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혼불 3권 (31)

카지모도 2024. 3. 26. 06:03
728x90

 

세월이 오래 흘러 근 오십오 년이나 다 되었어도 여전히 그 빛이 선연하여 조

금도 바래지 않은 비단 원삼은, 초록의 몸 바탕에 너울같이 넓은 색동 소매를

달고 있었다. 진홍, 궁청, 노랑, 연지에 연두, 다홍을 물리고, 부리에는 눈같이 흰

한삼이 드리워진 색동 소매는, 초례청에 선 신부가 입던 그대로여서, 죽은 이의

푸른 몸에 수의로 입히기에는 섬뜩하고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청암부인이 혼인하던 날 입었던 원삼이었다.

아무리 혼인을 앞둔 딸이 집안에 있다 하더라도 쉽게 마련하기 어려운 옷이

비단 원삼이고, 또 한 번 입은 다음에는 다시 입을 일이 없는 것이 원삼인지라,

웬만한 사람들은 문중이나 집안간, 혹은 마을에 마련되어 있는 것을 공동으로

돌려가며 입는 것이 보통인데, 청암부인의 친정 가세가 그럴 만하여 따로이 새

원삼과 비단 족두리를 공들여 지었던 것이다.

흰 가마 타고 흰 옷 입고 매안으로 오는 신행 길에, 그네는 이것들을 소중하

게 가지고 왔다.

청암부인의 어머니는 보자기에 반듯하게 싼 원삼과 족두리를 청상이된 여식에

게 건네주며 말했다.

"사람이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마치 처녀

가, 정든 자기 집을 떠나서 산 넘고 물 건너 먼 곳으로 시집을 가득이 말이다.

그래서 돌아가신 분의 수의는, 시집갈 때하고 똑같이, 녹의 홍상에 원삼 족두리

를 해 드리는 것이니라.

망인의 살아 생전 일생을 두고 제일 곱고 화려하게 입은 것이 바로 이 옷 아

니겠느냐. 여자라면 누구라도. 아이에서 비로소 배필을 만나 성인이 되는 좋은

날 입었던 그대로 다시 차려 입고, 성장을 다한 모습으로, 죽어 후세로 가는 것

이니. 형편이 닿는 사람들은 혼인날의 원삼 족두리를 잘 간직해 두었다가, 저 훗

날, 자신이 입고 갈 수의로 썼단다."

이 옷을, 소용이 있을 때 쓰라.

청암부인의 어머니는 낙루하였다.

원삼을 반듯하게 펴 놓은 홈실댁은, 초석 위에 누운 망인의 두 발에 먼저 버

선을 신긴다. 평소에 신던 것보다는 훨씬 크게 만든 버선이다.

원삼말고는, 모두 수의로 만든 것인데, 겉감을 흰 비단과 명주로 쓰고 안에는

사베를 받쳤다.

그런데 명주는 나중에 뼈에 붙고, 삼베는 살과 더불어 황토같이 다 썩게 된다

고 하였다.

"시신 위로는 손 왔다갔다 허는 것 아니네, 허리띠나, 치마끈이나, 저고리나,

다 이 자를 써서 허리 아래로 밀어 넣어야지."

밑부분만 약간 붙여 치마나 다름없이 길게 터진 속곳과 겹바지를, 제일 위에

입는 단속곳의 허리말에 한꺼번에 박아 만든 바지를 조심조심 입힌 뒤에 허리띠

를 묶으며 홈실댁이 말했다.

치마는 청상을 먼저 입히는데, 흰색 안감을 받친 푸른 비단 다섯 폭 치마이다.

그리고는 그 위에, 꼭두서니빛 다홍 치마를 공손히 입힌다.

산 사람보다 시신을 더 공손히 대하여야 하는 법이라, 암만 귀한 비단으로 습

렴을 한다 해도, 자꾸 여러 번 들썩거려 시신을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은 예가

아니므로, 같은 종류의 옷은 입힐 순서대로 미리 끼워 한 벌처럼 해 놓는다.

솔기가 살에 닿지 않도록 뒤집어서 입힌 속적삼 위에, 분홍색 속저고리와 노

랑 삼회장 저고리, 그리고 초록색 곁마기를 같이 끼운 저고리 삼작을, 좌우에 앉

은 부인들이 지성껏 입힌다.

소맷부리에 손을 넣어 가만히 시수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옷깃을 맞잡아

조금씩 당기며 입히고는, 고대를 바로 하여 깃을 단정하게 여민 저고리의 초록

빛은 치마의 선연한 붉은 빛을 받아 여염요요하게 보였다.

그러나 이 녹의 홍상 아래, 다리와 무릎과 발목은 삼베 교대로 단단하게 동이

여 묶여 있었다.

그리고 두 귀는, 풀솜을 대추씨만하게 뭉쳐서 만든 충이로 막아, 바람이 빈 집

처럼 시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놓았다. 일가 친척 집안 권속, 곡비의

낭자한 울음 소리도, 누가 와서 부르는 애끊는 소리도, 이 여린 솜 한 조각을 뚫

지 못한다.

유명의 벽이 이처럼 무정한 것인가.

