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다, 자네 참 무선 사람이네."
"누구는 용해 빠져 갖꼬."
"헤기는 나쁠 거이사 없겄제. 혼백 되야 합방을 해도 음양이 만났잉게 내우 합
장헌 거이나 머 달를 것도 없고, 생각허기 나름일 거이여."
"그렇당게요. 나는 재미가 나 죽겄소. 응골지게 그런 자리가 날라고 그렇게 애
가 말르게 지달렀등게비여."
"어차피 도적질?"
만동이는 백단이의 말을 되뇌었다.
그리여. 어차피 의지헐 빽다구 못 타고난 설움으로 한세상 스산허게 살다 간
인생이 원통해서, 좌청룡 우백호, 실허고 아늑헌 무릎 빽다구 속으로 들으가 자
리잡고 싶었던 것이닝게, 헐라먼 큰 도적질허제, 기왕. 아조 그 음기끄장.
그러서요, 아부지 거그서 좋은 아들 하나 낳으시오.
실허고 좋은 놈으로, 양반 중의 양반이요, 천골 중의 천골인, 두 유골이 서로
만나 양반도 없고 천골도 없는 합방을 허시고, 양반도 천골도 다 뛰어넘는 걸물
아들 하나만 낳으시오.
부디 그 아들 음덕을 우리한테 끼쳐 주시오. 아부지.
"나이도 서로 비젓 안허요? 두 냥반이. 글체?"
"그렁가?"
"거그다가 그 마나님은 한펭상에 단 사흘간 꽃각시 때만 서방님을 뫼세 보고
일생에 혼자 사신 냥반이라 이승의 독수공방이 이가 시리고 뼈가 시려서도 인자
는 지긋지긋헐 것이요. 혼백이라도 독수공방은 마다헐 거이라고오. 안 그래도 무
주공산 혼자 누워 적막헌디, 밤이먼 여시짖고 늑대 울어, 달 뜨먼 더 무선디, 아
부님이 동무허시먼 오직이나 든든허시겄소? 무덤 속이라도 따숩제."
백단이가 느닷없이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쿡 숙이며 킥킥 웃었다.
"왜 웃어. 부정타게."
"안 우습소? 그 가문에, 그 서슬에, 오직이나 고르고 골라 맹당 자리 기가 맥
히게 써서, 옆구리 띳기고 혼백 뺏기고, 명당 기운도 돌리고.
거그다가 마나님끄장 다 뺏기고. 이게 보쌈이제, 혼백 보쌈. 그런지도 모르고는
온갖 위엄 다 부림서, 내노라아, 하는 양이 눈에 뵈야 시방부텀 우숴 죽겄소."
킬 킬 킬.
"저 방정떠는 거이 똑 먼 일 나게 생겼네. 불길허게."
"내가 귀신허고 춤후고 노는 년이요. 먼 일은 먼 일이 나. 나먼 내가 풀먼 되
제. 뱅이(방어)허먼 될 것이고, 부적 써서."
순간 백단이의 눈꼬리에서 파란 불빛이 이는 듯하였다.
그것을 본 만동이는 웬일인지 가슴이 씻기어 식으면서
"아부지가 참말로 좋아허실랑가?"
그 무덤 속 청암부인의 삼엄한 뼈다귀 옆이 참으로 편안하고 아늑허실 것인
가, 싶은 생각이 끼쳐들었다.
살아 생전 무부로서 아낙이 주도하는 굿판의 뒤치다거리 변죽으로 허깨비같이
살아온 아비가 그토록 염원하여 유언까지 한 투장을, 어미 점데기보다 더 세고,
더 두렵고, 더 까마득한 양반의 종부, 천하가 어려워하는 청암마님의 서릿발 같
은 뼈 옆에다 해 드리는 것이 과연 자식으로서 잘하는 일일까. 아니면 이제는
영영 그 염원마저도 가질 수 없는 족쇄에다 영원히 짓눌러 묶어 두는 것일까.
아아, 무거워라.
만동이는 가슴이 짓눌리어 어깨를 오그렸다.
그런 속을 들여다볼리 없는 백단이는 민첩하고 재바르게 날짜를 잡고 무덤을
열어 시아비 홍술의 뼈를 추린 뒤에, 정월 대보름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밤, 수습된 유골을 몇 겹이고 몇 겹이고 백지에 싸서, 금방이라도
들고 나갈 수 있게 해 놓았다.
"투장에는 겨울이 차라리 좋아. 인적도 드물고 파묘헌 자리 표도 잘 안 나고.
거그다 눈이나 몇 번 오먼 흔적도 없제. 저쪽 산소도 쓴 지 얼매 안되야서 흙
이 아직 버성버성 헐 거이고, 떼도 인자 막 갖다 입했을거인디 엄동에 무신 떼
가 자리를 잡간디? 조께 뱃게진 디가 있드라도 얼어서 떨어졌능가 헐 팅게 걱정
없고. 설 쇠고 보름 안데 성묘들도 다 한 번식 댕게갔을 거잉게 인자 날 풀릴
때끄장은 발걸음도 뜸헐 거 아니요? 머이든지 아조 맞춘 것맹이로 잘 맞어드요.
보름날 밤에는 온 동네 이우제 동네 삼동네가 다 벅적벅적 달맞이야 불놀이야,
징 치고 꽹과리 치고 뛰니라고 넘 돌아볼 새도 없능게. 자. 인자 갑시다. 앞장
스시오."
백단이는 몸을 일으켰다.
버스럭.
창호지 뭉치가 구겨지는 소리를 내는데, 그 음산한 기운이 후르르 등골을 훑
어 내린다. 어쩌면 그 뭉치 속에서,
떠그럭.
뼈다귀 부딪치는 소리가 났던 것도 같았다.
창호지같이 희게 깔린 마당의 달빛이 사립문을 나서는 두 사람의 검은 그림자
를 소리 없이 빨아들인다.
두 사람은 발소리도 내지 않고 고살으로 나갔다.
"이제 나 죽어 육탈하거든 합장하여 달라."
고 청암부인은 유언했었다.
열여섯에 먼저 가신 어린 신랑 준의의 시신은 이미 오십여 년도 더된 세월의
풍화로 백옥같이 희고 여린 몇 마디 뼈로 들아갔을 터인데, 그보다 아득히 더
멀리 오래도 살아온 자신의 늙은 몸은 노근처럼 질긴 뼈에, 깊이 근 박힌 살을
아직도 입고 있어 차마 지금은 곁에 갈 수 없으니.
앞으로도 삼 년만 더 기다려 육탈하고, 무거운 살, 겨운 살을 다 벗은 뼈만 남
아 씻기워져 그의 곁으로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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