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겉옷 밑에는 여전히 오래 오랜 세월 동안 묵고, 가라앉고, 엉겨붙은 관습이
소금 버캐 켜켜이 자욱한 몸뚱이처럼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새로 난 철도가 마을 뒷산 고리봉의 저 뒤쪽으로 벋어 지나가듯이, 개화
개명이라는 새 문물은 마을 바깥 저 뒷등허리로 저희끼리 지나가고 있을 뿐. 이
마을 안 고리배미는 예전부터 나 있는 길을 그대로 끼고 앉아, 변함없이 걸어서
다니는 사람들 모양 어제 살던 대로 오늘도 살고 있는 것이다.
양반들이야 민촌이라고 웃든지 말든지 여기서는 여기서대로 그런 것을 가리면
서, 중로는 체신과 실속을 챙기려 하였고, 상민은 자신들이 쇠백정 도한이, 고기
잡는 어한이, 소금 굽는 염한이에 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스스로 위로하
였다. 이는 삼한이라고 하여 몹시 천대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갯가에 났드라면, 도한이는 몰라도 어한이, 염한이 중에 하나가 되얐을 거잉
만, 우리 같은 상놈이 무신 근본이 있어야 말이제. 떨어진 디서 기양 목심 부지
허고 살었을 거잉게. 앙 그렁가? 불행 중 다행이여, 농사 짓는 디서 나서 농사
짓고 상게 말이여."
"옘병하고 앉었네, 도통을 헐랑가, 지 땅이라고는 단 한 볼테기도 없음서 머이
그렇게 다행이냐, 다행이."
"긍게나 말이다. 아이고, 옘벵이나 엄벵이냐, 천지에 깔린 땅 도지 받어서 다
머에다 쓴다냐."
"논 사지."
"그놈 도지 받으먼?"
"밭 사고."
"또 그놈 받으먼?"
"첩 딜이고."
"핫따, 어뜬 놈 좋겄다. 비오리 지금 몇 살잉가?"
"한 삼십 안되쓰이까?"
"넘었지맹."
"넘어? 아이고, 아까워라."
거개가 농사일을 하는 이 마을에서 제 논 가진 집은 얼마 안되지만, 그래도
남부럽지 않게 농사를 크게 짓는다고 소문난 사람은 엄서방, 엄병곤이었다. 그
는, 경술국치 이전에, 자못 위세가 당당하던 오수역 역리 엄구용의 손자로 나이
오십이 벗어진 사람이다.
고리배미 토박이인 병곤은 키가 땅딸막하고 어깨에 살이 올라 바라진 체구에
목이 굵고 짧은 외양이 좀 훤칠하지 못한 것이 흠이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기호성은 대단하여 그의 몸에는 늘 팽팽한 바람이 차 있었다.
거기다가 이곳에서 대를 물려 살아온 집안인지라 일가붙이도 넉넉하여 삼십여
가호나 되는 그는, 사위도 그다지 고단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주로 이 마을의 동편쪽에 모여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엄
씨네를 두고 '동엄'이라고 하였다. 이 동엄의 머리에 앉은 것이 병곤인 셈이었다.
그들 일가 중에는 병곤의 논을 부치고 있는 집도 몇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 '염
병' 소리 끝에 '옘벵'이냐 '엄벵'이냐고 한 말은, 엄병곤의 이름을 두고 빗댄 말이
고, '비오리'는 마을 어귀 삼거리 주막의 매초롬한 술어미이다. 그리고 둘러앉아
한 마디씩 한 것은, 매안 원뜸의 소작인들이다.
엄병말고는, 농사 지어 자기 앞 가리면서 곳간에 찬 바람 나지 않을 만한 서
너 집을 제하면, 그저 근근이 굶지나 않을 정도의 논 뙈기에 온 식구 목구멍을
의탁하는 사람들과, 그나마도 없어서 소작을 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같
은 일가붙이인 엄병곤의 논을 부치는 엄씨 들이나, 매안에서 소작을 얻는 사람
들은 그래도 나았다. 이도 저도 못하여 동척에 소작 계약을 한 여러 집은
"차라리 동냥아치가 낫다."
