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설'이란 말이 본디 '시린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하고,
'서럽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했다는데,
"새해 첫날, 몸을 삼가지 않으면 일년 내내 슬픈 일이 생긴다."
는 뜻에서 그런 말이 생겨났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이날은 너나없이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행동을 조심하며 궂은
것은 멀리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웃는 얼굴로 덕담만 주고 받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기채는 새해의 첫들머리에 앉아 깊은 한숨을 토하니.
일룽이는 불빛에 그림자 지는 그의 얼굴은 깊이 패인 근심으로 검누렇게
보였다.
강모의 일이 아니라도, 엄둥에 거친 베옷 굴건 제복을 입고 있는 상주에게
해가 바뀐대서 무슨 희색이 있으리요만,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는 마음이 너무나
사무쳐서 날마다 산소에 오르내리며,
"눈물이 흘러 성묘 길의 풀이 시들어질 지경."
이라고 말한 옛사람의 심정이 결코 과장이 아닌 지원극통의 흉사를 당한 위에,
자식의 일로 인한 분노와 근심이 바위보다 무겁게 내려누르는 이기채의 낯빛이
결코 밝을 수는 없으리라.
그가 모친 청암부인의 복을 입고 여윈 어깨를 구부린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영연에 향을 사를 때, 부인 생전의 살아온 길목 행장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그
갈피마다, 복병처럼 숨었다가 날카롭게 찌르는 것은 아들 강모의 이름이었다.
돌아가신 부모의 영위도 삼 년간은 떠나지 않는 법이며 그 앞에 향화를
그치게 하지 않는 것이 자식 된 도리이거늘, 눈뜨고 살아 있는 제 부모를
초개같이 버리고 떠나간 놈이, 나 죽었다 한들 죽은 귀신 신주앞에 향불을 피워
줄 것인가.
이기채는 차가운 재 식은 기운만 썰렁한 지신의 영좌를 문득 떠올리며 머리를
깊이 흔든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지붕이신 어머님은 돌아가시고, 나는 이미 쇠삭하였으며, 자식은 간곳을
모른다. 굳이 위로하자면 천행으로 손자 있다 하나 이제 설을 쇠면 세 살.
세월은 수상하고, 하루가 다르게 무엇인지 절박하게 곧 닥쳐오고 있는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예감에 어느 순간에는 심장이 폐색을 할 만큼 조여들어, 그는
한참씩 숨을 멈추곤 하였다. 그리고 다급해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집어 내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풍향.온냉.건습으로 하루 일기를
알아보고, 한 철 절서를 알아내둣, 이기채는 어떤 거대한 기운이 바뀌리라는
것을 역력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을 체감으로 왔다. 우르르르으.
아득히 먼 하늘의 어느 자락에선가 구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천지가
미세하게 흔들리다가 이윽고 온 세상을 한 번에 빠개 버릴 것 같은 천둥 소리가
정수리를 친다.
그리고는 번개. 쏟아지는 작달비.
지붕이 떠내려 가고, 기둥이 부러지며, 사태로 산비탈이 굉음을 지르며
무너지는 큰 비가 싯뻘건 강믈을 이루어 ㅂ은 땅을 깍고, 논밭의 흙탕으로 쓸어
버리는 홍수고, 처음에는 그저 아주 먼 뇌명 한 가닥으로 오는 것이었다.
이기채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 체감의 파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감지해
내려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이기채의 심중에 그래도 의지가 되는 것은 며느리 효원뿐이었다. 어느덧
그의 마음은 비어 버린 어머니와 아들의 자리에 조금씩 며느리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가 '그래도'라고 생각하는 저변에는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서
다 지워 버릴 수는 없는 못마땅한 점들이 편편치 않게 남아 있는 탓이었다.
그리고 꼭 그런 것은 아니엇지만, 강모가 이처럼 훌쩍 집을 버리고 나간 데는
그 아내인 효원의 탓도 없다고는 못하리라는 속짐작을 가지고 있는 때문이었다.
맨 처음 이기채가 효원을 본 곳은 강모의 혼행길에 상객으로 따라간 사가
대실의 초례청이었다.
다홍 비단 바탕에 물결이 노닐고 바위가 우뚝하며 그 바위 틈에서 갸웃
고개를 내민 불로초, 그리고 그 위에 어미 봉과 새끼 봉이 어우러져 나는데,
연꽃.모란꽃이 혹은 수줍게 혹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는 신부의 활옷은, 그
소맷부리가 청.홍.황.으로 끝동이 달려 있어서 보는 이를 휘황하게 하였다.
두 팔을 맞잡고 높이 올려 한삼으로 얼굴을 가리운 신부가 다홍치마를
동산처럼 부풀리며 재배를 하고 일어섰을 때, 한삼에 가리워졌던 얼굴이
드러나자, 흰 이마의 한 가운데 곤지의 선명한 붉은 빛이, 매화잠의 푸른 청옥
잠두와 그 빛깔이 부딪히면서 그네의 얼글을 차갑고 단단하게 비쳐 주던
기억이, 이기채에게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고개를 약간 숙인 듯하였으나 사실은 아래 턱만을 목 안쪽으로 당긴 채,
지그시 눈을 내리감은 그네의 모습에서는 열여덟 살 새신부의 수줍음과 다감한
풋내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위엄이 번져나던 것도.
그 휘황하고 찬연햇던 신부 효원을 본디의 골격 탓에 여읜 기색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미 화색이 가신 지 오래인 얼굴로 초췌하게 앉아, 이기채의 눈감은
낯빛을 살핀다.
"세배 올리겠답니다."
효원이 낮은 음성으로 사뢴다.
자시가 지난 하늘은 좀더 동쪽으로 기울어 어느결에 축시 말에 닿아 있었다.
얼른 보아서는, 암담하게 드리워진 하늘이나 그 아래 캄캄한 노적봉의
산자, 그리고 천지에 들어간 어둠이 아까와 조금도 다른 것 같지 않았지만,
시간은 발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아직 초하루가 밝은 것은 아니었지만 집안에 부리는 호제와 계집종과
노복들은 이때가 되면 벌써 나름대로 세수를 하고 옷깃을 여미며 저희끼리
우줄우줄 모여서 상정에게로 가 한자리에서 세배를 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상전의 일가들한테도 두루 세배를 다녀왔다.
이따가 날이 밝으면 어느 참에 세배한다고 눈 돌릴 겨를이 없을 만큼 바빠질
터이니 이렇게 미리 꼭두새벽도 채 안된 시간에 그들은 세배를 하는 것이다. 또
그것이 섬기는 도리였다.
시간으로는 비록 새해가 되어 축시라 하지만 다른 때라면 짐승도 잠이 드는
오밤중에, 기둥에 걸린 등롱의 붉은 불빛을 희미하게 받으며 검은 마당에
옹긋중긋 줄줄이 늘어서서, 사랑채 누마루 제 머리 꼭대기 보다 더 높은 곳에
덩실하니 나와 앉은 상전 이기채에게, 일제히 꿇어 엎드리어 절을 하는 종들의
등허리는, 시꺼먼 그림자를 길고 어둡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 등허리로 구름이
좀 벗겨졌는가, 별빛 몇 개가 스러질 듯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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