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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50)

카지모도 2024. 8. 31.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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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그렇게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어찌 편안하리오.

여름 지나 가을 오면 서리 내리고 상로지사, 아비의 무덤에 찬 서리 시리게

덮이는 그 냉기가 흙 속으로 뻗치어 스미듯, 제 뼛속으로 끼치는 서슬은 만동이

의 무릎을 더욱 여위게 하고 떨리게 하였다. 쑥대강이 같던 봉분의 잡초들이 누

렇게 말라 시들어지며 하루아침에 짚북더미로 쓰러지다가 그나마 얼어붙어 저절

로 죽어 버리는 겨울. 엄동설한의 심정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추위에 이빨이 부딪치는 것처럼 딱. 딱. 마주치게 시린 두 무릎을 베고. 이 허

하고 하찮은 무릎을 베고. 어린 아들은 이토록 달고 깊게 자고 있는가. 아무 근

심도 없이 모든 것을 아비에게 맡기고. 아부지도 이 귀남이맹이로 우주와 천지

의 어린애로 돌아가서. 비록 하찮고 초라한 산천에 야윈 뼈를 드러낸 박토의 무

릎일지라도 거기 머리를 평화롭게 누이고 고요히 썩으며 잠들어 있을까. 지금.

그러나 아닐 것이었다.

그는 결코 아무 것에서나 잠들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이제 나 죽으먼 투장하여 달라."

고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아들 만동이와 며느리 백단이에게 분명히 유언

했었다. 그리고.

"저 욱에 매안에 초상이 나먼."

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살아 생전 자신의 천한 육신 서러운 머리를 아늑하게 기대어 의지 삼을

무릎이 없었으니. 죽어서 혼백이라도 그렇게 포한을 풀 수 있는 명당의 무릎에

몸을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자신이 아들 만동이와 그 아들 귀남이

의 무릎이 되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거대한 보금자리 둥지로 여길 수 있는. 음

덕의 무릎이 그는 되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벌족한 가문의 솟을대문 기둥 같은 무릎 아래 한세상을 살아가는

양반의 무덤 속. 그 좌청룡 우백호의 산수 무릎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했던 것이

리라. 그리하여 다시 태어나려고.

다시 태어나 쉬흔둥이 만동이와 손자 귀남이와 그의 아들. 그리고 또 그의 아

들의 아들이 받고 태어날 운명 속으로 은밀히 스며들려고.

그 심중을 알 것만 같은 만동이는. 제 이야기를 듣다 말고 잠이 든 귀남이의

이마와 눈썹과 뺨이며 귓밥. 콧방울 들을 가만히 어루어 쓰다듬어 보았다. 마치

아비 홍술의 잡초 우거진 봉분의 풀들을 하염없이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듯이.

붕분의 풀들은 꺼끌하고 뻣세면서 적막한 기운이 이상하게 유정하였는데. 귀

남이의 동그만 얼굴은 여리고 보드랍고 따뜻하며 뭉클했다. 그 두 감촉 사이에

만동이의 손이 놓여 다리가 되는가. 그 감촉들은 손바닥의 온기를 타고 이리로

저리로 서로 흘러 넘나드는 것만 같았다.

그런 모습에서 우러나는 심정은 이만큼에 앉아 바라보는 백단이의 마음에도

묻어들어. 어떻게든 시아버지 유골을 수습하여 알맞춤한 명당 산수 한복판에 고

이 모셔 안면토록 하고 싶은 것은 만동이나 마찬가지 심정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묵은 가지에 새잎 나는 봄비 내리고. 번개 치며 바람 부는 장마가 봉분의 옆

구리를 깎으며 쓸고 가고. 우거졌던 나뭇잎이 하염없이 날아 내려 봉분 위에 흩

어진 뒤. 적막 강산 얼어붙는 동지 섣달 흰 눈이 쌓여. 눈물로 그 눈이 다 녹게

울어도. 마음같이 냉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런 중에 한 해, 두 해, 세 해가 갔다.

그리고 또 다시 네 번째 겨울을 하릴없이 보내 버린 이듬해.

백단이는 어느 때보다도 고리배미 비오리네 주막 쪽에 귀를 대 놓고, 스치는

소문 한 조각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주막에는 언제나 매안을 비롯한 인근

마을이며 먼 동네. 혹은 타관에서 묻혀 오는 소문거리가 수북한 때문이었다.

시어미 점데기가 죽으면서 물려준 그네의 당골판은 고리배미와 매안을 합하여

이백여 호가 휠씬 넘었으니 결코 작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고리배미는

민촌이어서 웬일인지 그 하는 일들이 미덥지가 않았고, 매안은 엄중 준절한 곳

이라 누구한테 무슨 말을 붙이러 가기에는 감히 오금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굿 자제가 기만이라. 무당들이 본디 간교한 것들이어서 어리석은 사람들한테

거짓말하고 그 마음을 꼬여내 속여 먹고 사는 족속들인즉, 마음을 낚이지 않도

록 중정을 뚜렷하게 가져야지. 무단히 무슨 일에 앉으면 앉어서 그런가. 서면 서

서 그런가. 경박하게 천한 말에 부화뇌동하지 말라."

는 것이 매안의 말이었다.

허나 사람 사는 일이 그렇게 대쪽 같지만은 않은 탓에 살다 맞는 고비고비 뜻

밖에 궂은일을 당할 때나 해가 바뀔 때. 살을 막고 액을 막고 신수를 가려 보려,

그곳에서도 안부인들이 곧잘 백단이를 부르기는 불렀다.

그렇지만 이쪽에서 넘나들게 허물없이 대해 주지는 않았다.

덕과면 안동네 당골은 양반의 부인들과 마주앉아 겸상하고 한 방에서 형님.

아우. 하면서 잠도 같이 잔다는데. 백단이는 수완이 그네만 못한 탓인지 아니면

아직은 나이 젊어 서로 사귄 정이 엷은 탓인지. 그도 아니라면 워낙 매안의 성

품이 깎아지른 탓인지. 백단이는 속으로 헤아려 보기도 여러 번이었다.

"산소가 있는 산에 불을 놓거나 밭을 일구는 자, 혹은 나무를 마구 배는 자는

무거운 곤장으로 불기 쉬흔한 대를 친다." 고 향약에 명문이 되어 있는 마당에,

하물며 아차 잘못하여 불을 놓은 것도 아니요, 먹고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한 뙈기 밭을 일군 것도 아니고, 나무 몇 그루 만부득이 배어 낸 것도 아니, 투

장이랴.

"죽을라먼 상감님의 덕을 못 차겄느냐."

는 말도 있지만, 그 못지않은 것이 바로 투장이었다.

그것은 시퍼렇게 눈뜨고 서 있는 양반의 생옆구리를 따고, 그 속에다 제 창자

를 우겨 넣는 것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언감생심(焉敢生心).

감히 먹어서는 안되는 마음을 먹고 있는 백단이는 아무도 모르게 귀를 곤두세

워, 행여 무슨 소리를 못 듣고 놓칠세라 마음을 졸였다.

그네가 청암부인 병의 소식을 맨 처음 들은 것도 바로 이 비오리네 주막에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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