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달르시라고 간곡히 작별을 하고는, 자기가 공부했던 그 절을 찾어 또 질을
떠났단다. 여러 날을 걸려서 가고 가다가 어느 만큼에 다다라 잔등이를 넘는디,
아차, 여그가 바로 거그여, 그 동네. 어린 머이매한테 도시락 얻어먹고 즈그 아
부지 묏자리 하나 써준 곳.
그 순간에 정신이 펀뜻 들었제.
"그 아는 시방 잘 되얐능가 어쩠능가. 묘소나 한 번 들러 봐야겄다."
그런디 아 거그를 찾어가서 봉게 이놈의 묘소가 쑥대밭이 되야 부렀네. 풀이
엉크러져 우거져 부렀어. 봉분도 무너지고, 누가 언제 사람이 왔다 간 자취도 안
뵈이는, 임자 없는 무덤이 분명허드란 말이여.
"참으로 괴이헌 일이로다. 내가 그때 공부헌 원리대로 자리를 잡었는디 이럴
리가 있능가. 설령 다소 빗나갔다 허드라도 이 지경에 이르다니. 이럴 텍이 없는
디. 우리 아부님 산소야 자리가 안 나와서 못 썼지만, 이 자리는, 자리만큼은 분
명헌디..."
고개를 갸웃갸웃 험서 사방 좌우를 둘러봉게, 저 건네서 나무 허는 사램이 하
나 있어.
"여보시오, 거그 낭구 허는 양반. 미안허지만 말 좀 물읍시다. 여그 이 묘소,
임자가 있소, 없소?"
"아 그 묘소 말이요? 임자가 없는 무덤이요."
"어찌 이 묘소에 임자가 없단 말이요?"
"아 그 몇 년 전잉가, 벌써 한 삼 년 넘어 되얐능게비요. 어떤 동냥치질 가든
놈이 배야지가 고프게 밥을 얻어 처먹을라고 그랬등가 무단히 가만 있는 사람을
들쑤셔서, 여그다 멩당 쓰먼 삼 년 내에 한 백 석은 실히 허겄다고 장담을 허드
라요. 시퍼렇게. 그래 아조 그 말을 딱 믿고 시킨 대로 뫼를 썼다가, 그만 석 달
못가 그 아들이 죽어 부렀소. 매급시 하루아칙에. 머 어디 아푸도 안허고. 불쌍
허게 가난헌 집 홀에미 외아들인디. 그 외아들이 죽어 부러 갖꼬 시방 즈그 어
머이 혼자 사는디, 참 볼 수가 없게 처량허고 가련헌 생활을 허고 있소이다."
하이고, 참 기가 맥히그던.
"틀림없이 삼 년 내에 백 석을 허게 썼는디. 대체 어찌서 이러냐." 허고는 그
질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뱀이나 낮이나 발이 부르트게 걸어서 그 절을
찾어 쫓아갔어. 쫓아가서는 선생님을 뵈입고 엎어져 절을 한 다음에, 이러 저러
한 이얘기를 거두절미, 안허고는 대짜고짜로 그 묘소 앞산 뒷산 좌우 지형을 자
세히 말씀 디린 뒤에, 자개가 산소 쓴 자리 혈을 짚어
"응, 똑 그렇게 생긴 자리만 같음사 삼 년 안에 백 석은 허겄다."
"그런 혈은 무어로 봅니까?"
"새비로 본다."
아, 말이 저와 똑같이 떨어진단 말이여, 하나도 틀린 디가 없어. 그런디 이게
웬일이냐. 무얼 잘못했길래 그런 변이 난단 말이냐. 그래서 실토를 했어. 이 사
램이.
그래도 다 말허든 않고 한 자락은 접어서 물었제.
"사실은 얼마 전에 바로 그 자리를 잡어서 뫼를 하나 써 주고 오는 질입니다.
고마운 어린아를 만났길래 즈그 아부지 산소를 써 줬습니다. 그럼 지가 제대로
썼습니까?"
"너 그 천광(무덤 구덩이) 팔 때 흙색을 봤느냐?"
"예."
"땅이 뻘겋드냐. 거멓드냐."
"뻘건했습니다."
