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아조 옛날에 말이다. 두 사램이 있었는디 하나는 기생이고 하나는
소실이었드란다. 이 세상의 난 온갖 생물 삼라만상이 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어서 서로
만나 짝을 이루고 살라고 나왔는디. 그 중에 사람은, 음이라면 여자고, 양이라먼 남자
아니냐, 들한의 핀 꽃들이나, 때가 되면 저절로 즈그들끼리 짝을 짓는 짐생들허고는
달러서, 사람은 암만 때가 되야도 절차 거치고 순서 밟어야 음이 양을 만나고 양이 음을
만나는 것이라. 그 순서 절차 챙기기가 용이치 않은 사람은 과연 넘들보단 복잡헌 세상을
살 수 배끼는 없는 벱이거등. 너도 인자 나이 먹고 세상 물정 알게 되먼 이 말이 무신
말인지를 알어듣는 날이 올 것이다. 사람이 음양이 만날 때, 버젓하게 육례를 갖추고
덩실히니 정실부인 되는 여자가 태반이지만, 그러들 못허고 넘으 소실이나 기생 노릇 헐 수
배끼 없는 여자도 또 많은 거인디, 기생이나 소실이나 여자로 태어나서 복 받고 사는
인생은 아니라, 설웁고 속 아프기 견줄디가 없지 않겄냐. 하루는 그 두 사램이 마주 앉아서
신세 한탄을 핸드란다."
늙은 기생은 꺼두었던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한 눈을 찡그렸다. 짧은 담배에 불이 붙으면서
피어 오르는 매운 연기가 눈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담배를 잡을 그네의 손톱은 차자물이
든 것처럼 누렇게 절어 있었다.
한연하게 떠는 그 손을 검을 입술 가까이 가져 가던 가야금 선생은 날카로운 기침을 몇
차례 토해내더니 "아이고." 하며 명치를 눌렀다. 기생이 소실을 보고 그랬드란다.
"자네는 좋겄네." 이름이 소실이라 듣기는 섭섭허나 정든 님허고 이별헐 일 없고,
한평생에 한 서방님만 뫼시고 한자리서 정이야 재미야 살 수 있응게 얼매나 좋겄는가. 비록
그리운 님으 모습 뵈지 않는 날이 많다고 헐지라도 바늘으다실 뀌어논 거 한가지라. 어디가
있어도 한식구 대접을 받음서 살지 않느냐.
서로가 너는 내 사램이요. 나느 니 사램이라고 정해 놓고 사는 세상이 나는 부럽네. 우리
같을 사람을 정처가 없어서 어젯밤에 만난 님이 오늘은 속절없고, 금석같이 굳은 맹약
돌아스먼 희롱이니.
저도 나한테 마음 두지 않지마는, 나도 또한 저한테 마음 두지 못허는 팔자, 흘러가는 물
우에다 낭구를 심는대도 이보다 더 허망허고 부질없는 세상이리.
"이 말을 들은 소실은 깊을 한숨을 쉼서 대꾸을 했드라야." 자네는 속 모르는 소리
허지를 말게.
이 세상에서 불쌍허네, 불쌍허네, 매이고 묶인 것같이 불쌍한 것이 또 어디가 있겄능가.
소실의 신세는 눙중노 한가지라. 한번 밤록 덜컥 잡혀 조롱 속으 갇혀 노면, 한평생을 그
속으서 굴레 쓰고 못나오네.
정실부인 마님같이 당당허도 못험서나, 허구헌 난 눈 빠지게 기다림서 사는 세상, 수모는
오죽허고 설움은 또 오죽헌가. 허울이 좋아서 이름이 소실이제. 감옥 같은 새 조롱을
고래등으로 대궐로 삼고, 혼자 먹는 깍쟁이 밥 진수성찬 여기다가, 새들새들 속병 들고
피어 보도 못헌 청춘, 속절없는 꽃봉오리 다 지고 마는디.
자네는 좋겄네.
비록 한 시절이라고는 허지만 만화방창 천변만화 흐드러진 좋은날에
호랑나비.범나비.노랑나비.희나비. 이 님 가먼 저 님 오고, 한바탕 어우러져 여한 없이
노니나니.
묶인 디가 있으까. 매인 디가 있으까. 무변 천지 날갯짓이나 한번 실컷 허다 죽으먼
소원이 없겄네. 만고에 소실이 수절헌다고 누가 열녀문을 세워 준다등가. 나 같은
소실살이에다 어찌 자네 팔짜를 빗들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탄식을 했드리야."
아직 손님이 들지 않은 오후, 모찢끼의 뒤안 화단에 쪼그리고 앉은 늙은 기생은,
꽁지까지 타 들어간 담배를 마지막으로 한 모금 깊이 빨아 들이고는 발밑에 떨어뜨렸다.
그때 누렇게 마른 겨울 풀입 사이에서 이제 막 포릇포릇 돋아나는 새풀에 담뱃불이
떨어지자 그것은 안으로 시들어지듯 오그라졌다. 오유끼는 그 생살이 타면서 새 풀입
오그라지는 모습에 어린 속이 자지러져, 저도 모르게 가슴을 두 팔로 감싸며 죄었다.
그리고 늙은 기생의 검은 얼굴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기억이 너무나도 선연하여, 오유끼는 새삼스럽게 기금 막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찌즈끼로 보리쌀 서 말에 팔려 온 오유끼한테 주인 남자는 어느 날 "가야금을
배우라."고 하였다. 그것을 오유끼를 특별히 우대하고 아껴서가 아니라, 손님들에게 비싼
화대를 받아 내기 위한 꽃 장식을 달아 주는 셈이었다.
제대로 된 공부를 깊이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었고 일본 요릿집에 가야금이 당치도
않았지만, 오유끼말고도 몇 사람이 더 한방을 이루어, 잠시나마 둥당거리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배우는 시간은 좋았다.
그러는 하룻날, 선생이었던 늙은 기생이 웬일로 오유끼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저 그럴 법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 저녁에 낯선 나라 낯선 도시
빈방의 한쪽에 앉아 왜 이토록 가슴 후벼 내게 그 이야기를 구구절절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나는, 기생인가, 소실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가. 아아, 그저 한낱 창부에 불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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