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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8)

카지모도 2024. 7. 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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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하게 피어나는 꽃잎도, 향훈도, 우거진 잎사귀도, 꽃보다 더 곱다는

단풍도 이미 흔적 없이 사라진 대지의 깡마른 한토에, 나무들은 제 몸을 덮고

있던 이파리를 다 떨구어 육탈하고 오로지 형해로만 남는 겨울.

겨울은 사물이 살을 버리고 뼈로 돌아가는 계절이다. 그래서 제 형상을 갖지

않는 물마저도, 흐르고 흐르던 그 살을 허옇게 뒤집어 뼈다귀 드러내며

얼어붙는다.

그뿐인가, 바람 또한 경의 뼈를 날카롭게 세워 회초리로 허공을 가르며

후려치니, 날새의 자취도 그치고, 사람도 다니지 않으며, 짐승 또한 굴 속으로

들어가 몸을 사리는 혹독한 추위 속에, 사위를 둘러보아 그 무슨 위안이나 온기

한 점 얻을 길 없는 삼동.

헐벗은 잿빛으로 앙상한 골격을 뻗치고 있는 낙목한천에, 겨울 달은 얼음처럼

떠오른다. 그래서 그 이름을 빙륜이라 하는가.

얼음보다 차고 맑은 둥근 달은, 얼음가루가 안개같이 서린 손으로, 삭막한

세상의 밤을 쓸어 내리며 푸르게 푸르게 옥물 들인다. 물든 밤은 그대로 다시

투명하게 얼어, 대낮같이 환한 달이 뜬 밤이년, 웬일일지 달 없는 밤보다 더

춥게 느껴지곤 한다.

아마 빛으로 속이 꿰뚫리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이 결곡 청절한 달빛은, 그 영기로, 달빛 속에 선 나무과 언덕과 골짜기의

골수를, 찌르듯 미추고, 남모르는 눈물이 차 있는 사람의 응달진 폐장에까지도,

칼날처럼 꽂히어 투명하게 관통하니, 찬 달빛이 찬 속이 그만큼 시린 탓이리라.

때로는 눈이 내려 산야가 오직 흰 빛으로 덮인 밤에 달이 떠 "월백 설백

천지백" 이라고 고적을 오히려 서로 비추어 주는 밤은 그래도 얼마나 화려한

것인가.

그 흰 눈도 없는 극한의 밤에, 들여다보기 무서우리 만큼 깊고 검푸는

거울이, 티 하나 없이 말갛게 씻기워 상공에 걸린 겨울 밤 하늘, 그 가슴

한복판에 얼음으로 깍은 흰 달이 부시도록 시리게 박혀 있는 빙월이야말로,

달의 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강실이는 그 냉염한 달을 오래 오래 우러르며, 버선의 발 등에 묻은 달빛이

속으로 얼어들어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다만 그네는 몇 번인가 고개를 돌려 희부연 댓돌 위에 뎅그마니 놓인 검은

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었다.

그 신은 얼핏 보면 달빛의 얼룩인가 싶기도 하였다. 어쩌면 그렇게도

역력하였던고.

강실이는 모두어 잡은 두 손으로, 싸락싸락 살을 베는 것 같은 찬 바람이

끼치는 저고리 앞섶을 누른다, 그러나 앞섶을 눌러도 한기는 덜어지지 않는다.

싸아 하니 한속이 돋은 가슴의 속장을 헤집고, 저미어 파고드는 찬 기운은,

어금니를 지그시 물며 어깨를 오그려 보아도 이미 어쩔 수가 없다.

아아. 언 가슴이 빠개지는 것 같은 통증에 한숨을 토하며, 후두르르 떨리는

다리를 더는 가누지 못하고, 강실이는 무너지듯 서 있던 마당의 살구나무

그림자에 주저 앉는다.

희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 빙무를 허옇게 이고 선 아름드리 검은 고목

살구나무는, 구부러진 둥치과 뻗친 가지의 그림자를, 제 몸보다 더 커다랗게

드리우며 귀기를 뿜어 내고 있었다.

두 팔로 무릎을 감싼 채 쪼그리고 앉은 강실이는, 고개를 수그려 무릎에

묻는다. 그네의 여윈 어깨 위로 나뭇가니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흰 달빛을

눈부시게 받는 흰 등허리, 까칠하게 우거진 가지의 그림자가 선연하게 떨어져,

그네의 동그마니 웅크린 등허리는 마치 모질게 후려친 채찍에 멍이 든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쩌면 무슨 그물에 걸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어찌하랴. 강실이는 묻었던 고개를 들고 다시 한 번 댓돌을 바라본다.

달빛 받는 댓돌 위에 무심히 놓인 검은 신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을

찌르는 것은 날카로운 달빛이었다. 그 찔린 자리가 시리게 저리어, 강실이는

담이 결린 것처럼 숨을 들이쉴 수가 없었다. 그러보 보니, 그네의 가슴을

파고들며 에이게 저민 것은, 한기가 아니라 칼끝 같은 달빛이었다.

그 것을 신에 고인 달. 아마, 굳이 불을 밝히지 않아도 방안이 그렇게

우련했던 것은, 장지문에 가득히 밀리어 비치는 바깥의 달빛 때문이었으리라.

무엇 하러 달은 이리 밝을까.

희부윰한 방안의 한쪽 자리에 모로 누운 강실이는, 부시게 흰 장지문을

손으로 쓸어 보며 생각하였다. 창호지 한 장으로 내려와 그네의 손 끝에

만져지는 달빛은 사르락, 바람 스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그뿐,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떨어져 뒹굴

잎사귀 하나 남아 있지 않은 혹한의 뜰에, 사람을 문득 놀라게 하던 나뭇잎

소리조차 들릴 리 없는데.

그네는 귀를 거두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발소리만. 그저 다만 발소리만이라도 들었으면. 그냥 지나가 버려도 좋으니,

왔다는 기척만이라도 들렸으면. 마음의 깊은 골짜기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곳에, 그네는 귀 하나를 심어 놓고 날마다 기르면서, 할머니 청암부인의 출상을

앞둔 저녁 어수름 속에서, 또 새해가 다가서는 섣달 그믐날의 오밤중에, 그리고

아까 그렇게 달 뜨는 한밤에, 오직 발소리 몇 점을 기다리면서 전신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네의 온몸을 어느새 귀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바람 소리마저 달빛ㅇ[ 흡입되어 파랗게 얼어 버린 밤, 문풍지도 울지

않는데, 못 듣고 놓쳤을 리 천만 없건만, 그의 발소리는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정한 사람. 강실이는 시름없이 돌아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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