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그것이 언제쯤이었을까. 순간이었던 것도 같고, 얼만큼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던 것도 같았다. 저벅, 저벅, 저벅. 그네는 꿈 속에선 자갈 많은
고샅을 귀 가까이 밟고 오는 발소리였다. 그것도 매안에서는 쉽게 듣기 어려운
구두 소리가 분명하였다. 저벅, 저벅, 저벅.
그 소리는 막 오류골댁 사립문을 들어서면서 달빛 교교한 마당을 지나,
강실이가 누워 있는 방문앞 댓돌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퉁. 가슴이 내려앉은
소리가 제 귀에도 커다랗게 울린 강실이는 미처 그만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장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지문에는 아까보다 더 새하얀 달빛이 드리워져 오히려 귀시의 옷처럼
섬뜩해 보였다. 누구인가, 라고 생각한 겨를도 없이 그네는, 내려앉은 가슴이
저 밑바닥에서 무겁게 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눈물로 출렁이는
무거움이었다.
아아, 오라버니, 강실이의 목소리는 그 무거움에 눌리어 눈물 밑으로
잦아들었다. 오셨구나.
더듬더듬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여미며 강실이가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할 때, 장지문에 그림자가 먼저 비쳤다. 아직은 댓돌 위에 선채라 윗몸만
보이는 그림자의 윤곽은, 달빛이 희어서 칼로 그린 듯 새까맣게 또렷하였다.
그것을 분명 강모였다. 각진 어깨에 부수수 일어선 그 머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실낱처엄 다비치는 선연한 그림자는, 참으로 강모가 분명하였다.
아니, 그 그림자가 아니어도, 저만큼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만 들어도 그것은
틀림없는 강모가 아니었던가.
강모의 발소리는 늘 왠지 고단하고 고적하게 들렸었다.
무엇인가 머뭇거리는 듯하면서도 떼지 않을 수 없어, 한 걸음 한 걸음씩
내딛으며, 그 걸음마다 생각을 같이 옮기는 것 같은 그 음향을, 강실이는 알고
있었다. 그 음향은 가슴에 깊이 찍히어 지문을 남겼다.
강모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가슴에서 발소리가 먼저 울리었다. 그 강모가
지금 장지문 밖에 서 있는 것이다. 창호지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강모와 마주선
강실이는, 후우. 짐을 내려놓는 듯한 그의 고단하고 깊은 한숨 소리를 역력히
들었다. 숨소리는 창호지로 스미더니 달빛을 싣고 방으로 밀려들어왔다.
그 한숨을 그대로 강실이의 가슴에 얹혔다. 숨소리가 얹힌 가슴에 습기가
자욱히 어리면서 눈물 같은 물방울로 맺혀 흐르려 할 때, 강모는 마루로
올라서는 대신 다시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의 발소리가 먼저 한 단 아래로
낮아지더니, 그림자 몸이 반으로 내려앉고, 드디어 둥그런 머리 그림자가
사라진다, 그러더니, 휙. 소리가 날 만큼 그의 그림자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네의 눈앞에는 옥양목 휘장같이, 쏟아지게 흰 장지문이 맨살로 드러났다.
어디 가시오. 황급히 문고리를 벗긴 강실이가 문짝을 열어젖히자 왈칵 달빛이
밀려들었다. 마치 그네가 밖으로 나서는 것을 온몸으로 막으려는 것처럼.
그네는 달빛에 밀려 더 나가지 못하면서 두 손을 내밀었다.
어디로 가셨소. 금방까지 바로 방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자취도 없이 모습을
감춘 것이 믿어지지 않은 그네는, 기응이 사랑으로 쓰고 있는 건넌방으로
강모가 들어갔는가 하여 황망히 그쪽을 보았으나, 불빛 없는 검은 방이 괴괴할
뿐이었다.
그리고 헛간과 빈 외양간, 뒤안으로 돌아가는 모퉁이. 그 어느 곳에도 사람의
기척은 보이지 않고, 오직. 달빛이 밝아서 더 어두운 어둠만이 구석구석
시커멓게 뭉쳐 있을 뿐이었다.
이럴 수가 있을가.
허망하여 망연히 서 있는 그네의 가슴팍으로, 뭉친 어둠의 덩어리가 무너져
내렸다. 강실이는 무너지는 덩어리를 피하듯 마루로 나섰다.
아무래도 맏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럴 수가 있을까.
그네는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수그려 마루 아래 강모가 홀연 나타나 그림자로
섰던 토방과 댓돌을 더듬듯이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그 댓돌 위에는 한 켤레 검은 구두가 달빛을 받고 있었다. 조금 전에 비친
것은 결코 헛된 그림자가 아니라는 말을 대신하듯, 아. 안 가셨구나.
