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날 저녁에는 그야말로 한 판 걸게 풍물을 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는 동산 기슭에 달집을 만들어 세우려고 대나무밭이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주인한테 때를 얻느라고 바빴다.
"보름날 이렇게 해 놓으면 낙과를 막는다." 며, 찰밥을 한 덩어리 뭉쳐서
뒤안의 감나무 가지에 얹어 놓은 기응이 달마중을 한다고, 해가 지기 전에
일찌거니 저녁을 먹고는 뒷짐을 진채 뒷동산으로 가고 "자네, 다리 밟으러 안
가는가?" 하는 수천댁의 부름에 오류골댁도 따라 나선 집에는, 강실이 혼자
남아 집을 보았던 것이다. "왜, 너는 안 가냐?" 수천댁이 강실이를 돌아보고
물었을 때, 오류골댁은 "집에 그냥 있겄다고 허느만요." 하고, 강실이 대신
대답하였다. "호기사 과년헌 처자가 조심스럽기는 허지. 그래도 뭐 어머니랑
가는데 무슨 별 일이 생기겄냐? 아런 날 달 구경도 허고, 좋은 신랑감 어서
만나게 해 주시라고 달남한테 빌기도 호고, 남들 노는 것 굿도 좀 보고, 그래
나중에 이얘기꺼리도 생기지." 수천댁이 강실이한테 웃으며 말했지만, 질녀의
성격을 잘 아는지라 더 권하지는 않았다.
정월 초하룻날은 일년 중에 가장 큰 명절이나,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이라
사당에 참례하고, 어른에세 세배를 올리며, 성묘도 하는 정중 엄숙한 날이어서,
즐거운 가운데 조심해야 할 일이 많다.
그리고 여자들은 초사흗날까지는 세배도 다닐 수 없었다. 집안에 찾아오는
세배꾼들 시중 때문에도 그랬지만, 새해 꼭두머리에 여자가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가는 것은 삼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보름날은 다르다.
이날만큼은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반.상이 따로 없이. 모두 한 동아리로
즐기는 날이라, 사람들은 설날보다도 보름날을 다 좋아하엿다.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된 명절의 흥겨움은, 집집마다 풍믈을 돌며 안택굿.조왕굿을 하는 것으로
이어지다가 보름날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
대보름날은 이른 아참 해 뜨기 전부터 부산하다. "꽃니야야, 꽃니야."
봉출이는, 저보다 늦게 일어나 눈을 비비는 동생을 마당에서 불렀다. "응" 아직
잠이 덜 깬 음성으로 대답하는 계집아이한테 그는 재빠르게 "내 더우." 하면서
주먹 쥐었던 손을 활짝 펴 던지는 시늉을 하였다.
그제서야 눈치을 챈 꽃니는 입이 부루퉁하게 튀어 나오고 "아이고, 저런 망헐
놈. 야 이놈아, 니 동생이 더우 먹어서 헐떡거리고 댕기먼 머이 그렇게 좋겄냐?
조선 천지 어디다 더우를 팔 디가 없어서 꼭 거그다 팔어야겄대? 하이고오,참"
꽃니어미 우례는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는 꽃니한테도 일렀다.
"보름날 아칙에는 누가 불러도 대답 않는 거이여. 어쩔래, 인자, 너.
올여름에 더우깨나 먹겄네. 너도 어서 어디 가서 니 더우 팔고 와, 쩌어그
강아지한테라도." 어미의 말에 꽃니는 안채 뒤안 마당에서 요강을 부시고 있는
콩심이한테로 통통거리고 뛰어가 이름을 불렀다.
콩심이는 입을 꼭 오므리고 대답을 하는 대신 새 주둥이처럼 뾰족 내밀어
보였다. 애가 탄 꽃니는 자꾸만 콩심이를 부르고, 콩심이는 그러는 것이
재미있어 웃음 소리도 못 내고 키킥, 웃었다.
사람들은 아직 해가 뜨기 전에 보리. 조.콩에 기장을 섞어 찹쌀로 지은
오곡밥을, 고사리.도라지.호박 오가리 같은 담백한 나물 반찬에 먹고는,
귀밝이술 이명주를 마시는데 "이 술을 한 잔 마시면, 일년 내내 소식을 빨리
듣고, 귀가 환히 밝아져서 남이 하는 말을 잘 듣고, 잘 판단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아침상을 물리고 나면 온 가족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부름 깨물자."
하고는, 콩이나 밤, 호두를 이발로 깍, 소리가 나게 깨물었다.
그리고는 해가 지기 전에 저녁밥을 먹고 나서, 모두 다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달맞이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 동산 기슭에는 하늘을 찌르게 세워 놓은 달집이
있었다. 달집은 푸르렀다.
시퍼렇게 솟구친 대나무를 텅,터엉, 찍어다가 얽어서 꼭대기를 한점에 모은
울타리를 원뿔처럼 만들어 이엉으로 감싸고, 달 뜨는 동쪽은 훤히 터 열어 놓은
달집 속에는, 산에서 쳐 온 생솔가지가 채곡채곡 쟁여져 있었다. 그리고
한가운데 꼭대기에는 새끼줄을 꽁꽁 묶어 달모양을 만들어서 매달아 놓았다.
"아무리 왜놈들이 그악스럽게 공출을 해 가도 대나무 솔가지는 얼매든기
있응게." "아, 농악대 꼬깔에 북 장구는 우리 것이지. 그걸 누가 달라들어서
어뜨케 뺏어가?" "암먼." 이 달집을 공들여서 만들어 놓고 달 뜨기를 기다리던
사람들 중, 서산에 해가 지고 동산에 달이 솟아오를 때, 그 희고 맑은 달이
뜨는 것을 맨 먼저 본 사람이, 불을 당기어 달집을 사르는 것이다.
불이 붙을 달집을 흰 연기를 나우룩이 뿜어 내며 불꽃을 일으키어
푸지직,푸지직, 타기 시작하고 열두 발 상모에, 꽃 같을 고깔을 쓴 농악대는
영기를 앞세워 달집을 돌며 신나게 풍믈을 울렸다.
그 장구 소리, 징소리, 그리고 북소리와 꽹가리 소리들이 얼어붙은 산천의
빙판을 울리고, 하늘로 아득히 달에 사위어 울릴 때, 아낙들은 달을 향해 절을
하며 소원을 빌었다.
한쪽에서는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내아이들은 지난 겨울과
정초에 날렸던 아까운 연들을 모두 불 속에 집어 넣어 태우고, 계집아이들은 제
저고리에 달린 동정을 뜯어 달집에 던져 넣었다.
부잡스러운 아이들은 어느 틈에 그 불에 콩을 구워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대나무가 타오르며 터뜨리는 타다닥, 폭죽 소리에 깜짝 놀라
소스라치며, 와아아. 소리를 질렀다. 대나무 튀는 소리가 얼음 같은 하늘에
울려 퍼질 때마다 불꽃은 더욱 세차게 치솟아 타오르고, 온 마을은 그 자욱한
연기의 냇내에 잠겨들었다.
강실이는 아직도 살구나무 그림자 위에 그대로 하얗게 웅크리고 앉아, 만월의
동산 기슭에서 울리는 그 홍소와 여한 없이 어울리며 트이어 흐드러진 함성에
귀를 맡긴 채, 울고 있었다.
그들은, 명절이라 하는 대보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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