도 하였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아직 얼굴을 익히지도 못한 신부와 수줍은 기색으로 잠
시 마주할 수 있을 뿐이었으니, 그것은, 옷자락 한 번 스치기에도 모자라는, 찰
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찰나를 한 생애로 지니고, 메고, 청암부인은 살아온 것이다. 그것
은, 금생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남기고간 찰나였으며, 그가 남기고 간
것의 서러운 모두였다.
이제는 갈 수 있으리,
저만큼 앞서 가던 그 길 모퉁이가 얼마나 멀고 먼 곳이어서, 한평생의 밤과
낮을 걷고 걸어도 닿지 않던 옷자락 곁으로, 단 사흘을, 삼십년이나 삼백 년보다
더 길고 깊은 삼생으로 품어 안고, 이제는 갈 수 있으리.
시신을 모신 방에서 동종 부인들과 둘러앉아 습을 하던 인월댁은, 홈실댁이
조심스럽게 펼치는 녹원삼의 휘황한 자락을 바라본다.
어찌 아직 이대도록 고운가.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3권 (32) (0) | 2024.03.27 |
---|---|
혼불 3권 (31) (0) | 2024.03.26 |
혼불 3권 (29) (0) | 2024.03.24 |
혼불 3권 (28) (0) | 2024.03.23 |
혼불 3권 (27) (0) | 2024.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