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새서방님허고 상피를 붙었다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허허어, 허. 효원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
았다. 한동안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네의 얼굴빛이 노랗게 질렸다. 그 질린
기운이 곤두서며 소름을 일으켰다. 그리고 송곳처럼 가슴 복판을 깊이 쑤셨다.
그런 중에 그네는 다만 한 마디를 누르듯 토했다.
"촐랑거리지 말어라. 방정맞게."
그것은 콩심이한테만이 아니라 효원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하였다. 과연 '몸가
짐'이란 무엇일 것이냐.
"형직영정."
이라는 말이 '열자'의 일절에도 있거니와, 무릇 그 모습이 곧으면 그림자는 저절
로 반듯한 법 아닌가. 그러니 그림자만 보아도 그 본모습이 어떤 모양인지 알
수가 있다.
"모습이 곧아야 그림자가 바르니라. 너는 모쪼록 구용 구사를 명심하고, 늘 몸가
짐을 단정히 하도록 해라."
효원이 아직 출가하기 전 대실의 친정에서 자라고 있을 때, 그네의 부친 허담은
여식과 마중앉아 율곡 선생이 격몽요결에서 말한 '구용'과 '구사'를 일러주었다.
그것은 사람이 제 구실을 하기 위하여 마땅히 지녀야 할 아홉 가지 바른 용모와
아홉 가지 바른 생각을 이르는 것이었으니. 구용 1.족용중(발을 무겁게 가져 경
박하게 들어올리거나 흔들지 않는다.) 2.수용공(손은 공손히 두어 만지작거리거
나 함부로 내두르지 않는다. 3. 목용단(눈동자를 단정히 하여 정면을 바로 보고 곁
눈질하지 않는다.) 4.구용지(말할 때와 먹을 때를 빼고는 입을 다물고 움직이지
않는다.) 5.성용정(맑은 음성으로 말하며 재채기나 기침 등 잡소리를 내지 않는
다.) 6.두용직(고개를 똑바로 하여 한편으로 기울게 하지않는다. 7.기용숙(호흡을
조절하여 늘 엄숙한 태도를 지니도록 한다. 8.입용덕(항상 반듯하게 서며 어디
기대지 말고 점잖은 태도를 가진다.) 9.색용장(낯빛을 늘 바로잡아 가지런히 하
여 태만한 기색을 내지 않는다.) 구사 1.시사명(항상 눈에 가림이 없이 사물이나
사람을 바르게 볼 것.) 2.청사총(항상 남의 말과 소리를 똑똑하고 분별있게 들을
것.) 3.색사온(항상 온화하여 얼굴에 성난 빛이 없도록 할 것.) 4.모사공(항상 외
모를 공손하고 단정하게 가질 것.) 5.언사충(항상 진실하고 믿음이 있는 말만 할
것.) 6.사사경(모든 일에 공경하고 행동을 조신히 삼갈 것.) 7.의사문(항상 의심이
있을 때는 반드시 선각에게 물어 알 것.) 8.분사난(분한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사리로 따져서 참을 것.) 9.견득사의(항상 재물을 얻게 될 때는 의와 이를 구분
하여, 얻어도 되는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명확하게 가릴 것.)
"이 가르침을 명심하여 마음에 새기면, 남들한테 본이 될지언정 결코 흉이 되지
는 않으리라."
허담은 그렇게 말하였다. 콩심이를 내보낸 효원은 곧추세운 무릎 위에 손을 얹
고 곰곰이 그 말씀들을 하나하나 속으로 짚으며 골똘한 생각을 하고 있다. 마치
그 구절들에 매달리는 사람처럼. 그것을 놓치면 그만 까마득한 벼랑의 낭떠러지
로 걷잡을 수 없는 급류에 휘말리고 말 것만 같은 그네는, 밧줄에 마음을 묶어
'구요', '구사'에 걸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아귀에 잡힌 치맛자락이 후르르 떨
린다. 내, 이런 일은 짐작도 못하였다. 효원의 눈에 분노와 절망과, 어이없어 오
히려 그 분노와 절망이 허망한 골짜기로 깊이 패인다. 그네는 어디랄 것도 없는
벽 모서리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 아까부터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러할 때 어찌
하란 말씀은 왜 없습니까.
"항상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먼저 깨달은 이에게 물어서 알라."
고 하였지만, 이와 같은 일을 당하여 누구에게 지혜를 물을 수가 있을 것인가.
