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볼 만한 풍치가 없고, 거기 올라가 달맞이를 함직한 동산도 없는, 해빠닥한 마원의
형형한 지형에서 어찌 꿈같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 숲 머리 뒤로, 속이 시리게 차고
맑은 보름달이 떠오르는 풍광만큼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달이 뜨면 비오리는 늘 주막 앞에 평상으로 나와 앉아 혼자서 소리를 하였다, 그저
배우다 만 소리라 명창은 못되지만, 달이 밝아 잠 안 오는 밤이면, 그 소리가 길고도 깊게
적송의 둥치와 머리를 휘러 감고 마을 안 갈피로 파고들어, 공연한 사람을 뒤척이게 하는
소리였다.
어아아 꿈 속에서 보던 님을 산이 없다고 일렀건마안
오매불망 그린 사람 꿈이 아니면 어리 보리
천리 만리이이 그린 니임아아
꿈이라고 생각 말고 자주 자주 보여 주면 너와 일생을 지낼란다아
아이고오 데에고오 허허어야아 성화아가아 나았데에 에에에에
꿈이로다 꿈이로다 세상은 모오두우 꿈이로오다
너도 나도 꿈 속이요오 이것이 모두 꿈이로다
꿈 깨이니 또 꿈이요 이 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 가는 인생
부질없다아아 네가 꾼 꿈을 두고서 무엇을 헐끄나아
아이고오 데고오 허허어 나아아 성화아가아 나았네에 에에에에
비오리는 새초롬한 맵시로 하얀 목을 뽑아 올리며, 달집 앞에서도 소리를 했다. 한바탕
풍물로 농악을 놀고 나면 사람들이 기어이 끌어내 그네의 소리 한 대목을 듣고는,
비오리 어미가 내놓은 동이에서 막걸리 한 사발씩을 떠먹곤 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꽹과리를 꽤꽹 꽤꽹 울리며 달집을 돌았다, 타오르는 달집의 불너울이 비오리 낯빛을 붉게
물둘일 때, 달은 상공의 중천에 이르는 것이다.
마음먹은 일이 있어 일찌감치 해 떨어지기 전데 고리배미로 온 옹구네는, 비오리네 주막
안을 힐끗 들여다보았다.
"오늘 바뿌겄네잉." "오시요오?" 안데서 내다보고 대답하는 사람이 마침 비오리인지라
내심 잘 되었다 싶은 옹구네는 냉큼 안으로 들어섰다.
비오리는 남치마에 연두 저고리를 막 꿰어 입고 있었다. 그네가 옷고름을 매며 새침한 듯
갸웃이 고개를 들고는 눈꼬리를 흘리며, 아는 사람 오느냐고, 시늉으로 물었다.
아이고, 망헐 년, 색기 허고는, 너도 참 주막각시 팔짜로 천상 타고났다. 팔짜 도망은
시상 없어도 못헌다등마는 낯반대기가 저렇게 빚어논 것맹이로 배꼬롬히 생겼이나, 니
팔짜가 순탄허겄냐.
동구네는 속으로 공연히 샐쭉해지는 마을믈 사리면서 "방으로 들으가도 되까아? 하이고,
추워야. 시안에는 거그서 여그도 걸어올라먼 한탬이여이? 입이 다 얼어서 말도 지대로
못하겄네." 하고는 비오리 눈치를 보았다.
"들오시오." 비오리는 웃목에 놓인 분통과 연지곽을 한쪽으로 밀었다.
"아이구, 나. 오다가 벨 소리를 다 들었그마안."
옹구네는 화장품 밀어낸 자리에 웅크리고 앉으면서 팔짱 낀 어깨를 한번 후를 털고는,
아닌게 아니라 추워서 파랗게 돋아난 소름이 아직 가라앉기도 전에 말문을 떼었다.
이런 말일수록 막 들은 것처럼 숨가쁘게 말해야 듣는 사람도 실감이 나서 바로 또
다른사람한테 옮길 것이라고 그네는 생각했던 것이다
더구나 조금만 있으면 해는 지고 달이 떠올라 온 동네 고리배미 사람들이 다 몰려 나올
터이니, 달집을 태우며 뛰고 구르는 그 사람들의 흥겨움 속으로 독한 약물같이 소문이
퍼지도록 하려면, 지금 말해 놓는 것이 제때가 아니랴.
오늘밤 잔치는 길고 사람들은 밤을 새울 것이매."무슨 소리간디?" 남의 소문에는 이골이
난 얼굴로 비오리가 고개를 돌렸다.
"양반.양반. 허드니만 그 사람들도 속을 까보먼 참 그런 것이 있드만잉. 아나 그런디
이런 말은 잘못 나가면 큰일날 소리디이. 무단히 놀랜 짐에 한 소리 했다가 끄집헤 가서
작신 뿌러지게 뚜드려 맞고는 꼼짝없이 죽을랑가 모른다고오."
"머 얼매나 무선 소문이간디 그렇게 벌벌 떨어감서."