"음, 그것은 죽은 새비다. 산 새비는 거멓고 죽은 새비는 뻘건 거이다. 니가 만
일에 일 년을 더 배우고 나갔드라면 그것까지 알었을 거인디. 일 년을 못 배우
고 나갔으니, 혈은 제대로 짚었지마는 산 거인가 죽은 거인가를 못 짚어 내, 너
그애를 산소 쓰고 석 달 안에 틀림없이 희생시킬 것 같으다."
아하.
이 사램이 물팍을 침서 탄식을 했드란다.
"과시 선생님이시라. 살고 죽는 이치가 마지막 일 년에 들어 있었던 것을. 구
년이나 공부해서 아는 거이 제 아무리 많다 해도 그것은 한낱 죽은 지식에 불과
했다. 눈먼 용, 점안 안된 부처 같은 지식이 그 불쌍허고 선량헌 목숨을 살린답
시고 쥑였구나.
애석하고 무서워라.
구름이나 바라보고 물 소리나 들으란 말, 헛짓 같어 안 들었더니 바로 그거이
천지와 숨소리 나누란 말이었든 것을, 그 숨소리 딛키고 그 숨소리 소통해야 비
로소 화룡점정, 그림 속의 용이 눈을 얻어 하늘로 날어가고, 나무토막, 돌덩어리,
쇠덩어리에 불과헌 불상이 점안의 순간에, 눈에 동자 그려 넣는 그 순간에 대자
대비 영검허신 부처님으로 현신허디끼, 이 일 년 남은 공부가, 아무것도 안 허는
것 같은 이 공부가 내 공부의 눈구녁이었구나.
아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이 사람은, 그 에린 머이매한테 얻어먹은 밥 덩이가 어떠케나 아푸게 목에 메
이는지 이러어케 가심을 두디림서 눈물을 흘렸드란다. 만동이는 제 가슴을 주먹
으로 회한에 찬 몸짓처럼 두웅, 두드려 보였다. 한숨을 쉬며. 그리고는 한동안
손을 떼어 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렁게 무단히 무신 일을 서둔다고만 꼭 존 거이 아니여. 다 때가 있는 거이
제. 아부님 일도. 안 그러요이?"
백단이가 이야기 끝을 문다.
"그건 그리여."
귀남이는 아까부터 만동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이야기를 듣다가 어느결에 새
그르르 잠 속으로 빠져들어 버렸다.
사람의 죽음도 이와 같이 달고 깊은 잠이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목숨의 아비인 우주의 무릎을 베고 누워.
어쩌면 명당에서 그토록 외우는 좌청룡 우백호란, 이 어린 것의 머리를 받아
감싸고 있는 아비의 두 무릎 같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동이는 제 아들 귀남이의 이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이 애비같이 힘없고 불안헌 무릎말고, 더 실허고 따숩고 풍족허고 지체 있는
무릎을 네가 베고 누었드라먼, 그랬드라먼 좋았을 것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제 아비 홍술이 베고 누운 무릎, 그 하찮은 무덤에 생각이 미치자 다
시 한 번 그는 가슴을 두드리고만 싶어졌다.
좌청룡 우백호는커녕 겨우 초빈이나 면한 관을, 개가 와서 파내지 않을 정도
로만 얕게 묻은 그 무덤은, 나중에 개장할 때 일을 생각해서도 그렇게 했지마는,
아니라도 그보다 더 호사스럽게 분묘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이었다.
"아무 곳에 아무개네 무덤이 있다."
고 남이 다 알게 표시나는 것은 절대로 이로운 점이 아니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그 무덤을 헤치고 유골을 옮겨야 하는 뒷일이 있어 만동이
와 백단이는 귀남이한테도 할아비의 산소 자리를 말해 주지 않았다. 데리고 가
지도 않았다. 억새풀 서걱이는 야산 발치 기슭에다 버리듯이 묻어 놓은 홍술의
무덤은 다른 산소처럼 번듯한 모양도 없고, 그 앞에 상석도 비석도 물론 없었으
며, 뗏장조차 곱게 입히지 않았다.
그래서 은밀하게 두 사람이나 알까, 누가 얼른 보면 그저 산기슭에 도도록이
돋아 오른 지형인 줄로 알기 쉬운 이 무덤에, 만동이는 버젓이 낫 들고 벌초를
와 본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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