고 말라 붙은 한숨을 모질게 쉬었다.
앞앞이 사는 형편도 다르고, 모양도 다른 고리배미 사람들은, 대개는 농사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 다른 생업을 가진 경우도 많았다.
이 마을의 한쪽 끝에 사는 부칠은 나이 오십의 나무꾼인데, 그는 오직 한 가
지, 나무를 하고, 그것을 장에 내다 파는 나무장수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
다.
지게 하나 짊어지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소나무 가지를 낫으로 쳐내 동이로
묶어 나뭇짐을 만들거나, 가을이면 발치에 수북히 쏟아져 쌓이는 마른 솔잎을
갈퀴로 긁어 가리나무 다발을 만들거나, 혹은 나뭇간에 쟁일 장작단을 만들어,
장날이면 부칠의 아낙은 머리에 이고 사내는 등에 지고, 읍내로 나갔다.
읍내 나무전 거리에서도 그의 나뭇단을 알아 주었다.
어려서부터 나무 일로 뼈가 굵은 그는 이제 그 뼈에 바람이 스며들어 예사로
운 날씨에도 쉽게 속이 시리지만, 나뭇짐만큼은 여전히 바윗돌 같이 단단하고
무겁게 묶어 내는 때문이었다.
부칠과 이웃에 살면서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 온 모갑이는, 박달 방망이, 빨래
방망이, 홍두깨들을 깎아서 팔았다.
"에레서 팽이를 깎어도 말이여, 우리는 기양 대강 숭내만 내 갖꼬는 울둑울둑
헌 대로 치잖이여, 왜. 근디 모갭이 이 사램이 깎어 논 것은 달르드라고. 맨드로
옴허니 태가 나서 아조 이뻤제잉."
그것은 부칠의 말만은 아니었다.
유난히 솜씨가 곰살가워 일 맵시가 남 다른 그의 손으로 만드는 것 중에 일품
은 아무래도 나막신이었다.
보통 '나무께'라고 하는 이 나무 신은, 비 오늘 날 진흙 땅에서 신는 진신과
마른 날 신는 마른신 두 가지인데 어느 것이든 높은 굽이 달려 있었다. 이 굽이
서툴게 달리면 높이가 맞지 않아, 신고 나서면 뒤뚱거리고 걸음이 불안하여 넘
어지기 좋았다.
그런데 모갑이의 나막신 굽은 맨땅을 디딜 때보다 오히려 더 상큼한 기분이
들게 알맞았고, 먼 길을 가도 다리가 아프지 않았으며 아무리 오래 신어도 굽이
쪼개지거나 빠지는 일이 없었다.
"사람만 양반 상놈이 있는지 아능가? 나무깨도 있네이. 어뜨케 달르냐고? 우
선 나무가 달체. 개법고 보드람서도 단단헌, 좋온 나무는 양반신으로 가고, 상머
심 괭이 백인 마당발맹이로 심 좋게 막 생긴 나무는 상놈 신으로 가고. 근디, 외
나는 어디가 달르냐먼 뫼양이여, 뫼양."
퉁퉁하니 뭉시르르하여 둔한 코빼기는 볼품이 없어 막신밖에 안된다. 동그스
름하고 매끈하게 다듬어져 계란이 오히려 거칠게 느껴지는 뒤꿈치도 말할 것이
없지만, 그 뒤꿈치에서부터 쪼옥 곧은 선으로 유연하게 벋어난 선이 콧부리에
이르면서 날렵하게 위로 휘어 오를 때, 여기서 그 나막신의 모양과 품이 결정났
다.
"코빼기 멍청허먼 신 베려. 딴 거 다 잘해도 헛짓해 부리능 거이여. 자, 바라,
코빼기는 요러어케, 닭 대가리가 발등으로 고개를 홰애 돌림서 모가지 따악 쉭
인 것맹이로 이뿌게 깎어야여."
