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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32)

카지모도 2024. 3. 27.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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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왼쪽에 한 수저를 넣었다.

"천 석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운데 한 수저를 넣었다.

"만 석이요."

아아, 어머니.

죽음이 무엇이요.

고꾸라지는 이기채를 가까스로 만류하고, 홈실댁은 망인의 얼굴에 덮을 멱모

를 두 손에 든다.

네 귀퉁이에 끈이 달린, 짙은 검은색 공단 멱모의 안쪽에는 소름이 돋게 붉은

명주가 받쳐져 있다.

묵연히 청암부인의 시안을 바라보던 홈싷댁은, 혀를 차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망인의 얼굴 위에 멱모를 덮고, 족두리 쓴 흰 머리의 뒤로 손을 돌려 끈을 묶는

다.

여태까지 휘황하던 오색의 찬란함이 일순에 무참하게 적막해지면서, 죽은 얼

굴을 가린 검은 헝겊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린다. 그 검은 빛은 캄캄하게 당당하

여 온갖 현요한 색깔들을 일식에 제압하고, 이승과 저승의 길목을 절벽같이 차

단해 버린다.

악연하여 가슴이 내려앉는 빛깔이다.

멱모가 갈라 놓은 절벽의 엄숙하고 까마득한 단애를 메우려는 곡 소리가 깊은

물의 검푸른 소용돌이처럼 방안에 차 오른다.

그 소리가 무슨 신호이기나 한 것처럼, 소렴을 할 사람들이 명주 이불과 교태,

솜 뭉치, 동정과 옷고름을 뗀 산의들을 들고 들어왔다.

망인이 여자일 때, 수의를 입히는 것까지는 여자가 하지만 그 다음 일들은 남

자가 해야 한다. 시신을 묶고 동이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청암부인의 시신을 감아 쌀 명주 이불은 길이가 다섯 자 다섯 치에 폭은 다섯

폭이고, 시신을 조여 맬 끈 삼베 교대는 가는 베를 빨아서 다듬은 것이다.

소렴포 이불이 초석 위에 펼쳐지자, 이기채는 청암부인의 시신에 기대어 가슴

을 치면서 통곡을 하고, 율촌댁과 효원은 부인의 옷자락을 받들어 잡고 엎드려

곡을 했다.

방안의 사람들도 따라서 눈시울을 붉히며 울었다.

청암부인의 손아래 동서 이울댁은 슬픔을 다하여 우는 이기채를 이만큼에 서

서 망연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속으로 낳은 아이들이면서도 웬일인지 늘 어려운 마음이 들곤하여, 남

보다도 더 먼 곳에 있는 것만 같던 이기채가, 지금, 생모인 이울댁에 앞서 세상

을 떠난 양모의 죽음을 당하여 극통의 슬픔을 가누지 못하며 울고 있는 것이다.

일곱 이레 막 지난 어린 이기채가, 조세한 시숙의 사후 양자가 되어 청암부인

슬하로 들어간 것이 벌써 아득이 마흔여덟해 전이니, 새삼 그 세월이 꿈만 같다.

이울댁 자신의 나이도 벌써 예순을 훨씬 넘어 칠십이 곧 닥치는 마루에 걸려

있는데, 이기채를 보면 이상하게도 막 신행 오던 그 무렵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형님한테로 이 아이를 양자해야 한다."

하던 이울양반 병의의 목소리가 그대로 살아나는 것 같았다.

길고 긴 인생에 단 사흘 만난 것으로 인연을 다한 병의의 형 준의는 열아홉

신부의 복중에 한 점 혈육도 남기지 않은 채, 그 모습을 이승에서 거두어 갔다.

의지할 만한 사람 아무도 없는 삭막 첨담한 정경 중에, 오직 한 사람의 동기

로 실날 같은 명맥을 쥐고 있는 소년 시아재 병의를 막중 애중히 여긴 청암부인

은, 삼 년 탈상을 하고 나서, 이윽고, 이웃에 면한 마을 이울에서 새 식구를 맞

이하니, 비로소 동서가 생긴 것이다.

자신과 나이 차이 몇 살 되지 않은 시아재의 혼사에 청상의 형수 청암부인이

보여 준 솜씨와 범절과 규모는, 이울의 시가에서나 매안의 문중에서나 모두 깊이

놀라고도 남았다.

그네는 문중의 문장과 더불어 규수를 구하기 위한 의논을 하고, 마땅한 자리

가 나섰을 때 저쪽으로 믿을 만한 중매인을 보내 뜻을 물어 본 후에, 양쪽 집안

이 서로 허락하는 의혼에서부터 청혼, 허혼 과정에 단 한 가지 소홀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

푸른 옷감에 붉은 종이에, 붉은 옷감을 푸른 종이에 싸서 혼서지와 함께 함에

넣을 때, 종이 한 장을 귀 맞추어 접는 일이며 보자기에 봉자를 써서 매듭 끝을

봉하는 일 하나까지도, 귀와 각의 모양을 맞추어 반듯하게 세우면서 격이 살아

나도록 정성을 들었다.

이에 다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어서, 외로운 형수가, 없는 살림에 치르는 혼

사였지만 조금도 궁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 검박이 지엄하여 품격을 어려워하

게 하였다.

그것은,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사대 봉사 기제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소를 잡고 가마니로 떡을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닭 한 마리에 제

수 간소하게 올린 제사 음식을, 어떻게 나누길래, 온 마을 칠십여호를 다 돌고도

도선산 잔등이 너머 작은집 동네로 넘어가 지손들까지 두루 음복하게 하였다.

