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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21)

카지모도 2024. 7. 28.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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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매안의 원뜸으로도 왔다.

내방한 사람이 남자라면 사랑에, 여자라면 안채에 가방을 열어 놓고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쌀과 바꿀 수 있는지를 간곡히 물었다.

방물장수도 아닌 그들이 초면의 집을 방문하여, 쌀 있는 사람이 욕심을 낸 만한 물건을

내놓고, 오직 쌀을 얻고자 할 때, 대소가의 다른 집에서도 혹 벼르던 것이 있었으면,

아무도 모르게 흰 쌀을 감추어 들고 종갓집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쌀 있는 사람들은 진귀한 것을 싸게 살 수 있었다. 때로는 섬사람들도 찾아왔다.

끼니거리 양식이 없어서 김이나 톳, 머자반 같은 해초류를 둥덩산같이 머리에다 하나씩

이고 마을로 들어온 그들은 쌀 한 되만 떠 주면, 그 한 보따리를 다 주고 갔다. 미역은

귀한 것이라 얻기가 어려워 아이를 낳고도 김으로 국을 끓여 먹던 산모도, 쌀이 있어야

미역 다발을 구할 수가 있었다.

이런 곤궁하고 빈핍한 나날 속에서도 사람들은 설이 다가오면, 어떻게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차례 올릴 쌀을 준비했다. 다만 한 되 한 줌이라도.

그것은 지엄한 것이었다. "천하 망헐 놈들, 이제는 허다허다 안되니 설을 다 바꿔 쇠고

허네 그려. 아,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풍습이 나라마다 다르고, 그 조상 모시고 섬기는

제사.차례가 다 우리대로 날짜가 있는데, 뭐? 음력은 미개한 것이니 버리고, 양력으로 설을

쇠라고? 미개하기는 누가 미개하다는 겐가, 제 몸들이야말로 손바닥만한 훈도시 하나 차고

백주대로에 너벌거리고 다니는 미개한 종자들이면서, 어쩌다 우리 국운이 이토록

비색하여 그 같은 왜놈들한테 나라를 빼앗겼는고. 그놈들이 강토를 빼앗더니, 농사 지은

식량도 다 빼앗고. 인제는 설까지 일본설을 쇠라 하니, 정신의 골수를 빼겠다는 수작

아닌가."

명데서 나온 서기가, 올부터는 국민 모두가 양력으로 과세해야 한다고 전하더라는 말을

이기채에게 들은 이정의는, 노안에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꾸짓득 말했었다.

"그까짓 것 안 따르면 그만이지요, 원. 말 겉어야...." "말 같잖은 것이 결국은 말이

되고 만 것이 어디 하나둘인가. 작은 것을 하찮게 보다가는 결국 큰코 다치고 마는

법이야." 이징의는 무겁게 입을 다물었다.

이기채도 더 이상 무슨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이기채가 아직 여남은 살 소년이었을 때, 조선 개국 오백사 년 동짓달 열이렛날을 건양

원년 양력으로 1월1일이라 칭하고는, 고종 임금이 몸소 솔선수범 머리를 깎은후,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었다. 그때 내무대신 유길준의 고시를 따를 관리들은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았다. 가위를 들고 쫓아오는 관리를 보고 달아나는 사람들은 집에까지 따라 들어가

기어이 상투를 잘라 내기도 하였다.

이에 문정공 이도재 같은 대신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오랑캐 습속이라고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분연히 사퇴했으며, "내목을 자를지언정 부모로부터 받은 머리를 자를

수는 없다."고 전국의 각지에서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었다.

"이는 왜놈들이 단순히 머리카락을 자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정신을 잘라

버리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빗다가 빠지는 머리털 한 올도 유재에 싸 두고,여인의 이마 한가운데다 정수리까지

반듯하게 가르는 가리마 금이 손톱만큼만 틀어져도 정신이 비뚤어졌다고 꾸중을 듣는 조선

사람들로서는, 그것을 쑹덩 잘라 낸다는 것이 도무지 말 같을 리가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신분이 미천하여 상투를 트는 것조차 금법이었던 백정이나 천민 판천들, 그리고

제때에 감고 빗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던 사람들은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없어, 누가

무어라고 사기도 전에 스스로 "이 웬수엣 놈의 머리."를 깍아 버리기도 하였다.