그는 옆에서 일을 배우는 아들한테 번번이 일렀다.
그렇게 다 된 나막신의 신총에, 가늘고 검은 먹줄을 선명하게 두 줄로 그리기
도 하고, 인두로 지져서 수를 놓듯이 고운 꽃잎이나 구름 무늬, 넝쿨 같은 당초
문을 새겨 넣기도 하는
"모갑이 나무깨."
는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나씩 가지고 싶어했다.
"갖신 부럽잖다."
는 말을 듣는 그의 나막신은, 그 결이 비단같이 부드럽고, 신었을 때 발을 오무
려 감싸 주는 느낌이 안정되면서 편하고, 깎고 꾸민 모양이 발에 신기 아깝게
어여뻤다.
모갑이는 장날이면, 방망이, 홍두깨와 함께 한 죽, 두 죽, 솜씨를 다해 파 놓은
나막신을 어깨에 메고 읍내로 나갔다.
갖신이야 거멍굴 백정 택주네붙이 중에 갖바치가 있어 거기서 짓지만, 모갑이
의 나막신도, 운혜, 당혜, 비단 입힌 갖신 못지 않게 가지고 싶은 물건이었다.
그러나 갖신이고 나무깨고 다 그만두고, 그저 짚신짝이라도 아쉽지 않게 있었
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방물장수 서운이네였다.
그네는 마치 함을 지듯이 뚜껑에 손잡이가 달린 버들 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낡은 무명 멜빵을 멘 채로 장날이면 읍내로, 아닌 날은 이 마을 저 고을로 찾아
다니며 행상을 했다.
윤이 반들반들 나고 손때가 버들 속으로 깊이 배어 들어 투명하게 얼비치는
가방 뚜겅을 열어 세우면, 그 속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 있었다.
위짝 아래짝 칸에는 올망졸망 형형색색 여자한테 소용되는 용품들이 가득 차
있는데, 그 앙징맞고 영롱한 모양이나 색깔들이라니.
하얀 무명실, 다홍, 연두, 노랑, 남색 명주 푼사실, 꼰사실, 가위, 바늘, 골무, 그
리고 쟁가랑거리는 은단추, 호박 단추, 앵두 단추, 막단추, 거기다가 참빗, 얼레
빗, 화각빗이며 빗치개에 귀이개, 그리고 비취 물빛 영락없이 흉내낸 사기 비녀
와 검은 비녀, 술이 달린 노리개, 반지. 그 옆에 숨막히게 보얀 향을 뿜어 내는
분통이며 반드르르한 머리 기름병. 구리무 곽.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를 곱게 놓은 경대보와 매화 꽃 벙그는 비단 수저집, 바늘집, 댕기, 이런 것
들이 빼곡 들어 찬 가방을 지고, 서운이네는 걸어서 걸어서 마을과 마을을 하염
없이 떠돌아 다녔다.
"참말로 나 다리 품 하나는 여한도 없게 팔었그만, 긍게 내 다리가 나 멕에 살
링 거이제, 나 그런 생객이 들등마잉. 지가 갖꼬 나온 지 몸뗑이 사대육신이라도
저허고 진 인옌이 다 각각 달릉 거잉가아. 어쩡가. 아 왜 어뜬 사람은 손으로 먹
고 살고 어뜬 사람은 발로 먹고 살아아. 또 어뜬 사람은 소리 하나로 살고. 그게
다 지 몸뗑이허고 저허고 진 인옌이제잉."
젊은 날부터 방물장수로 나서서 한평생을 길바닥에서 햇빛 아래 돌아다닌 탓
으로 이제는 정수리 머리가 버슬버슬 부스러져, 고시라진 옥수수 수염같이 되어
버린 서운이 할미는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러면 외눈백이 곰배팔이는 머이고?"
이야기 듣던 노파가 한 눈을 찌그리며 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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