오직 조용하게 누워 있을 뿐인 청암부인의 양 손에, 붉은 명주 안을 받친 검

은 헝겊 악수를 씌우고 난 홈실댁과 인언댁은 펼쳐 놓은 원삼을 맞잡아, 둘러앉

은 부인들과 함께 망인에게 입힌다.

색동 소매 드리운 초록의 바탕에 다홍 대대를 맨 모습은 영락없는 초례청의

새 신부이다.

그러나 눈을 감은 망인의 얼굴은, 흰 솜으로 귀를 막고, 반듯하게 빗은 흰 머

리에 검은 흑단 댕기를 물려, 귀색을 띠고 있다.

그 머리에 홈실댁은 검은 비단 족두리를 씌운다.

정수리 한가운데 옥판을 대고, 옥판의 복판에 주홍 산호, 노란 밀화, 물빛 비

취, 붉은 유리, 푸른 구슬들을 영롱하게 한 줄로 꿰어 세운 족두리 앞쪽과 뒤쪽

에는, 진주 같은 광택이 나는 등황색 석웅황이 두 개, 갸름하게 가로놓여 있다.

쟁가랑, 소리가 날 것만 같은 오색의 구슬빛들이, 원삼의 화려한 색동자락과

황홀하게 부딪쳐 어우러지며 귀기를 뿜어 낸다.

그 휘황한 서슬은 이미 이승의 옷이 아니었다.

성장을 다한 망인의 푸른 시안에, 인월댁은 조그만 분첩을 들어 곱게 바르며

읍곡한다.

분의 향기가, 저승을 머금은 낮은 가루로 내려앉는다.

부인의 발 아래 앉아 있던 동녘골댁은, 명주에 청암부인 혼서지를 곱게 배접

하여 만든 신을 망인의 발에 신긴다.

이제 신까지 신으셨으니, 참말로 길을 떠나시겄구나.

그네는 망인의 발에서 손을 놓으며 눈물 지었다.

청암부인 운명 후에, 무시곡으로 목이 쉬어 원통함을 가누지 못하는 상주 이

기채는, 시신을 모신 방문 밖에 마련된 상막에서 조객을 받고 있다가, 습을 마친

자리로 들어온다.

시방에는 바깥 바람이 들어오면 안되는 까닭에 철벽을 하고 문을 닫아 놓아

서, 자욱하여 잡히지 않으면서도 살 속으로 파고드는 저승의 기운이 분 냄새와

섞이어 그의 폐부를 찌른다.

설움의 침이 오장 깊은 속에 꽂히며 통곡이 터져 나온다.

비록 자식이라 하여도 내간상일 때는 망인의 수의는 여자가 입혀야 하므로,

아들이 어머니의 옷 입는 것을 볼 수가 없는데, 이제, 색깔의 꽃밭 같은 원삼과

족두리를 갖추어 입고 누운 청암부인의 모습을 보는 이기채는, 억장이 무너져

꿇어 엎드린다.

남의 자식 된 사람으로, 차마 자기의 부모가 죽었다고 생각할 수가 없어서, 초

상이 나면서 바로 급히 성복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인지라, 아직 상복을 입지 않

은 이개채의 힌 옷이 애통하게 출렁인다.

아무리 평소에 의관을 명경같이 하던 사람이라도, 부모가 세상을 떠나 골수에

슬픔이 북받쳐 실성 발광에 이르렀을 때, 누가 자신의 복장을 돌아볼 겨를이 있

으리오.

어버이를 잃고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며 우는 자손이 머리는 흩어져 산발이

되고, 옷고름은 다 풀어져서 앙가슴이 드러난 채, 신발조차 챙겨 신지 못하여 맨

발로 땅을 구르며 뒹굴어 애곡하던 옛사람의 효심을 가슴에 새기는 상제는, 흰

도포나 홑두루마기를 한쪽 어깨에만 걸치고 다른 한쪽 어깨는 내놓는 것이어서,

이기채의 흰 두루마기 오른 어깨는 벗기어져 의지할 곳 없이 드러나 있다. 그

옆에 앉은 율촌댁이 울음을 그치고, 쌀이 담긴 그릇을 받쳐든다.

반함을 하려는 것이다.

살아 생전 그 몸에 젖이 날 리 없었던 어머니 청암부인은, 암죽을 떠 먹여 자

신을 기르고, 자라면서도 내내 별로 음식을 탐하지 않아

무엇을 먹이랴.

늘 애가 타서 밤낮으로 어린 구미에 당길 것을 궁리하여 먹였건만.

그 염려로 기혈과 골격을 얻어 어른이 되고 오늘에 이른 자신은, 어머니의 입

속에, 이승의 음식인 밥이 아니라 저승을 가면서 먹을 식량이라 하는 쌀을 물려

드리려고 하다니.

하얗게 소복한 쌀은 찹쌀을 물에 부리었다가 물기를 뺀 것인데, 이기채는 버

드나무로 깎은 수저를 들어 가만히 쌀을 뜬다.

그리고, 청암부인의 시구 오른쪽에 공손히 넣으며

"백 석이요."

목이 메어 말한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3권 (33)  (0) 2024.03.28
혼불 3권 (32)  (0) 2024.03.27
혼불 3권 (30)  (0) 2024.03.25
혼불 3권 (29)  (0) 2024.03.24
혼불 3권 (28)  (0) 2024.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