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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7)

카지모도 2024. 7. 7.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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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발소리만, 그저 다만 발소리만이라도

 

무엇 하러 달은 저리 밝을까.

섬뜩하도록 푸른 서슬이 마당 가득 차갑게깔인 달빛을 밟고 선 채로,

아까부터 망연히 천공을 올려다보던 강실이는, 두 손을 모두어 잡으며 한숨을

삼킨다. 함께 삼킨 달빛이 어두운 가슴에 시리게 얹힌다.

싸아 끼치는 한기에 오스스 소름이 돋는 그네의 여읜 목과 손등, 그리고

바람조차 얼어붙어 옷고름 하나 흔들리지 않는 희 저고리와 흰 치마 위에

달빛은 스미듯이 내려앉아 그대로 서걱서걱 성에로 언다. 그 성에의 인이

교교하게 파랗다. 마치 숨도 살도 없는 흰 그림자처럼 서 있는 강실이의

머릿단에 달빛이 검푸르게 미끄러지며, 그네의 등뒤에 차가운 그림자로 눕는다.

달빛이 너무나 투명하고 푸르러, 그림자는 그만큰 짙고 검다. 먹빛이다.

사립문간에 선 살구나무도 제 그림자를 땅에 드리운 채, 구부등한 검은 둥치

검은 가지를 겨울 한공으로 뻗치고 서서, 빙무같은 달빛을 전신에 받고 있었다.

달이야 어느 땐들 유정하지 않을까.

초저녁 동산 위에 가느스름 곱게 뜬 각시 눈썹같이 이제 막 생겨나기

시작하는 초승달이나, 무심코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그렇게 흰 살이 차 오른

반달, 그리고 참으로 온전하고 둥글어서 오직 우러러 바라보며 한동안을 그대로

서 있게 하는 보름달이며, 그 달이 한쪽부터 서운하게 이지러져 드디어는

하년에 이르다가, 이제는 사윌 대로 사위어 빛을 다 깎여 버린 마지막 푸른

손톱이, 끝내 잠 못 이룬채, 아직도 캄캄한 사경의 새벽 하늘에 비수같이 떠

있는 그믐달.

우주 만물 삼라 만상이 모두 한 빛으로 어둠에 잠기는 밤, 야청의 하늘에

홀로 뜬 달의 그 모양은, 때로 꿈 같고, 때로 넘치도록 충만하고 때로는 또

처연한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여, 누구라도 달이 있는 밤에는 그 달을

올려다보게 하지만.

정작으로 좋은 것은, 달의 모양이 아니라 달빛일 것이다.

이 온 세상을 두루 다 비츨 만한 광명이라면 오직 낮에는 태양인 해가 있고,

밤에는 태음인 달이 있을 뿐이지만, 태양은 그 빛이 너무나 크고 강렬하여

누구라도 똑바로 쳐다볼 수 없고, 감히 어둠 또한 깃들지 못하니, 기어가는

개미나 한 올 티끌까지도 낱낱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면서, 젖은 것을 마르게

하는데, 이 햇빛은 초목이나 짐승이나 사람이나 목숨 가진 모든 것들을

하나같이 일으켜 세우고 움직이게 한다.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달은

다르다.

빛의 덩어리요, 부성의 빛인 태양이 양명한 낮을 관장하다가 자리를 바꾸면,

달은 어둠 속에서 뜬다. 그것은 분명 커다란 광명이언만, 음이라, 그 빛 속에

서늘한 어둠을 머금고 있다. 그래서 달은 아무리 찬연하게 밝아도 고요히

올려다볼 수 있으며, 어둠 또한 무색하게 쫓겨나는 대신 더욱더 어둠답게

머물러 검은 그림자를 짓는다.

어둠을 데불은 달빛은 제 몸의 푸는 인광을 허공에 풀어, 언덕과 골짜기와

지상의 사물들이 옥색으로 물들어 젖게 한다. 사람의 구곡간장까지도 화안히

비추어 빛으로 적시는 달빛.

그러나 달빛이라고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다.