"어 씨언하다. 어차피 내 한펭상 망건 쓰고 관자 달고 갓 써 볼 일 없는 머리, 자고 나도

빗질헐 새 없고, 떡이 져도 깜을 새 없는 디다, 흙투성이 땀 투셍이 이나 끓고 서캐 실어,

하루 죙일 긁니라고 머리 속이 패이는디, 머리가 개법게 날아갈 것맹이네 기양."

"싹 깍어 불면 더 씨언허제이. 중대가리맹이로." 택주와 춘복이는 한바탕 목을 젖히고

뱃속까지 들여다보이게 웃었다.

처음에는 다시 없는 불상한놈이나 아니면 머리에 바람 든 개화꾼들이 거치없이 하는

것으로만 알았던 단발이, 하루 가고 이틀 가면서 한 사람 건너 두 사람으로 번져 나가,

드디어는 학생이 있는 집을 말할 것도 없고 웬만히 점잖은 장년들에 이르기까지, 으레

단발을 하는 것으로 알게끔 되어 버린 지금, 밖에서 보아 향내 나는 양반이라 하는 매안의

문중에서도, 가문을 지켜야 하는 종손 이기채를 비롯하여, 문장 이헌의와 그의 재종

이징의같이 항렬과 언치가 높은 노인 몇을 제하고 나면, 거의 모두가 단발을 하고 있었다.

물론 아녀자들은 아직도 감히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없겠지만, 그것까지는 또 그렇다

하더라도 언제부터인가 조선 사람이 흰옷 입는 것 또한 삼엄하게 금하여, 물정 모르고 장에

갔던 사람들이 길 모퉁이에 숨어 있다 쏘아대는 검은 물총 벼락을 맞아, 무명 바지

저고리에 그만 흠뻑 먹물을 뒤집어쓰고는 돌아오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으니, 한번 먹물이

튄 옷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하릴없이 시꺼먼 검정물을 들여야만 했다.

"족제비같이 숨어서 물총 쏘는 놈들은 다 왜놈들."이라고 사람들은 더러워진 옷을

들여다보며 이를 갈았다.

모처럼 마음먹고 진솔 새옷을 해입고 길에 나섰던 이헌의도 이 뜻밖의 횡액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길 가다가 아차 잘못 흙탕물만 한 방울 튀어도 애석하여 몇 번이고 비벼 내개 되는

흰옷에 느닷없이 먹물이 범벅지면, 어느 누구라서 그 옷이 아깝지 않고, 어느 누구라서 그

순간에 수모를 느끼지 않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전 국민이 전시체제로 무장해야 한다면서 남자들은 바지에 각반을 치게

하고, 여자들은 긴 옷고름 자락치마 대신에 몸빼를 입게 하여, 도무지 지금까지는 없던

광경이 생겨났다.

"참으로 물풍이로다." 이헌의는 탄식하였다, 속곳 고쟁이 같은 몸빼를 입은 채 마을로

들어오는 읍내 아낙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그는, 복장이 그렇지 않더라도 내외를 해야

하였겠지만, 하도 어처구니 없어 오히려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던 것이다.

매안만 하더라도 도회나 읍내에서는 멀리 떨어진 곳이요, 정거장에서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이어서, 거센 바깥 바람이 그대로 몰아치지는 않는지라, 마을 안에서는

구습이 지켜지고 있었지만, 누구라도 출입을 할 때는 시속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은 소위 대동아전쟁 때였던 것이다.

이렇게 어지러운 시절 속에서도 염량은 어김없이 계절이 바뀌고 동지 섣달이 지나 다시금

정원 초하루가 되어 설을 맞이하니, 양력설을 쇠라,쇠라, 하는 면 서기의 강요 독촉이

아무리 빗발쳐도 사람들은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여전히 음력 설을 '설'이라 하였다.

이것만은 상투를 잘랐거나, 혹은 각반 찬 당꼬바지, 몸빼, 그리고 창씨개명을 하고 안한

것에 상관없이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명절. 그것은 어미의 품이었다.

이렇게 세상살이가 고되고 서러워 온몸이 다 떨어진 남루가 될 수록 어디에서도 위로

받지 못하는 육신을 끌고 와 울음으로 부려 버리고 싶은 것이 바로 명절이었다. 그 울음은

정중 엄숙한 차례나 세배로 나타나기도 하고, 얼음같이 차고 푸른 하늘에 높이 띄워 올리는

연이나, 마당 가운데 가마니를 베개처럼 괴고 뛰는 널, 혹은 방아네 둘러앉아

도.개.걸.윷.모, 소리치며 노는 윷놀이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 놀이들이 토하는 함성과

흥겨운 노랫소리는 서럽게 뭉친 울음 소리였다.

