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시린 그림자
강실이는 선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빙천의 얼음 같은 달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멀리서 울리는 대보름 풍물 소리는, 아득하게 멀어서 오히
려 강실이 서 있는 오류골댁 살구나무 검은 그림자 언저리 사립문간을 적막하게
도려내어, 무슨 깊은 물 가운데로 잠겨들게 하는 것 같았다. 그 물은 소리도 없
고 빛도 없어 이승이 아닌 어느 기슭에서도 저만큼 밀려나가 있는 물이었다. 그
묵적의 숨죽인 수면 위에 시린 달빛의 성에가 푸르게 어리고, 그 성에 속에 강
실이는 마치 얼어 붙은 흰그림자처럼 서 있는 것이다.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강
실이의 얼굴은 이미, 정월 밤의 검푸른 하늘에 뜬 흰 달보다 더 창백하게 얼어
있었다. 아까 날려 보낸 액막이 연은 어디로 날아가 하늘의 수심 까마득한 곳으
로 가라앉았는지 이제는 보이지도 않았다. 액막이 연이, 이마에 선연한 물들인
꼭두서니 홍꼭지 대신 건은 먹으로 '액'이라 써 붙이고, 귀신의 낯빛같이 허옇게
질린 창호지 치마를 나울거리며, 연꽁지에 조그만 제웅을 고적하게 매단 채 훌
렁 떠올라 깟닥깟닥 하늘 한복판으로 날아 들어갈 때. 강실이는 웬일인지 그 연
꼬리에 가느다랗게 매달린 실이 명주실처럼 느껴졌었다. 마을 뒤 저수지 청호의
물은 하도 깊고 푸르러, 명주실 몇 꾸리를 다 풀어도 그 바닥에는 닿지 못한다
하던가. 그래서 어느 해 어느 봄, 각시 복숭아 진분홍 꽃잎이 숨막히게 지고 지
던 밤, 소복을 한 인월 아짐이 한순간에 몸을 던져 물 속으로 빠졌을 때, 사람들
은 끝내 그네를 찾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했다던데. 강실이는 그 이야기를 들으
면서 인월 아짐 흰 등어리에 금방이라도 툭 끊어질 듯 가늘면서도, 잡아 끊으려
하면 오히려 손을 베어내고 마는, 질긴 명주실이 길게 길게 매달린 것만 같은
환영을 보았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생년월일 생일 생시를 적어 넣은 백지에
액을 안고, 허수아비 지푸라기 제웅은 연에 매달리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밤
하늘로 몸을 던지었으니. 궂은 액 사나운 운수는 다시 떠오르지 않을 것인가. 아
니면 명주실 같은 연실에 걸리어 그만 다시 이곳으로 잡아당겨지고 말 것인가.
그네는 이제 아주 안 보이게 된 액막이 연이 어째서인지 자신의 몸만 같아서,
마치 저수지에 몸을 던진 인월 아짐처럼, 밤하늘의 복판 아찔한 수심 속으로 깊
이 빠져 잠겨들고 있는 것이 역력히 느껴졌다. 명주실. 이미 그네를 지상으로 잡
아당길 명주실은 연 자새에서 다 풀리어 무엇에도 제 가닥을 걸어 볼 길 없어,
머리카락 한 올처럼 시르르 허공에 떠오르며 이윽고 흔적을 감추어 버렸다. 무
슨 액을 막으려 엄니와 아버지는 이 달 뜬 밤, 연을 띄우셨을까. 강실이는 한숨
을 삼킨다. 한숨도 서걱서걱 얼어 있다. 시리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6권 (12) (1) | 2024.09.23 |
---|---|
혼불 6권 (11) (1) | 2024.09.22 |
혼불 6권 (9) (1) | 2024.09.20 |
혼불 6권 (8) (0) | 2024.09.19 |
혼불 6권 (7) (4) | 2024.09.13 |