그냥 불도 안 켜고 아버지 계신 저쪽 방으로 들어가셨나 보다.
강실이는 그만 마음이 놓이면서 눈물이 목까지 복받쳐, 더는 참지 못하고,
버선발로 토방에 내려가 하염없이 강모의 구두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발을 담았던 구두는 남루하게 낡아서 주름이 깊었지만, 더디 먼곳을
헤매어 돌아다닌 흙먼지가 체온같이 부옇게 묻어 있었다.
춥고 외로운 만주 삭방 낯선 나라의 거리와 골목을 하염없이 걷고 걷다가,
아니면 그네로서는 짐작도 못해볼 그 어떤 세상을 지치도록 곤하게 떠돌아
다니다가, 이제 이렇게 달 밝은 밤. 그네 앞으로 돌아롸 벗어 놓은 구두.
그 구두 속으로 푸는 달빛을 고즈넉이 고여들었다. 그래서, 구두 속에 서리가
소복히 내린 것처럼 보였다.
강실이는 오래 오래 앉아서 그 구두에 고인 달빛을 들여다보았다.
고달픔을 그네 앞에 이렇게 벗어 놓고, 이 집안의 작은방에 소리 없이 들어
그네 가까이 자고 있는 강모의 구두는, 강실이의 한 몸을 다 감싸고도 남을
크고도 눈물겨운 돛단배처럼 느껴졌다. 구두에서 숨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그네는 구두를 서럽고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그런데
손바닥에 묻어나는 것은 얼음 조각의 냉기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차디 차고 써늘하게 식은 그 감촉은 낯설게 부딪쳐 손바닥을 타고 저르르
핏줄로 스며들면서, 소름이 돋게 하였다. 강실이는 후르르 몸을 털었다.
그러면서 깨어났으니, 꿈이었다고 할 것인가. 그러나 꿈이라기에는 너무나 그
정경이 선명하여, 아무래도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강실이는
장지문을 열었다. 그리고 홀연 아까처럼 마루로 나와, 댓돌을 내려다보았다.
고곳에는 분명히 달빛 고인 검은 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 이럴수가.
참으로 아상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 보니, 그것은 아버지 기응의 검정
고무신이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살구나무 그림자에 웅크리고 앉은 강실이는, 구두 속에 고여 있던 그 서리
같은 달빛이, 적막하고 서럽게 그네의 온몸을 채우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달빛은 소리 없이 마당에 고이고, 살구나무 위로 넘치면서, 큰집의 솟을대문과
골기와 지붕을 넘어, 뒷동산 너머, 노적봉 너머, 그보다 더 먼 저 너머 달이 뜬
상공에까지, 시리고 그리운 빛으로 차 오르는 것을 느낀다.
이 세상은 얼마나 커다란 구두여서 이 달빛을 이렇게 넘치게 하는가. 그
달빛이 몸 속에서 터지면서 살구나무 검은 그림자에 주저앉은 그네는 드디어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마아우울이야아." "망울이야아아" 먼 논배미에서
아이들이 쥐불을 놓으며 소리 높이 지르는 함성이 달에 울려 긴 여운으로
낭랑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저 아래 어디선가는 꽹매기 소구 치는 소리도
아슴히 들리고, 그에 섞여 간간이 사람ㅁ들이 터뜨리는 웃음 소리도 함께 묻어
왔다. 꽹그랑 꽹 꽹 꽤 꽹 꽹 꽹 두두 이다 두두 이웅
일년 열두 달, 열두 번 뜨는 보름달 중에서도 가장 깨끗하고 맑은 겨울 달이,
동지. 섣달, 묵은 달을 다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여 처음으로 둥그렇게 차 오른,
정월 대보름이 바로 오늘이었던 것이다.
새해를 시작하는 정월 초하루, 설날이야 더 말할 것도 없는 명절이지만, 새
달이 신령스럽게 둥두렷이 뜨는 보름달도 그 못지않게 흥겹고 즐거운 날이라,
사람들은 며칠 전부터 징과 꽹과리를 꺼내 놓기도 하고, 북이며 장구, 소구에
앉은 먼지를 털어 내기도 하면서, 한쪽에서는 흰 고깔을 접기도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그 고깔에 달 종이꽃을 함박 꽃같이 부얼부얼 노랑.진홍.남색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5권 (11) (1) | 2024.07.13 |
---|---|
혼불 5권 (10) (0) | 2024.07.11 |
혼불 5권 (8) (0) | 2024.07.09 |
혼불 5권 (7) (0) | 2024.07.07 |
혼불 5권 (6) (0) | 2024.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