"아이고오, 추워서도 떨리고, 겁나서도 떨리네이, 비오리. 내가 이런말 허드라고 어디
가서도 말 안헐랑가? 혼자만 득고 말어얀디.잉?"
"헤기 싫으면 마시요오. 그쎄잇 거 안 들어믄 그만이제, 넘으 말이머 배부르다고 줏어
듣고, 죽네 사네 허는 소리를 내가 듣는다요?" "아이구, 사참해라아."
옹구네가 얼른 말을 끄집어내지 못하여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옴질옴질 하고 있는데,
비오리는 더 채근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다.
그래야 더 빨리 말을 하리란 것을 건너짚어 본 것이다.
"저그...매안에 원뜸 오루꿀덕 강실이 말이여." "그 작은아싸가 왜?" 그제야 비로소
비오리는 의아하다는 낯색으로 옹구네를 바라보았다.
"작은아씨는 무신. 홰냥년이등만." "이?"
눈을 크게 뜨는 비오리 뒤쪽에 닫힌 덧문이 벌컥 열리면서 그 어미가 찬 바람을 몰고
들어왔다. 주름진 턱을 떨며 어금니를 딱딱 마주티는 것이 어지간히 추운 모양이었다.
"무신 이애기들히여?" 아랫목 요대기 아래로 손을 집어 넣으며 비오리어미가 물었다.
딸내미의 놀란 얼굴이 심상치 않게 짚인 것이리라.
"나도 모르겄네. 무신 오루꿀덕 강실이가 홰냥년이당가가." "으이?"
비오리어미도 순간 놀라 무슨 대꾸를 못하였다.
언제 마주서서 똑바로 볼 일도 없는 애기씨였지만, 사람들이 오가며 하는 말로
짐작하기는, 참으로 음전하고 귀태나는 규수라고 알고 있던 그 큰 애기가 화녕년이라니,
이게 무슨 소린다.
"무신 말을 잘못 들었능게비제." 비오리어미가 못 미더워 고개를 짜우뚱하며 옹구네를
바라보았다.
"앗다, 참말로. 엥간헌 사램이 헌 말이먼 내가 요러고 숨이 넘어가겄소? 내 눈으로 본
거이나 똑 한가지로 틀림없는 사램이 그러는디."
찰진 입귀에 허연 거품이 물리는 옹구네의 말에, 비오리와 그 어미는 어느결에 흘린 듯이
빨려들어가, 눈을 번들거리며 바싹 다가앉았다.
옹구네 얼굴에 맹렬한 기름이 돈다.
"아니 그 대실서방님을 시방 여가 지시고 안허잖여?"
"하아, 그 일 있고는 도망을 가 부렀제이. 잘못을 해도 어디 데지간히 했어야 얼굴을
들제, 죽어도 못 들겄잉게 어조 먼 디로, 만주로 가분 것 아리라고? 그것도 벌세 언지 쩍
이애긴디? 안 오잖여. 여그는, 당최 빗김도 안히여. 소식도 없고, 아매 영 인자 안
올랑게비여, 그렇게로 집안에 할머니 초상이 나도 안오제, 해가 바뀌어 설이 되야도
안오고, 그 가문에 그 재산에 그 학식에, 머이 아쉬서 만주 벌판을 헤메고 댐김서 집을
두고 못 와아. 긍게, 다 지은 죄가 있잉게 그러제. 강실이도 나이 몇 살인디 그런 집안으로
아직끄장 시집을 못 가고 았겄는가잉? 설 쇠야서 스물하나 아니라거? 늙었제잉. 인자,
고동이 나와 부렀어. 그렁게 낮말은 개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늘 아래 누가 알
거이냐, 싶어도 소문이 나는 거이 인간사여. 알게 모르게 소리 새서 혼인헐 만헌 디는 다
그 소믄 들었능가도 모르제. 아 사람 눈치란거이 거 비상헌 거 아니여? 우리가 사람 저뻐
바도 말이여. 엉겁질에 헌 일이지만 사촌간에 상피붙었다먼 이런 상놈들도 맞어 죽는디.
양반은 더 무섭겄지. 가문이다 성씨다 험서 덕석에다 몰아서 쥑이고 안 그럽디여? 그전에도
왜."
옹그네는 제가 전에 궁리해 놓은 일도 있는지라 장담하고 나섰다.
"얌전한 강아지 부뚜막에 올라앉는단 말도 있기는 있지만, 하이고매, 시상에, 그게
그렇그마잉."
비오리어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옹구네 입김이 불길같이 뜨거웠다. 그 입김에
묻은 말이 비오리와 그 어미에게 옮겨 붙은 것이다. 이제 이윽고 오는 밤, 이 소문은
산더미 같을 달집처럼 활활 무섭게 타오르며, 그 달집 앞에 모여 선 사람들 속으로
일렁일렁 혓바닥을 너훌거려 번질 것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고리배미 불길을 넘어 이웃마을과 매안의 문중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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