찢기고 빼앗기어 가진 것 하나도 남지 않은 빈 몸뚱이에 대나무 속같이 텅 빈 창자를

눈물로 채우고, 정월 대보름날 타오르는 달집 앞에 둘러선 마을 사람들은, 검푸른

밥하늘로 터지며 현란한 불티를 날리는 대나무 폭죽 소리에, 와아아, 한 무리 함성을

터뜨린다.

먹을 것이 없다고 대나무도 없으랴.

비록 그 껍데기 다 허옇게 벗겨 냇다 하지만, 산에 가면 또 소나무가 없으랴.

비록 그 껍데기 다 허옇게 벗겨 냈다 하지만, 산에 가면 또 소나무가 없으랴.

대나무로 울을 하고 생솔가지 쟁여 넣은 달집은, 매안에서도, 고리베미에서도, 검은 연기

흰 연기를 뭉글뭉글 올리며 하늘까지 닿도록 불꽃을 일으켜 태우니, 투욱,투욱, 이글거리는

불꽃 내려앉은 소리에, 불각이는 소리, 징 치고 꽹과리 치는 풍물 소리가 문고리에

손이 쩍쩍 들러붙는 한겨울 달밤의 복판을 투명하게 울리고 있었다.

옹구네는 저녁밥을 누구보다 일찌거니 먹고는, 공배네 평순네도 아랑곳하지 않고 먼저

잰걸음을 놓아 고리배미 쪽으로 갔다.

해마다 이렇게 대보름날 저녁이면, 거멍골 사람들은 고리배미로 달집 구경을 가곤

하였다. 매안에서도 달집을 태우지만 그곳은 서슬이 푸르러 문중의 자기네 종족끼리나

흥겨울까, 호제.노비들은 상전들 치다꺼리 하느라고 놀지도 못할 뿐만아니라, 혹 옆에서

구경을 한다 해도 소리 없이 기웃거리기나 할 뿐 언감생심 함께 뛰고 손뼉을 칠 수는 없는

처지여서, 이들은 그보다 좀 만만한 고리배미로 가는 것이었다.

고리배미는 각성바지 산성촌이라 굳이 무슨 집안 누구 자손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어디

타촌에서 들어오는 사람을 텃세로 박대하는 일도 없었으며, 백정.당골, 사천.팔천이라 해서

동좌석을 안할 만킁 모질게 하지도 않았으므로

"내가 살기는 거멍굴에 살어도 본시 상민이라, 백정년도 당골년도 아닌디 즈그들허고

어울려서 어깨춤을 못 추까 머."하는 심사도 있어, 옹구네는 으레 고리배미로 갔던 것인데,

비슷한 처지의 공배 내외, 평순네, 춘복이 들도 모두 달그림자 앞세우고 동행을 하였다.

물론 거멍굴에서 달집을 만들어 태우면 더 좋을 일이겠지만, 오막옴막 몇 가호 되지도 않는

소쿠리 속이라 누가 그렇게 커다란 달집을 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또 세우려 해도 대밭

가진 사람이 없어 대나무 얻기도 어려웠다. 대나무 농사도 재산이어서 애지중지 아끼는

왕대를 낫으로 찍어 와야 하는 일도 수월치 않았다. 그것도 한 집에서 다 얻을 수는

없었으니, 인심 좋은 대밭 주인들을 찾아가 한 다발씩 얻어서 이 집 저 집 것들을 한데

모아야 비로소 달집 울을 두를 수 있었다. 그것이 서로 집안간이라면 당연히 그럴 줄로

알아 대나무를 내주지만, 아닌 경우에는 안면을 보아 차마 거절하지 못할 때에나 추렴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또, 대나무를 찍어 가라고 했다 하여 낫 가진 사람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주인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그가 가리키는 것으로 쳐냈다. 그러나 때로는 엉뚱한

놈을 치기도 하여 두고두고 주인속을 애돌하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대나무를 얻을 재주가 거멍굴 사람들한테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거멍굴에는 풍물이 없었다. 그러니 흥이 날 리가 있겠는가. 결국 한

마장 좀 못되는 이웃 마을 고리배미로 가는 것이, 사람도 많고 달집도 크고, 흐드러지게 놀

수도 있어 그리고 가는 것이다.

고리배미에서 달집을 태우는 곳은 늘 비오리네 주막 옆, 적송의 무리가 구름을 이는

삼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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