해동의 밭머리에 자운영 돋으면서, 건득 스치는 바람결에도 부드러운

흙냄새가 석여 있어, 흙이 열리는 향훈을 느낄 수가 있는 밤. 물오른 나무들이

젖은 숨을 뿜어 내어 촉촉한 대기 속 어디선가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가

연연하게 들릴 것만 같은데.

연분홍 살구꽃 수줍게 만개한 봄밤이나, 진분홍색 도발하는 복사꽃 같은

기운이 구름도 아니면서 둥근 달의 낯을 가리워 감싸고 번지는 조요한 달빛은,

차라리 맑게 드러난 명월보다 묘취가 있다. 안타까운 연두빛을 머금어 포요롬한

그 달빛은 먼 산 봉우리를 아득히 잠기게 하고, 살 속으로 습기같이 스며들어

피를 자욱하게 하니.

꽃이 지는 밤의 기우는 달빛은 또 어떠하리.

먼 곳에 그리운 사람을 둔 정회로 오직 가슴이 미어질 뿐.

그 황사와도 같은 하늘에 은하수 도도히 흐르는 여름이 오면, 달은 마치

강가의 모래밭에 무수히 빛나는 모래알처럼 영롱한 별들의 무리를 들러리

세우고, 성장한 왕후인 양 당당하게 떠오른다.

여름 달은 젊다.

때로는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같이 검푸르고 광활한 하늘에, 밤이어서

더욱 희어 보이는 구름의 대륙이 거대한 해안선을 이루며 가득히 밀물 져

떠내려와, 그 달을 뒤덮어 가리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윽고

바람에 실린 구름은 또 다시 저 너머 어디론가 흘러가고, 숨었던 별들은 꼭

망망창해 밤바다로 내닫는 고깃배들처럼 영롱하게 불 밝힌 채 미끄러져

나가는데, 이제 아무 거칠 것 없는 하늘에 명랑한 파도 같은 지상의 능선과

어둠 속에 엎드린 지붕들, 그리고 잎사귀 무성한 나무와 길가의 돌멩이며

하찮은 풀포기까기도, 흥건히 적시우며 혹윤으로 출렁이게 한다. 기름진

달빛이다.

멍석에 둘러앉아 웃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차 오르는 달빛이 귓전에 부서질 ,

콸콸콸, 촤르르르으, 저 소리는 개울물 소리인가, 달빛 소리인가, 아니면

구슬을 파랗게 쏟는 소리인가.

이 달빛이 형광으로 찍힌 것 같던 박꽃들이 이울어 둥그렇게 달덩이로 떠오를

무렵이면, 밤 사이 뜰에는 찬 이슬이 내리고, 하늘은 물 속으로 가라앉아

가을이 깊어진다.

펄럭. 귓가에 지는 오동잎 소리에 문둑 놀라 일어나 앉으면 솨스르으,

솨스르으, 늦은 가을 바람이 어두운 입사귀를 갈며 밟고 지나는 소리 소슬하게

들리고, 흰 창호지 영창에는 달 그림자 홀로 호젓이 어리어 있는 밤, 시드는

풀밭에서 우는 귀뚜라미 울음은 목을 놓은 달빝의 피리소리라고나 할까. 가슴을

후비어 파고들며 핏줄까지 투명하게 울리는 소리이다.

수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가을은 나그네가 먼저 듣는다 하고, 가을 바람에 마음 놀란 나그네, 아득히

처자를 그려 편지를 쓴다 하는 이런 밤에는, 굳이 나그네가 아니어도 잠들기란

어려울 것이다. 잎 지는 소리가 깨워 놓은 수심을 재우려고, 외로운 베개를

돋우 괴고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버스럭, 버스럭, 마른 낙엽처럼 가슴에

부서질째, 달이나 보자 하고 홀연 영창을 열면, 아아, 언제 저토록 서리가

내렸는가. 순간 놀라게 한다.

마루와 댓돌과 뜰에, 시리도록 싸늘히 깔린 달빛의 희고도 푸는 서슬은

영락없는 서리여서, 몇 번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다, 밟으면 검은 발자국

묻어날 것 같아 차마 밟지 못하고 멀리 눈을 들면, 기러기 울음 흐르는 하늘에

달 하나, 서리 빗진 상원이 처연히 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달빛이라면,

역시 한겨울 깊은 밤의 달빛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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