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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20)

카지모도 2024. 7. 27.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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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상한 세월

 

시절은 하루가 다르게 수상하여 아무도 내일 일은 미리 짐작할 수가 없고 집집마다

떡쌀은커녕 싸라기조차 제 대로 남아 있지 않은데다가, 땅을 파고 몰래 묻어 놓은

제기마저 놋그릇이라고 공출을 해가 버린 뒤 끝에, 설날 차례인들 변변히 올릴 수

있었으리.

우스운 말로 놀부는 부모 제사 때를 당해도 음식 장만을 따로 하지 아니하고, 즐비한 빈

접시에 돈을 대신 올리면서 "이것은 떡이요." "이것은 전이요." "이것은 또 무엇이올시다."

하고는, 건성으로 절만 몇 번 한 뒤에 번개같이 철상을 하는데, 돈은 도로 다 쏟아 내왔다

하니, 그 식대로라면, 아무리 마음을 간절해도 없어서 못 올리는 제물 대신 검은 먹으로

주.과.포.혜 글자 적어, 조상의 신명이 부디 가여운 자손의 정성이라도 흠향하여 주시기를

빌어 볼 수 있을는지 모를 일이나. 그런 짓이야 어디 인두겁을 쓴 사람의 자식으로서

상상이나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저 오직 맑은 청수 한 대접 올리고 돌아앉아 우는 한이 있어도, 정원 초하룻날

원단에는 나름대로 차례를 모셔야 한다.

"산 닭 주고 죽은 닭 바꾸기도 어렵다." 는 말은, 무엇을 꼭 구하려 할 때, 귀한 것을

주고도 흔한 것을 얻기 어려울 경우에 쓰이는 말이지만, 정말 요즘 같은 시절에 곡식을

구하기란 "죽은 닭 주고 산 봉황 바꾸는 것이 쉽다."고 탄식할 만하였다.

그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벌써 이십여 년 전, 일본이 조선을 식량 공급지로

정하여 미곡 증산을 서두르며 "산미의 개량.증식을 꾀하는 것이 조선의 실력을 증진하고

또한 일본 제국의 향상에 충실히 공헌하는 길."이라고 내세우면서, 토지 개량, 품종 개량을

하라 하고, 비료는 스스로 만들어 쓰도록 강요 장려하던 그때부터, 농촌은 진드기 물것에는

비할수도 없이 악착스럽게 긁어 가는 수탈에 시달려, 사람들은 한 해 농사 뼈빠지게

지어서는 거의 대부분을 공출로 빼앗기고 말았으니, 가을 걷이가 끝나 타작을 하고 나면

남는 것은 몇 눔의 조.콩.옥수수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필경에는 그것까지도 모자라고

귀하여 피폐는 극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벌써 십여 년 전에 일본인 우원 총독도

"현하의 조선 농촌을 본다면 그 약 팔 할이 소작 계급에 속하는 세농으로서, 이들은 과거

여러 해 동안의 비정과 착취, 그리고 관청에서 국민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을 주구에 고민해

온 탓으로, 그들의 심경은 극히 황포하고....매년 식량의 부적을 호소한다. 거기다가

고리의 부담 또한 매년 증가될 뿐만 아니라 수확기에는 채귀쇄도하여, 그들이 한 해 동안

바친 노력도 빌려 먹은 식량을 반제하거나 혹은 무거운 부채 이자의 상환에 충당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그러다 보릿고개가 닥치면 절대 식량이 부족하여 그들은 산야로 흩어져

풀뿌리를 캐거나 나무 껍질을 벗기어 겨우 일자의 호구를 이어간다. 참혹한 상태이다."라고

실토한 일이 있었다.

이 말 속의'부채'란 대부분이 일제의 고리대 자본이어서, 그 빚을 할수 없이 얻어 쓴

농가는 하루아침에 차금예농으로 전락해 버리고, 어느결에 먹고 살 식량이 전무한 궁민의

처지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는데, 조선 농가의 절반 이상이 이런 참경을 겪고 있었다. 초근

모피로 연명을 한다더니, 사람들은 말그대로 언덕이나 들로 나가 쑥을 뜯어 먹고, 산으로

올라가 송기껍데기를 먹고 살았다.

너나없이 허기로 속이 패이는 춘공기 가파른 고갯마루를 기진하여 넘을 때는, 더덕더덕

기운 자루 하나 들고 동무하여 나서서, 하루 온종일 노란 횟배 같은 봄 햇볕에 휘어져

엎드린 채 쑥을 캤는데,손가락마디 하나보다 더 클 것도 없는 그 풀 한 포기에 사람의

끼니가 매달려, 다만 한줌이라도 더 캐 보려고 아낙들은 같이 간 사람을 돌아볼 틈조차

없이, 오직 무딘 칼끝으로 마른 땅을 헤집어 쑤실 뿐이었다. 고개고, 언덕이고, 들판이고,

쑥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머리에 무명 수건을 두른 아낙과 노파들을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이, 이른 봄날 아지랑이 아른아른 피어 오를 때, 댕기머리 나붓이 드리운 처자나

어린 계집아이들이, 봄 마중 하면서 바구니에 재미로 케 담은 쑥이라면, 뿌리에 묻은

흙냄새도 상큼하고, 멀리서 보는 이의 마음에도 한 폭 그림 같은 정경이 될 수 있겠지마는.

양식으로 캐는 쑥이야 처참하고 한심한 한숨에 가슴이 미어질 뿐, 어디 그런 정감이

스며들 여지가 있으리오. 그저 잠시라도 손을 놀리지 않고 그것을 캐고 캘 따름이었다.