또한 이런 일이 지혜를 묻는다고 풀릴 실타래인가. 지혜를 구하기에 앞서 감정
이 북받치고, 먼지의 회오리 같이 취몰아 일어난 그 감정은 가슴패기 복판을 가
시같이 할퀴면서 머리 속으로 치밀어, 그네를 질정하기 어렵게 하였다. 효원은
그만 눈을 감고 만다. 어지러운 탓이었다. 먼지를 삼키고 있는 가슴이 또 한 번
거꾸로 뒤집히면서 부옇게 그네를 흔든다. 회오리 도는 흙먼지 저만큼에 강실이
가 빗기어 서 있다. 황사 바람꽃 너머 그림자로 비치는 모습이다. 나오라. 이리
나와서 나를 보라. 효원은 그림자를 향하여 두 다리를 버티고 섰다. 아아, 너는
누구이냐. 너를 보이라. 버티고 선 효원은 장승 같다. 아홉 가지 용모의 다스림
과 아홉 가지 생각의 다스림을 강실이라고 모를 리가 있으랴. 평소의 그네를 보
면 따로이 그런 항목들을 새기고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찌하
여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콩심아."
효원은 강실이를 부르는 대신 쌍창문을 열고 마당을 내다본다. 콩심이가 건넌방
누마루를 올려다 보더니 얼른 토방으로 올라선다.
"세숫물 시방 디우는디요."
이른 새벽,큰사랑에서 기침 소리가 울리고 담뱃대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누구
보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사람은 물담살이 붙들이다.
"야 이놈아. 느그 어매도 어지간히 맴이 급했등갑다. 욱으로 줄줄이 염라대왕 앞
으로 다 놓치고는 너 하나 어쩌든지 붙들어 둘라고, 아조 기양 이름에다 명을
짬매 놨그만. 붙들어라, 붙들어. 아 이놈아, 그 물지게 꽉 붙들어어, 어크러져, 쩌
저 저 저. 저런당게. 너 간들간들 허고 댕기는 것 봉게로 느그 집안 내력을 알겄
다. 아 왜 넘 먹는 밥 다 먹고, 가난헌 집도 아니고 대갓집 담살이 머심 삼서 그
렇게 물외꼭지 비틀어진 것맹이로 바싹 말러 갖꼬 댕기냐 너는? 뇌에러니. 낯꽃
이라고 똑. 너 그래 갖꼬 어디 쓰겄냐? 진새도 못허고. 펭상에 물담살이 허다 말
겄다잉? 기운 내, 이놈아."
동네 머슴들한테 곧잘 그런 퉁을 먹기도 하는 붙들이는, 그리도 물담살이가 깔
담살이보다 낫지, 싶은 모양이었다. 집안에 새암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
은 정화수를 긷고, 밥물을 붓고, 냉수를 떠 마시는 정도의 수량이어서 아주 조심
스럽게 아껴가며 썼고, 그 외에 하루에도 몇 독아지씩 엄청나게 써야 하는 물은,
집 바깥의 우물에서 길어 왔다. 그 물 긷는 일만을 전담하여 집안에 물 떨어지
는 일 없게 하는 것이 물담살이였다. 우선 붙들이는 이 일이 단순해서 좋았다.
등에서 물지게 벗을 틈이 없기는 하지만 복잡한 다른 과정 없이, 집에서 우물,
우물에서 집, 왔다 갔다 하며 물만 그득그득 길어 나르는 것이니, 고달프기로 하
면야 어느 누구인들 고생 안하고 살리요마는, 일의 성격이 붙들이한테는 맞았다.
그러나 깔담살이는 또 달랐다.
"나는 물담살이 까깝해서 못헌다. 무신 광대 줄 타는 것도 아니고, 똑같은 질에
이리 오고 저리 가고 물만 퍼 담는 거이 질리도 안허까? 니가 좋당게 헐 말은
없다만. 나는 꼴망태 하나 짊어지고 거그다 낫 한자리 터억 꼽고 대문 배깥으로
나서먼, 머심살이 찌그러져도 속이 티이고, 내 세상이야 싶으드라. 오늘은 여그
서 꼴 비고, 내일은 저그서 꼴비고. 하늘도 보고 새도 보고 구름도 보고, 거그다
꼴 빌 때 보먼 풀무데기 파란 속에 꽃도 보고. 그게 참 이뿌다이? 어뜬 놈은 요
만헌디 노랗고, 어뜬 놈은 요렇게 지댄헌 대궁에 남색이고. 흰꽃도 있제. 나비도
있고. 아이고, 머심살이 인자사 담살잉게 앞으로도 창창허지마는, 그런다고 누가
땡게서 쭐여 주도 안헌디 속만 태우먼 멋히여어? 소 멕이고 꼴 비고 허다 보먼
중머심 상머심도 되겄지 머."
