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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45)

카지모도 2024. 4. 16.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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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늘 칼을 갈고, 날을 벼리고, 못 쓰게 된 쇠는 불에 녹여서 새것으로 만

드는 대장간이 꼭 있어야 한다. 늘 쓰는 그 많은 연장을 일일이 남의 손 빌려

할 수도 없고, 집안에 대장장이가 느닷없이 날 리도 없어서, 집 옆에다 조그맣게

성냥간을 하나 만들어 그들은 제 필요한 것은 제가 손질하고 또 만들어 썼다.

그저 오두막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시늉은 갖춘 성냥간은, 저 위에 할

아비 때부터 있던 것인데 이제는, 사정이 있어 이곳으로 들어와 눌러앉은 대장

장이 금생이한테 아예 성냥일은 맡겨 버린 것이다.

불에 쇠를 불리는 것을 '성냥한다'고 하니, 대장장이가 쇠를 다루어 대장일 하

는 것을 '성냥일'이라 하는데, 이 일 역시 팔천 중의 하나였다.

원래 백정은 신분을 바꾸어 평민이 되거나 생업을 바꾸어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었지만, 천민이어서 멸시를 받을 뿐이지 나라에 매인 종은 아니다.

그래서 일반 평민이라도 생활이 궁핍 곤란해지고 다른 살 길이 없으면, 백정

으로 들어가는 수가 있었다. 또, 같이 그 일을 하지 않더라도 금생이처럼 서로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대로 수수하게 생긴 딸년 얌례를 여의살이 시키고 부쩍 늙어버린 벙어리

금생이는, 그래도 여전히 이글거리는 화덕 앞에서 웃통을 벗어부치고 쇠를 달구

었다.

그는 일년 내내 택주네 푸네기 대여섯 집에서 쓰는 칼과 도끼를 손보고, 그

외엣일로 심심치 않게 낫이며, 호미, 괭이, 쇠스랑 같은 것들을 달구고, 벼리고,

녹이고 만들었다.

제대로 된 대장간이 아니어서 아주 이 길로 나설 수는 없었지만, 할줄 아는

일이라, 매안의 농기구 손질도 하고, 건너 고리배미 같은 데서 소소하게 부탁을

하면 택주네 일하던 중에 조금씩 해 보는 것이다.

그런 것은 어쩌다 맞돈을 받는 수도 있었지만 대개는 외상 일이어서, 그는 섣

달이 되면 농가를 한 바퀴 돌며 그 동안에 해 준 일의 품값을 받는 '성냥노리'를

나갔다.

그럴 때말고는, 밤이고 낮이고 거의 꾀를 벗다시피 벗어부친 채로 쇳덩어리를

두드려대면, 시뻘겋게 이글이글한 불 속에 쇠를 달구었다가, 또 물 속에 푸지지

지 요란스럽게 집어 넣고, 또 다시 내려치는 금생이의 성냥간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 쇠 치는 소리는 바로 눈앞에 무산 골짜기로 파고들었다.

택주네 무더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올리면, 저쪽에서부

터 남실남실 흘러오던 동산 능선이 여기 와 출렁하고 솟으면서 물살 또아리를

이루는 무산이 눈에 들어왔다.

감시르르 봉우리를 감아 올리는 듯도 하고 깊은 한숨을 무겁게 삼킨채 토해

내지 못하고 앉아 있는 것도 같은 산.

늘 달은 이곳에서 떴다.

무산 위에 떠오른 달은, 토월, 이상하게도 토해 내는 것처럼 보였다. 제 눈앞

의 근심바우 검은 덩어리가 그대로 가슴에 와 박히고, 또 그 아래 흐르는, 피 노

린내 배어든 개울물이 땅 속의 실핏줄로 스며 스며들어 무산의 온몸에 차 오르

는데, 대장장이의 쇠 치는 소리까지 그 속에 꼬챙이를 지르니.

더는 참치 못하고 밤이면 캄캄한 하늘에다 토해 내는 숨.

그것이 무산의 달이었다.

이 무산 기슭 바로 밑에, 제멋대로 자라나 스산하게 어우러진 대나무로 울을

두른 초가집 서너 채가, 꼭, 산의 오지랖 자락에 대가리를 모두고 깃들인 것처럼

옹송그리고 있었다.

당골네와 점쟁이, 그리고 고인 잽이들이 사는 집이다.

꼬막조개 껍데기보다 더 클 것도 없는 지붕이 동고마니 덮고 있는 황토 흙벽

과 지게문, 그리고 겨우 시늉이나 하고 있는 손바닥만한 마루와 토방.

여기에도 무산의 달은 푸른 물 소리로 떠오르고, 뭉친 먹물 같던 대나무 울타

리는 이파리 낱낱의 비늘을 검푸르게 씻으며 몸을 솟구쳐

쏴아아

귀신이 쓰다듬는 소리로 달빛 소리를 받았다.