그러다 해가 넘어가면 저마다 고개가 오무라지게 그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 삼삼오오

마을로 돌아왔다. 마치 장날, 장에 갔다 오는 것처럼. 그래서 까물까물 잦아드는 등잔불

아래 자루를 부려 놓고 주둥이를 풀면, 혹 끼치는 쑥냄새와 후끈한 열은 무명 옷에 밴

땀내보다 짙었다.

식구 많은 집의 곤고한 아낙이 있는 힘을 다해 캐 낸 쑥을, 마치 무슨 앙심같이,

비명같이 채곡채곡 눌러가며 쟁여 놓은 쑥더미는, 돌덩이처럼 단단하여 갈퀴 손으로

끄집어내고 끄집어내도 한없이 꾸역꾸역 나왔다. 그런 자루 속은 누룩이 뜰 때같이

뜨거웠다.

이 쑥으로 개떡을 찌는 것을 참으로 양반 음식이요, 쑥 절반 쌀 절반 밥을 해먹는 것은

호강에 겨운 일이며, 밀가루에 버무려 범벅을 하는 것만도 언감생심이어서, 쑥을 남비에

넣고 싸라기 몇 줌 섞어 얼굴이 비치게 말전 죽을 쑤어 먹거나, 아니면 쑥만을 끓여 배

고플 때 속이나 다스려 주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리고 이 쑥에다 서속을 넣고 송기를

치대어 뭉쳐 먹기도 하였다.

본디 쑥이란 사람의 속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어서, 밥이나 다른 속기에 비할 수야

있을까마는 그래도 허기를 달래는 데는 제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쑥을 한번에 다 먹어 버리지 않고 말려 두었다. 이윽고 쑥마저도 캘

수 없게 되는 날이 곧 닥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무엇이나 먹을 수 있는 풀이라고 생긴 것은 다 캐러 나섰다. 그러다가

잘못 보고 독한 풀을 캐기도 하여, 그것을 먹은 사람은 풀독이 올라 띵띵 붓기도 하였다.

아니면 너무나 오랫동안 굶주린 끝에 살가죽이 누렇게 들뜨며 밀룽밀룽 부어 오르는

부황에 걸린 사람들이 허다하였다.

쑥 못지 않게 요긴한 식량으로는 송기가 있었다.

소나무 어린 가지의 겉껍데기를 벗겨 내고, 허옇게 드러난 속껍질을 찬찬히 벗겨 내

자루에 담아 오면, 거칠고 삶아서, 방망이로 탕탕 두드려 밥도 지어 먹고, 아니면 밀가루와

섞어 비벼 솥에 넣고 찌거나, 그런 호사를 바랄 수 없는 형편에는 그냥 멀뚱하게 죽을 쑤어

먹기도 하는 송기. 이것은 절량의 농가에 소중한 양식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소나무가 서 있는 산이면 산마다 칼을 들고 나무 껍질 벗기는 사람들이 무슨 일

난 것처럼 박히어 들어차 있었고, 나무들은 하루가 다르게 벌거벗기어, 먼 데서 보면 온

산이 희었다.

거슬러 올라가 임진왜란 때에도 조선에 소나무가 없었더라면 백성의 거개가 굶어 죽었을

것이라는 말도 있을 만큼, 이 송기는 구황덕으로 제 껍데기를 다 벗겨 가도록 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 해도 호사인 셈이었다. 메밀 가루 갈아서 죽 쑤어 먹기도 어렵게, 농사를

지으면 공출로 다 쓰러 가다시피 하는 세월이 되면서, 사람들은 가져다 바치니 곡식 대신에

콩기름을 짜고 난 찌꺼기 콩깻묵을 배급으로 받았다. 둥글둥글 넙적한 두리판 상같은 이

콩깻묵은, 거름이나 하지 사람이 먹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인데, 그나마 넉넉히

주는 것도 아니고, 식구대로 수를 세어 조각조각 쪼개 한 덩어리씩 먹고 앉아 있을 때.

"이래도 저승보다 이승이 나은가."하는 생각이 목구멍을 처받고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와중일망정 눈꼽만한 여유라도 있는 집에서는 토담을 헐어 그속에 쌀가루를

감추거나, 후미진 텃밭 귀퉁이를 깊이 파고 거기 항아리를 묻기도 하였으며, 농사를 많이

짓는 집에서는 나름대로 어떻게든지 긴요하게 쓰고 먹을 만큼의 미곡은 비축하여 두었으나,

그것은 열에 한두 집 정도였다.

"그저 쌀이 제일이라. 돈은 아무것도 아니다."고 이기태는 말하고 했다

그것은 옳은 말이었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쌀 가지고는 구하지 못한 것이 없었지만,

지게로 돈을 지고 와도 쌀 한 됫박 얻어 가기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쌀은 금보다 더 값진 것이었다. 쌀 한톨에 금 한 톨이 맞먹는다 해도, 쌀로는 밥을

해먹을 수 있지마는 금으로는 아무것도 해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쌀은 곧 목숨이었다. 그러나 이 쌀은 아무 곳에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읍내보다는 시골의 잘 사는 집에, 속새로 숨겨 놓은 쌀이 있다는 것은 암암리에 소문이

번지기 마련이어서, 알음알음으로 그 말을 들은 읍내 사람들은, 가방에다 고운 비단이나

박래품 고희잔, 혹은 향기로운 비누 같은 것들을 담아 들고, 양식을 구하려고 마을을

찾아가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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