그 규모 있고 매시라운 손끝은, 실오라기 한낱을 동아줄보다 크게 쓰고, 흩어

진 흙먼지를 진흙처럼 잘치게 썼으니, 갓 시집온 손아래 동서 이울댁은 청암부

인을 마음속으로 조심하기 시부모에게 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하늘 아래 오직 단 두 형제 동서지간에 그 나이 차이 몇 살 안되는데,

하나는 홀로 되어 밤이면 온 산을 헤매는 늑대 울음에 잠이 안 오고, 다른 하나

는 지아비의 베개를 나누어 베는 것이 몹시도 송구스러워, 마음에 눈치가 가시

처럼 박히는 것이었다.

종가의 대문 바로 아래,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분가하여 위아랫집이 한울안

같이 나란히 사는 이울댁은, 새벽잠이 없는 청암부인이 행여라도 달리 생각할까,

미리 염려해서, 누가 무엇이라고 한 일 없는데도 늘 꼭두새벽이면 일어나, 먼저

방에 불을 켜 놓고 밖으로 나와서 대빗자루로 마다을 쓸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아 검은 어둠이 겨울 푸르스름한 기색으로 바뀌는 시간에 싸

악 싸악, 이울댁이 마당 쓰는 소리가 들리면 그것은, 내외가 한자리에 있지 않다

는 표시였다.

과형수에 대한 병의의 마음씀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방문 바깥에서는 결코 젊

은 내외 희히낙락 다정한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청암부인이 비록 의연하고 정대하여, 그 성품이 굳고 도량이 넓다 하지만, 말

하지 않는 가슴속의 갈피를 낱낱이 헤아릴 수는 없는 일이라 이쪽이 조심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울댁은 회이하여 첫아들로 이기채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형님 자식이요."

몸을 갓 풀어 비린내 눅눅한 해산 머리에서 병의는 그렇게 말했다.

큰집에 아들이 없으면 당연히 작은집에 난 첫아들이 양자로 들어가야 하지만,

이울댁은 콧날이 시큰해져 말을 잇지 못하고

"날 풀리고 봄에 가면 어쩌겄소?

겨우 그 한 마디를 밀어낼 뿐이었다.

"여기서 큰집이 무어 천리 밖인가. 기왕에 보낼 것을 공연히 머뭇거리다가 이

런 저런 정 들면 떼어 내기 더 어렵지."

"그래도 이 엄동에."

"우리 생각만 허지 말고 형님 내외분 생각을 해 보시요. 한 부모한테서 난 형

제는, 한 나무에서 난 한 가지와 똑같은 것 아니요? 헌데 망형께서 종가의 종손

으로, 그 명을 오래 누리지 못허시고 그만 조세하신 지금, 돌아가신 형님 일을

누가 대신헐 것이요? 나 아니요? 배나무에 열린 배는, 내 가지의 배, 네 가지의

배를 다투는 법이 없지 않소. 그것은 다만 배나무의 배일 뿐이잖은가. 이 아이도

그런 이치로 생각하면, 내 것을 누구를 준다, 누구 것을 내가 뺏는다, 이런 마음

이 안 들지."

그런 줄을 누가 모를까.

그러나 도리보다 앞서는 것이 사정이어서, 새끼 낳은 이울댁은 고개를 숙이고

만 있었다.

"지손들의 집안에서도 이런 일은 당연한 것인데 더군다나 종손의 집안에서야

더 말해 무엇 하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런 내색 추호라도 하지 마시요. 종가

의 종손으로 양자 들어가는 것은 이 아이한테도 복된 일 아니요? 한 가문의 으

뜸이 되는 조상의 직계손으로서, 가묘를 지키고, 제사를 받들고, 가문으로부터

존중을 받는 사람이 종손 아닌가. 종가는 가문의 큰 집이요. 그래서 명절 때마다

잡숫는 차례도 반드시 종가에서 끝난 뒤가 아니면 지가에서는 먼저 올릴 수 없

지 않소?

또 종가의 집이란, 종조의 유령이 머무시는 곳으로서 일문이 숭앙하여 높이

받들고 우러르며, 대대로 종가의 소유로 하는 것이요. 그러고, 조상 제사에 바치

는 위토도 종손이 소유하고, 종중 재산도 모두 종손이 관리하는 것이요. 만에 하

나 종가의 생활이 어려울 때는, 문중이 힘을 합해서 돕는 것이고."

그때 이울댁은, 잠 든 애기의 머리맡에 포대기를 세워 바람을 막아 주었다. 얼

음 낀 겨울 바람이 방문을 때리며 시리게 끼쳐든 때문이었다.

"그러고, 형수님이 참으로 범연한 분이 아니시니, 이제 두고 보시오. 우리 집안

을 크게 일으켜서 명망을 떨치고, 예전의 가운을 되찾으실 거요. 그 성품이 준절

해서, 위엄 있고 정중한 것이 추상 같고 무서운 분이지만, 또한 인자한 분이라,

이 아이를 당신의 자식으로, 가문의 기둥으로 잘 길러 주실 것이요."

이울댁은 더 두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기채는, 강보에 싸여 청암부인의 안방으로 옮겨졌다.

이울댁이 포대기를 내려놓던 바로 그 자리에 지금, 소렴포 명주 이불로 몸을

감싼 청암부인이 하얗게 누워 있다.

그 옆에서는 염하는 사람들이 말없이, 시신을 동여 묶을 교대의 한쪽 끝을 세

갈래로 찢는다.

애통하게 부르짖어 곡을 하는 이기채를 바라보는 이울댁의 가슴이 그 삼베폭

처럼 찢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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