이 거멍굴에 누구네가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왔는지 아니면 같은 때 나란히 묶여서 이곳으로 던져졌는

지 알 수 없지만, 무당도 백정이나 마찬가지로 팔천 중의 하나요, 그 여덟 가지

천민 중에서도 백정과 동무해서 제일 업신여김을 받아온 것만은 같았다.

마을 사람 어른들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들한테도 반드시 말을 바쳐 써야만 하

고, 절대로 일반 사람들과는 혼인할 수 없다고 금지되어 있는 무당 당골네는 아

무리 사람들한테 천대 하시를 받아도 무업을 그만둘 수 없었다. 다른 일로 바꿀

수도 없었다. 거꾸로 보통 사람이 이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었

다. 그래서 당골네들은 동파들끼리만 서로 혼인하고, 저희들끼리 판을 나누어 대

대로 세습하여 이 업을 이어왔다.

어디고 한 마을에는 한 당골만이 있는데, 이 당골은 마을 한 개, 혹은 두 개,

많으면 너덧 개까지 혼자서 맡는 '당골판'을 가지고 거기서만 굿을 했다. 결코

남의 판을 넘보아서는 안되었다.

거멍굴 무산 밑의 세습무 당골네 백단이는, 두 마을을 합하면 이백여 호가 훨

씬 넘는 매안과 고리배미를 자기 당골판으로 하였다. 그것은 본디 당골네의 시

어미가 보던 판이었는데, 이제 그녀가 죽고 그 판을 물려받은 것이다.

백단이는 이리로 시집오던 그날부터 두 마을의 어느 집에서 굿을 할 때마다

시어미를 따라가, 잔일, 큰일, 겉의 일, 속의 일들을 속속들이 배우기 시작했었다.

전라도에서는, 굿을 여자만이 할 수 있었으니, 당골네의 아들들은 어려서부터

장구를 치고, 피리를 불며, 구음 넣는 가락을 배웠다.

장가든 다음 무부가 되면, 제 아낙이 하는 굿에서 악기로 반주하는 잽이 노릇

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안이면 격이 높은 곳이요, 고리배미는 민촌이라도 가호 수가 많아서, 무산

밑의 당골네는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한없는 설움으로 구천을 떠돌며 흐느끼는 가여운 귀신, 원한 맺힌 귀신, 갈 곳

을 모르는 귀신들을 서럽게 서럽게 불러서, 그 맺힌 고를 풀어 주는 굿의 사설

을 뼈에서 우러나오게 노래 부르는 일부터, 춤의 가락과 굿상 차리는 절차, 그때

입는 옷 같은 것들을 세세 낱낱 배운 당골네는, 마을에서 으레 철 따라 하는 굿

이며 집집마다 경우 따라 해야 할 굿들을 정확하고도 흐드러지게 다 배워야 한

다.

그러나, 가령 아무개가 왜 그렇게 아픈지 그 원인을 점치고, 굿하기에 좋은 날

짜를 받는 것은 점쟁이가 하였다. 점쟁이는 그 몸에 신이 실려 접신한 사람이니,

어리석은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계의 일을 점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것은 아무리 굿을 잘하는 당골네라도 알 수 없는 점쟁이의 세계였다.

헌데 점쟁이가 아무리 점을 잘 쳐도 굿를 맡아서 할 수는 없다. 굿은 하루아

침에 홀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 꼼꼼이 배우면서 외우고 익히고,

드디어는, 귀신이라도 이 당골네의 정성과 솜씨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경지

에까지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지붕의 이마를 맞대고 앉아 점쟁이는 점을 치고, 당골네

는 점괘 나온 대로 굿을 하였다.

그리고 무부와 함께 악기 반주를 하는 잽이가 사는 집이 바로 그 옆이었다.

잽이는 남자들이다.

남자들은 굿상에 꾸미는 종이꽃을 만들거나, 굿에 쓰일 물품들을 사러 장에

다녀오고, 봄에는 보리 때, 가을에는 나락 때, 당골판에서 주는 보리나 벼, 혹은

쌀을 거두는 일도 한다.

당골은 제 당골판인 마을에는 굿을 할 때 일일이 그때마다 떡 값 얼마, 초 값

얼마, 하고 받는 것이 아니라 일년 내내 으레 그 마을에서 무슨 굿할 일이 생기

면 제 일로 알고 그냥 했다. 그러면 마을에서는 봄, 가을로 보리나 쌀을 거두어

일년 먹을 곡식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이 '동냥'이었다.

점쟁이 집에는 이른 새벽부터 해 넘어갈 때까지, 문복하러 오는 아낙들의 발

길이 끊이지 않아 코빼기만한 토방에 짚신짝들이 어지럽고, 당골네 집에서는 굿

에 쓸 창호지 혼백을 하얗게 오리고 있는데, 사람 사는 세상에는 어찌 그리 맺

힌 일이 많은가, 남의 귀신 피멍도 풀어 주는 당골네가 막상 그 자신의 그 무엇

도 풀지 못하면서, 흰 무명필을 펼치어 마디마디 일곱 개의 고를 맺는다.

오늘 밤 굿에서 풀 '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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