새끼머슴인 담살이, 그 어린 머슴들은 서로 그래도 네 것보다 내것이 더 낫다
하며, 풀잎을 걸어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얼어붙은 겨울에는 물담살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을 붙들이는 절감하였다. 우물가의 물이 얼어 여간 미끄
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물물은 얼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동네에서
제일 먼저 우물에 가는 것은 대개 붙들이다. 아침에 쓸 식구들 세숫물이 늦으면
꾸중을 듣는다. 그것도 솥에 다 데워 내야 하는에. 콩심이는 그 물을 퍼내 각 방
의 어른들게 세숫물 심부름을 했다.
"세숫물이 아니고. 들어오너라."
효원은 콩심이를 안으로 불렀다. 웃목에 앉은 콩심이는 의아한 낯빛으로 효원의
눈치를 살핀다. 엊저녁으도 못 지무셌능게빈디. 어쩌까아. 내가 매급시 그런 말
씀을 디맀으까? 봉출이가 머라고 허드래도 기양 나만 알고 있을 것을. 음마, 그
래도 나는 들은 대로 다 욍기든 안했는디? 딴에는 추려서, 벼락맞을 말은 빼고,
안할 수 없는 말만 했다고 생각 하는데도 효원의 충격은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
은 것 같았다.
"너 입조심 해야 한다. 알았지?"
효원은 무겁고 엄중하게 말했다.
"예."
"나가거라."
"예."
한 마디 하고는 그만 굳게 입을 다물어 버리는 상전 앞에서 콩심이는 얼른 일어
서지 못한 채 머뭇거린다. 그러자 콩심이 대신 효원이 몸을 일으킨다. 속에서 불
기운이 치민 탓이었다. 그네는 부엌의 화로에서 불씨를 찾아 마른 솔잎을 대고
후욱, 입김을 불어낸다. 효원의 가슴 명치에 그득 찬 화기가 솔잎에 화르르 붙는
다. 금방 붙들이가 물을 퍼다 부은 항아리전을 행주로 훔치고 있던 안서방네는
작은 솥 아궁이에 얼른 불길을 받아 넣는다. 아궁이의 마른 솔가루 가리나무에
옮겨 붙는 불길이 버르르 소리를 내며 기세 좋게 타오른다. 그 불땀을 따라 효
원의 가슴이 같이 탄다. 맵싸하게 퍼지는 새벽 연기가 푸르게 고샅으로 흩어질
때, 오류골댁 낮은 굴뚝에서도 연기가 오르고, 수천댁의 마당에도 냇내가 자옥하
였다. 강태의 아내 새터댁은 불씨를 살려 아궁이에 불을 붙여 놓고는 시 어머니
수천댁한테 밥할 쌀을 받다 온다. 수천댁은 공출이 무서워서 뒷 골방에 이불을
여러 겹 덮어 감추어 둔 뒤주에서 한 끼 식량을 내주고는 절커덕, 열쇠를 채운
다. 기표는 벌써 아까부터 일어나 간밤에 별 일이 없었는지 집 안팎을 한 바퀴
휘이 돌아보고, 외양간이며 돼지우리를 살핀 다음 마당을 깨끗이 쓸어 놓고 다
시 사랑으로 들어갔다. 계집종 오빼미는 둥그런 눈을 껌벅이며 솥에서 김이 오
르는 더운물을 놋대야에다 퍼내 사랑으로 세숫물을 내간다. 차가운 새벽 마당에
누군가 중뜸으로 내려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오빼미는 세숫대야를 든 채,
누군가, 하고는 고개를 갸웃 틀어 고샅 쪽을 내다본다. 봉출이다. 심부름을 가는
모양이다. 아랫몰 임서방은 사립문을 훨쩍 열어제쳐 놓고 삼태기를 들고는 개똥
을 주으러 나섰다. 그것은 뺄 수 없는 일과이다. 한 걸음만 늦어도 남들이 다 주
워가 버리기 때문에 부지런히 서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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