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고리배미
만일 낫을 놓고 이야기를 한다면, 날카로운 날끝이 노적봉 기슭의 매안이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한참을 걸어와 낫의 모가지가 기역자로 구부러지는 지점이
새로 생긴 정거장이며, 그 목이 낫자루에 박히는 곳쯤이 무산 밑의 근심바우 거
멍굴이다.
그리고 더 아래로 내려와 맨 꽁지 부분 손 잡는 데에 이르면, 고리봉 언저리
민촌 마을 고리배미가 된다.
이름 그대로 둥그런 고리의 등허리같이 생긴 산이 모난 데 없이 수굿하게 앉
아서 좌우에 나직나직한 능선을 그으며 마을을 보듬고 있는 이곳에는, 어림잡아
백이십여 호가 넘는 집들이 집촌을 이루고 있었다.
산중도 아니요, 들도 아닌 비산비야의 난양지지, 따뜻하고 양지 바른 터에 처
음으로 들어온 한 헌조, 어질고 덕망 있어 이름이 높이 드러난 할아버지의 자손
들이 그곳에서 오 대, 십 대, 그리고 몇 백 년씩 살아오며 같은 조상의 가지로서
동족 마을을 이룬 것이 집성 반촌이라면, 고리배미는 제 각기 이 마을에 들어온
내력이나 성씨가 서로 다른 각성바지 이 사람 저 사람들이 무간하게 섞여 사는
산성촌 민촌이었다.
물론 이 중에는, 고리배미에 맨 먼저 자리를 잡아 대대로 살면서 거의 삼십여
호 가까운 일가붙이를 데리고 있는 집고 있고, 그보다 한 발 나중에 들어와 이
십여 호 되는 집, 또 그보다 더 이만큼 중간에 정착하여 여남은 가호가 생겨난
집들도 있었지만, 그들을 빼고는 많아야 예닐곱, 아니면 너댓 집들이 같은 성씨
로 형제 분가하거나 혹은 아재비, 조카를 부르면서 살았다. 그리고 그 나머지들
은 그야말로 각동박이, 한 성씨에 한 집씩이고 기껏해야 늘어나서 두 집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수효가 많다고 해서 집안을 내세워 텃세를 한다거나, 한 집만
산다고 얕잡아 업신여기는 일은 별로 없었다.
"외나 우리 동네는 타촌서 들온 사램이 더 잘되는 디 아닝가. 기양 보따리 하
나만 달랑 들고 들와도 얼매 안 가서 심 짚고 일어나잖등게비."
"먼 짓을 허든지."
하는 말이 꼭 빈말만은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조상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부지소종래'라 하여, 자기가 비롯되어 온 곳을 모르니, 그 자신의 근본
이 어디에 있으며, 조상은 누구인지, 또 어떻게 살아왔는지, 집안 내력을 도무지
모르는 사람들이 산다고, 고리배미는 반촌으로부터 하시를 받았다.
비록 그곳이 판박이 천민인 무당이나 백정, 갖바치들이 사는 수악한 마을이
아니라 할지라도, 상인, 상민, 상한, 상놈, 상것, 상사람, 나라에 매인 종은 아니지
만 그 신분이 낮아서 곤궁하고, 가지가지 불리는 이름도 많은 상민들이 살고 있
거나, 향교 출입을 할 수 없는 신분인 중로들이 살고 있는 곳은 민촌이라 하였
다.
중로는 중인이다. 그들은 양반 다음가고 상민 위에 있는 사람들이라, 행세는
할 수 없었지만 천한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실리에 밝았다. 그래서 오직
공리와 효용에 가치를 두고, 자신이 가진 기술로 생업을 삼아 재물을 모았다. 이
세상에 재물보다 확실한 기둥은 다시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모은 재물
로 그들은 많은 전답을 사들였다. 물론 모든 중로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부자는 민촌에 많다."
는 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고리배미에는, 이 중로와 상민들이 서로 어우러져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신분의 구분은 있어서, 그들은 아무리 허물없이 이웃하고 살
아도, 쓰는 말만은 마구 섞지 않았다. 그 사는 형편이나 나이와는 상관없이 중로
는 상민에게 '하게'나 '하소'로 말을 놓았고, 상민은 중로에게 '합니다', '하지요'하
며 말을 올려 했다.
지금이야 옛날 같지 않아서, 그런 신분을 정하여 옮도 뛰도 못하게 만들었던
조정도 망하고, 이제는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
지나 외피에 불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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