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혼불 3권 (46)

카지모도 2024. 4. 17. 08:13
728x90

 

대개 굿은 그 당사자 집에 가서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만부득이 무슨 사정이

있어 여의치 않을 때는 당골네 집에서 대신하는 경우도 있어서, 밤이면 어둠의

갈피를 헤집어 에이는 시누대 피리 소리에 장구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데 데 데 뎅

지이 징 지리 징 지잉 징

 

놋쇠 징소리가 거멍굴의 검은 하늘 깊은 가슴을, 말로는 다 못할 애원으로 두

드렸다.

그럴 때 무산은 달조차 토해 내지 못하고 오직 흐느끼듯 캄캄하였다.

이 무산과 저 근심바우 사이에 거진 한가운데쯤 되는 곳이 바로 옹구네와 평

순네, 그리고 공배네, 또 조금 떨어진 동산 기슭에 춘복이가 살고 있었다.

이곳은 길가였다.

어느 옛날부터 있어 온 것인지 사람들의 발길이 다져 놓은 소롯길이 제법 탄

탄한 이 길은, 북쪽에서 벋어와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잔잔한 동산들을 데불고 발길이 여기가지 오면, 동그라니 옴막한 거멍굴, 오른

쪽은 근심바우요, 왼쪽에는 무산이 보였다.

가던 걸음을 이 자리에서 멈추고 하나씩 하나씩 주저앉은 사람들이 백정도 당

골도 아니면서 머뭇머뭇 정착하게 된 이들의 윗대에서는, 금방이라도 다 떨치고

일어서서 다시 길을 가려고 이렇게 길가에 자리를 두었는지도 모른다.

본디 어디서 무엇 하던 사람들이었건 간에 다른 어디에는 아무래도 몸을 붙이

고 살 수가 없는 궁색한 형편들이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가 어디라고

팔천들 사이에 끼여, 아낙은 당골네 일을 돕고 남정네는 백정의 칼질을 도와 그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살겠는가.

그래서 걸핏하면 옹구네는

"안 듣는 디서는 상감님 욕도 허다는디 머 시께잇 것들 말을 못하여? 아이고

그 당골년 낯빤대기."

하고 당골네 욕을 평순네한테 찰지게 하기도 하고

"저런 순 백정놈이."

하고 택주네 무더기 누구를 마구 잡아 몰아붙이곤 했다.

물론 듣는 데서는 어림없는 일이지만,

그러면서도 일손은 재발라서 산 밑으로 가나 바우 밑으로 가나, 어서 오라는

말을 듣지 왜 왔느냐는 말을 듣지는 않는다.

그런데 일 봐 주는 집에서 이곳으로 돌아오면 꼭 그렇게 뜯어 내는 소리를 하

는 것이다.

그것은 매안으로 일하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원뜸의 대갓집이거나 문중 사람들의 집이거나 허드렛일은 많았고, 눈치껏 몸

을 놀리면 얻어먹을 것이 생기는데다가, 농사철이나 추수할때나 놉이란 언제나

필요한 것이어서, 이 사람들은 매안으로 올라가곤 하였다.

고리배미, 거멍굴에서나 매안에서나 날삯도 삯이지만 어디로 밀어내지 않고,

오면 오는가, 가면 가는가, 해 주는 것이 이들에게는 큰 의지가 되었던 것이다.

날마다 날품을 팔아 그날 먹을 것 그날 벌어야만 한다면, 얼마나 멱이 막힐

노릇인가.

근본도 모르고, 가진 땅 한 뙈기도 없는 이들이 이렇게라도 어떻게든 살아 보

는 것이, 아슬아슬한 세상에 발을 붙일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늘, 길바닥과 발바닥 사이에 보이지 않는 물 막이 있어 발이 땅에 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은 공배네는,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길가에 앉은 공배네 집 이쪽 저쪽으로 좀 들어가고 좀 나오면 모여 있는 이들

은, 나름대로 동산 기슭에 채마밭을 일구어 그저 반찬거리나 걷어 먹었는데, 샘

은, 모두 한 우물을 썼다.

그저 사람 사는 것이 이런 것이려니 하고 하루하루 넘기다가 한번은 공배가,

몹시 무거운 얼굴로 쪼그리고 앉아서 늙은 볼따구니를 주먹으로 받친 채 고개를

기울이고는,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애초 백정도 아니고, 차라리 그러면 포기나 허제, 배운다고 당골일을 헐 수

있능 것도 아니고오, 그러먼 머 땅이나 한 쪼객이 있능가 허먼 그것도 아니고.

다른 재주 머 맹글찌 아능 거이 있는가 하먼 그것도 아니고, 그러먼 또 종이냐

허먼 그것도 아니고오. 우리 아부지, 오직허먼 이런 팔천놈으 복판으다 나를 나

놨겄어. 그러고는, 나 이레 지내먼 뜰라고 그릿겄지. 그러다가 걸어댕기먼, 장개

가먼, 손지 보먼, 헝 거이 제머. 아이고, 몸썰 난다. 자식 없기 잘했제. 에에이. 던

지런 놈으 시상. 이러고 살어도 이게 무신 사램이여?"

무슨 속상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좀처럼 그런 말 안하는 공배의 푸념에

공배네는 속이 뜨끔하여 헐끗 낯빛을 훔쳐보았다.

무슨 조상을 타고나서 시방 어떻게 살든, 또 부모 죽은 다음에 제가 어찌 살

아가든, 그네는 '자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부모가 비록 백정이고, 당골네일지라도, 아니면 떠돌이 동냥아치일지라도,

자식은 마땅히 그 핏줄을 받아 부모의 대를 이어주어야만 한다고 그네는 믿었

다.

부모의 껍데기가 무엇이고, 하는 일이 무엇인가, 양반인가 상놈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귀하면 귀한 대로, 천하면 천한 대로, 제 생김새를 갖추게 해 준 부모와

그 부모의 부모를 거슬러 더 까마득히 올라가면 만나게 될 할아비를 공배네는

그리워했다. 또 실같이 가느다라면서도 살과 뼈의 심지 속에 또렷하게 박혀서,

아들을 넘고 손자를 건너 증손자에게 흘러내려가는 할아비의 넋이, 그대로 그네

의 살 속을 지금 꿰뚫고 지나가는 것만 같아서 그네는 가슴을 오그렸다. 그러나

그네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어쩌다 하나 얻은 아들을 꿈에도 믿지 못할 순간에

놓쳐 버리고, 다시는 더 낳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한

것일까. 그네는 자신의 몸에 갖힌 채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는 할아비의 넋이

핏줄을 동여매는 것 같은 아픔에 어금니를 문다.

"자식 소리는 또 왜. 머 잘난 사람만 사램이랍디여? 못난 사람은 또 못났다고

사램이 아니고? 아 꼭 멋이 돼야야만 사람이간디, 기양 사램이먼 돼았지."

혼자말처럼 대꾸하며 눈을 돌린 사립문간에,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온 길인지

는 모르나, 이곳을 지나 또 어디론가 끝간 데 없이 흘러 갈 소롯길이 누워 있었

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3권 (48)  (0) 2024.04.19
혼불 3권 (47)  (0) 2024.04.18
혼불 3권 (45)  (0) 2024.04.16
혼불 3권 (44)  (0) 2024.04.15
혼불 3권 (43)  (0) 2024.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